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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91화 (391/541)

사냥(10)

효윤과 태주갑은 지난번에 탔던 것과 같은 종류의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태용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에 올랐고, 세 사람은 지난번과 똑같이 앉아서 칸발리크로 향했다.

이번에도 이 열차는 ‘시험운행’이라는 명목으로 대륙을 가로지른다.

고려의 장교들이 국경 따위는 무시하고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 대원철도주식회사의 사업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을 것이다.

그 장교들이 어떤 나라를 합병할 계획에 헌신하고 있으며, 민감한 비밀들을 캐고 다닌다는 걸 알면, ‘어떤 나라’의 이른바 ‘애국자’들은 무척 불편하겠지.

하지만 고태용은 속으로 냉소 한 번을 날려주고, 최효윤과 태주갑이 얼마 전에 건네주었던 자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작전에서 입수하신 문건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효윤이 눈을 빛내며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인다.

이 아가씨, 정보를 다루는 쪽에서는 아직 미숙하구먼, 하며 고태용은 쓴웃음을 삼켰다.

“‘누군가’가 이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있다는 건 그 문서로 확실해졌죠. 그리고 그런 규모라면 일개 기업 수준에선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정부, 국가 단위로 뭔가 움직인다고 봐야겠지만…….”

그는 말을 흐리곤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게레센제 카간 앞에 증거를 들이대며 추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칭’ 입헌군주들은 이런 점에서 참 편하다.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짐은 헌법에 따라 정부를 존중하노라, 짐은 정부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겠노라’라며 도망칠 수 있다.

그럼 정부 쪽에 따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정작 그쪽 정부에선 ‘자세한 상황을 파악해보겠다’라며 시간을 끌면 그만이다. 아마 조사를 시작하지도 않고 그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겠지.

뭐 그것도 여기 세 사람에게 그럴 권한이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고, 당장은 볼로드와의 접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씁쓸한 얼굴로 효윤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은 시레문.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딸의 친구’를 반갑게 맞아주던 카간이라면 흔쾌히 직접 만나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얽혀버린 모든 문제를 쉽게 담판 지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부질없는 생각이다. 애초에 시레문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다시 현실로 눈을 돌리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겠네요.”

“네. 본국에 보고해서 외무성을 통한 압박이 들어가도록 하든지.”

“아니면 더 깊이 추적해 들어가든지.”

효윤의 대답에 그제야 고태용은 씩 웃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칸발리크로 함께 가자고 제안드리고 싶군요.”

효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고태용이 상체를 숙였다.

칸발리크로 가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기차가 칸발리크역에 도착하자마자 작전은 시작된다.

“중장 각하께선 말씀드린 대로 몽골 제국입헌당과 접촉해주십시오.”

볼로드나 게레센제의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칸발리크에서 활동하려면, 현지 세력의 보호를 받는 수밖에 없다.

고태용은 그렇게 말해두곤 전보를 보내러 걸음을 옮겼다.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벌건 대낮에 고려의 고급장교에게 위해를 가할 자는 없겠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고태용이 전보를 보내려는 곳은 제국정보사령부다. 다른 지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여기 칸발리크에선 지원이 더 필요하다.

대사관을 통해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띈다. 비밀을 유지하고 싶다. 외무성에서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면 평범한 시민의, 평범한 전보인 것처럼 보내는 게 좋겠지. 마음속으로 암호문을 가다듬으며, 전보국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미리 사복으로 갈아입길 잘했다. 아무래도 고려군의 군복은, 그것도 소장 계급장까지 달고 있는 장교 정복은 시선을 끄니까.

그러다 문득, 뒤통수를 당기는 느낌이 고태용을 덮쳤다.

순식간에 알아차린다. 미행이 붙었다.

고개를 돌리진 않고, 걸음도 그대로 계속한다. 방향을 틀 때만 곁눈질로 미행을 확인해본다.

-저 사람이……?

낯익은 사람이다.

미행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

아니, 미행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따라붙었는데…….

***

고태용의 가방에서 고려군 장교 정복이 발견되자, 칸발리크 경찰은 먼저 주 몽골 고려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다.

대사관이 상황을 파악하고 칸발리크에 체류 중인 다른 고급장교, 최효윤에게 연락한 것은 늦은 오후의 일.

서둘러 영안실에 도착한 효윤과 주갑 앞에는,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고태용의 시신이 누워 있다.

사인은 딱히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목뿐만 아니라 가슴과 복부를 비롯해 찔려선 안 되는 자리 여기저기에 칼날이 드나든 흔적이 보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시체로 누워 있다. 특별히 친근감을 느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료가 죽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기분이 가슴에 차오르는 걸 짓씹으며, 효윤은 자기들을 여기까지 안내해준 경찰에게 물었다.

“……사건 현장은 어땠죠?”

“피가…… 그 주변을 완전히 피범벅으로 만들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경찰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칸발리크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을 겁니다. 그래서 놀란 시민들이 어떻게 말리지도 못하고…….”

경찰의 변명 자체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일은 실전을 겪어본 사람도 대처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평범한 시민들이야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효윤이 물은 건 그따위 사실이 아니다.

“범인의 흔적 같은 게 나왔냐고 묻는 겁니다. 용의자는 확보했는지, 혹은 사건 직후에 체포했는지, 수배 중인지!”

젊은 여자에게서 벽력같은 호통이 떨어지리라곤 생각 못 했기에, 경찰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목격자들을 대상으로 인상착의를 조사하고는 있습니다만…… 범인은 곧바로 인파 속으로 사라져서…….”

얼핏 들으면 답답한 상황이지만, 이 설명만으로도 아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효윤은 태주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태용 소장이 전투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죠?”

“기습을 허용했다고 해도, 웬만해선 이 정도로 당할 사람은 아닙니다. 제국정보사령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도 아니고요.”

“미행 정도는 쉽게 눈치챘겠죠.”

“예. 즉, 고태용 소장은 기습을 알아차리고 정면에서 붙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도 현장에 흔적 정도는 남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상대는 굉장히…… 강하다는 말.

“범인이 이단이었다는 진술은 없죠?”

효윤의 질문이 다시 경찰을 향한다. 경찰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예……. 그냥 강도와 몸싸움을 벌이는 줄 알았다고…….”

고태용을 상대로 그런 상황을 연출했다면 평범한 노상강도는 아니다. 칼 좀 다룰 줄 아는 잡배도 아니고.

10년 이상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다.

그리고 그런 훈련을 시킬 수 있는 기관은…….

“유품은?”

영안실 직원이 가방을 내밀었다. 낚아채듯 받자마자 열어본다.

“……역시.”

장교 정복을 비롯해 신분을 알 수 있는 것, 세면도구 같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대체 얼마나 많은 기밀을 이 안에 담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두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이건 국가 단위의 일입니다.”

범인의 훈련 상태도, 목적도 그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한 모든 일이 ‘적’에게 새어 나갔겠군요.”

“즉각 본국에 연락하도록 하죠. 우리도 이젠 안전하지 않으니까 흩어져서 임무를 수행할 순 없습니다. ‘탈출 작전’에 임한다고 생각해주세요.”

***

한참 전화기 앞에 서 있던 리안은 다시 견하 앞으로 돌아왔다.

“고태용 소장이 살해당했어. 칸발리크에서.”

약간이지만 기운을 잃은 듯한 어조다. 리안은 견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잠시 뒤에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는 냉철한 상황 파악에 들어간 통치자의 음성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고태용 소장에겐 ‘게레센제의 비밀을 캐보라’는 명령을 내리셨었죠?”

리안의 태도에 호응하듯 견하의 대답도 거침없다.

“그래.”

“그렇다면 고태용이 진실에 근접했고, 게레센제 쪽에서 더는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판단에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요?”

리안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견하는 소파 위로 올라온 리안의 다리와 발가락을 보며 고태용의 죽음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리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이긴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해.”

“누구나 이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누구나 ‘게레센제가, 혹은 몽골 정부의 누군가가 암살을 사주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지. 하지만 내가 게레센제 카간이라면…… 자신이 범인이라고 바로 지목될 일을 또 저지르진 않을 것 같아.”

이미 그는 신수덕을 탈출시켜주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의심의 꼬리표가 덧붙는 건 너무 위험하다. 감수할만한 위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고태용이 살해당한 방식이 의심스러워.”

“방식이…… 어땠는데요?”

“칼로 난도질당했어. 그것도 대낮에, 칸발리크역 앞 거리 한복판에서.”

살해 방식을 듣자마자 끔찍하다는 느낌보다, 의아함이 먼저 떠오른다.

견하라면 그런 방식은 쓰지 않는다.

일단 시간과 공간이 문제다. 최소한 해가 진 후, 새벽이 미처 밝아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어려운 숙소 등의 공간에서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게다가 수단은 칼.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총기를 휴대했을지도 모를 군인 상대로는 위험하다. 어쨌든 근접해서 격투를 벌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총에 먼저 맞거나 칼을 빼앗기고 반대로 살해당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칼은 피가 너무 많이 튄다.

“범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 칼을 썼다면 피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숨는 데도 꽤 고생했을 거야.”

“종합해보면…… 이건 ‘보여주기 위한’ 암살이네요.”

“그리고 어떤 결론까지 유도하는 암살은 아닌가, 의심해봐야지.”

누군가 몽골과 고려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기 위해서.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야. 여전히 게레센제가 배후일 가능성이 가장 커. 그 외에는 몽골 외교가 고려에 끌려다니는 데에 반감을 품은 극단주의자나, 한족 반란군의 잔당도 의심해볼 수 있지.”

모두 다이온 내부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거기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 당황해서 서둘러 움직일 필요는 없어. 다른 뭔가가 나올 때까지, 여유를 갖고 냉정하게 판단해야지.”

리안이 견하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견하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역시 고양이처럼 장난을 친다.

그 귀여운 모습에 견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하던 생각을 이어나간다.

고태용과 함께 짠 ‘계획’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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