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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90화 (390/541)

사냥(9)

누군가 이들에게 몽골군의 물자를 보급했다면 분명 그 물자가 모이는 곳이 있으리라 추정했다.

그렇게 수상한 물자의 이동 경로를 역추적, 여기에 이른 것이다.

-적 경비 병력에 접근, 무력화했다.

-침입이 발각되진 않았다.

-작전 속행하겠다.

총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력화’했다는 건 나이프로 적의 목을 쓱싹, 했다는 의미겠지.

아군의 무력이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해도, 기습의 이점을 버리는 짓은 굳이 하지 않는 게 좋다.

가능한 모든 이점을 활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 그리하여 목표는 거의 완벽하게 달성하고, 아군의 사상자는 최소화하는 것.

전술의 기본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겠지만, 어쨌든 효윤의 방침은 그러했다.

다만 염려되는 게 있다면,

“고태용 소장이 가져온 정보가 제대로 된 거였으면 좋겠어요.”

방금 죽은 창고 경비원들이 그저 무고한 사람들이었다면? 이 창고 안에 든 것들이 적의 음모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를테면 시장에 팔리길 기다리는 잡다한 상품에 불과하다면?

태주갑은 무게감 있는 사내였지만, 오늘은 더욱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집중하십시오.”

효윤처럼 임무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장교들이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인다. 작전에 대한 의심, 불안.

하지만 태주갑은 다시 한번 명확하게 강조한다.

“중장 각하께서 하셔야 할 일은 작전의 목표와 진행과 결과에 집중하는 겁니다.”

일단 살인 무기가 날뛰는 전장이 펼쳐진 이상, 죽고 죽이는 건 불가피하다. 모두의 목숨을 건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휘소를 믿고 있을 ‘부하들’의 목숨만이라도 건지겠다는 생각으로 작전에 집중해야 한다.

-돌입하겠다.

효윤이 빠르게 승인하자마자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그 굉음과 연기를 방패 삼아 고려의 숙련된 병사들이 창고 안으로 진입하고 있으리라.

안에는 인화성 물질이 있을지도 모르니 교전 시에는 특히 주의하라고 전했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총격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총성이 들리는 양상으로 봤을 땐 아군만 사격하는 게 아니다. 창고 안의 적들도 반격하는 듯하다.

아니, 적이 먼저 사격하고 이쪽에서 반격한 건가?

-인부로 위장하고 있던 적 5인 사살.

-아니, 이건 위장이 아니라 인부이면서 동시에 적병이었을 지도 모르겠군.

딱히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니라, 여기서 일하면서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무장을 갖추길 요구받은 것 같다. 그런 추측이 보고된다.

적이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라, 최소 기업으로 기능하는 집단이라면 그 배후의 용의자도 좁혀진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창고 안에 든 ‘물건’이다.

-몽골제 총기, 탄약, 다량 확인.

-정비 중인 군용 차량도 보인다.

“그보다는 서류 같은 건 없는지 확인을. 물자 집적 목적이나 출처를 알아낼 수 있는 문서일수록 좋다.”

창고 안에 있는 무기류를 몰수하긴 힘들다. 운송 능력이 된다고 해도 차량에 싣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에 기습을 눈치챈 적이 증원 병력을 보내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지금 이 부대의 전력이라면 물리치기야 하겠지만, 기습으로 달성하려던 원래 목표는 어그러진다.

창고로 침투한 각 팀은 역할을 나누어 후속 조치를 시작한다.

주변을 경계하는 한 팀. 창고에 폭탄을 설치하는 한 팀. 자료를 수색하는 한 팀.

일 처리는 신속하다. 어차피 폭파할 창고이니 나중을 생각할 필요 없이 마구잡이로 뒤엎는 소음이 들린다.

다만 이것이 적의 유인, 기만책일 수 있으니 서랍 따위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진 않은지 경계한다.

-문건 몇 가지를 찾아냈다. 다만 여기선 목표에 얼마나 근접한 것인지 식별하기 어렵다.

어떤 언어로 작성되었는지는 알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몽골어로 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현장에서 번역해가며 파악하긴 어렵다. 게다가 이런 성격의 문건은 정보를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직접 분석해야 한다.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나서 효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짝 긴장했던 몸을 풀어준다. 그제야 태주갑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좀 태가 나시는군요.”

“이것보다 대규모 작전을 지휘하는 건 어렵겠죠?”

“저도 아직 중령에 불과하니 확답을 드리긴 어렵겠습니다만, 예.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성장을 멈출 순 없다. 효윤은 다시 한번 자신이 이 임무를 맡은 이유를 떠올린다.

일선에서 싸우는 칼잡이가 아니라, 더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던가.

자신을 다잡고, 작전의 마무리에 집중한다.

다행히 철수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이뤄졌다. 적의 추격은 없었고, 창고는 시원하게 폭발했다.

조금 더 얼쩡거리면 적의 증원이 오는 걸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쓸데없이 그런 일을 할 이유는 없다.

입수한 문건은 고태용에게 넘겨 자세한 분석을 기다려야 한다.

효윤은 병력을 싣고 이동하는 트럭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다음 작전까지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

가늘지만 만져보면 의외로 튼튼한 팔이, 뒤에서부터 견하의 목을 감싸 안는다.

목덜미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온기.

귓가를 다른 이의 숨결과 머리카락이 간질이는 감각은, 처음과 달리 더는 낯설지 않다. 이제는 익숙한 만큼 안도감을 준다.

그렇다. 스무 살짜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거대한 계획 속에서 견하의 몸과 정신은 늘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 긴장을 풀어주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

물론 리안에게도 견하는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 사람이다.

견하는 자신의 앞에서 교차한 리안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리안의 귓불 아래 하얀 살결에 입술을 살짝 얹었다.

아이가 장난스레 까르륵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리안은 몸을 살짝 튼다. 하지만 멀어지진 않는다.

여전히 소녀인 그녀.

견하는 감동 비슷한 것이 가슴에 차오르는 걸 느낀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것을 얻었다.

애정은 문득 불안으로, 그리고 다시 공포로 변하곤 한다.

견하는 이미 가족을 잃어봤다.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

가족을 잃을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리안을 잃을 순 없다. 리안마저 잃는다면…… 잃고 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러니까, 다시는 이 ‘새로운 가족’을 잃지 않을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애정을 담은 견하의 눈동자 너머에서, 권력을 향한 갈망의 불꽃이 타오른다.

리안의 권력이든, 견하의 권력이든……. 아니, 견하의 안에서 그 둘은 이제 더는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견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리안은 견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연하의 귀여운 남자친구. 하지만 어떨 때는 오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사람.

사랑을 담아 바라보지만, 동시에 그녀의 눈은 걱정을 담고 있다.

견하에게서 어떤 ‘이상증세’가 나타나지는 않는지 살피려는 듯.

세상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다. 아니, 불안정한 하늘 아래 있다고 해야 할까.

견하의 정신도, 왼팔을 비롯한 몸도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해가는 건 아닐까.

간혹 자다 깨면 그의 변해버린 팔을 한참 동안 살펴봤다. 어떨 때는 그의 가슴팍이 제대로 오르내리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그가 평화롭게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안심하곤 다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정신. 그렇다. 이상증세는 육체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날카롭게 벼려진 통찰, 때때로 번뜩이는 천재성.

그것을 보며 감탄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너머에서 인간적이지 않은 냄새를 맡아서다.

이젠 그도 성인이고, 리안과 함께 일한 지도 몇 년 되어간다. 단순히 견하의 자질이 뛰어나서 그런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자신의 불안은 그저 노파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편한 쪽을 ‘믿는’ 것과 명확히 느껴지는 불길함 사이에서, 리안은 후자를 고르는 사람이다.

“있잖아…….”

그렇기에 최근 견하의 행보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려 했는데, 그 순간 견하의 얼굴이 미소를 그렸다.

“따뜻하네요.”

붕대로 감은 왼손 너머에선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리안의 두 손을 감싼 오른손만 따스하다.

새삼, 자기 손이 견하의 손에 비해 얼마나 작은지, 이렇게 감싸인 채로 느끼는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그 감각에 빠져든다.

나오려던 말은 다시 내려간다.

시선을 피한 채, 그저 이 따스함만 느끼고 싶어 견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향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게 느껴진다. 손은 목덜미와 귓가를 스쳐 올라가, 리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오늘은…….”

리안이 하려던 말을 끊고, 전화가 울렸다.

견하와 리안이 휴가를 나온 이 별장은,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외부와는 거의 단절되어 있다.

전화선도 태사부에만 이어졌다. 즉, 이 전화는 태사부에서 직접 리안에게 올리는 보고다.

“내가 받아볼게.”

어차피 감찰국장 따위가 받을 수 없는 전화일 터. 하지만 태사부의 비서관이 아니라 태사가 직접 전화를 받으러 움직이는 광경은 견하만 볼 수 있다.

셔츠 아래, 가느다랗고 하얀 다리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모습도 견하만 볼 수 있고.

키가 크지 않아서 그렇지, 리안은 신체 비율이 아주 좋다. 그래서 다리도 길어 보인다. 선의 폭이 좁아지며 내려오다 무릎 아래에서 살짝 부푼 곡선을 그리며 종아리를 만든다. 그러다 귀엽게 톡 튀어나온 복사뼈, 깨끗하고 둥근 발뒤꿈치에서 마무리되는 것이다.

견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리안은 전화를 받으러 가다 말고 조금 돌아서서, 오른 다리 무릎을 살짝 굽혀본다. 마치 다리를 뽐내기라도 하듯.

싱긋 웃는 그녀의 얼굴까지도, 견하는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의 다리, 그 근육이 그리는 예쁜 선을 감상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리안은 금세 다시 몸을 돌려 똑바로 전화기를 향했다.

“……나다.”

연인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는 어느새 지워지고, 태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한참을, 리안은 말없이 전화를 듣고만 있었다.

“알았다. 아니, 당장 각료를 소집할 필요는 없지. 제국정보사령부에서 일차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나. 그쪽에서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그래. 그럼, 수고하도록.”

간단하게 대답하고, 리안은 전화를 끊었다.

돌아서서 소파에 앉은 견하를 본다. 말없이.

견하의 눈썹이 살짝 비틀렸다. 리안의 얼굴만 봐도, 뭔가 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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