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8)
고태용은 손톱을 물어뜯거나, 숨을 들이켜며 턱을 만지거나, 담배를 태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워낙 입막음이 철저해서 마카오까지 추적해서도 이렇다 할 증거를 잡을 순 없었소.”
키타이의 요원은 그렇게 입을 뗐다. 고태용은 공감한다는 듯 끄덕이며 이렇게 말을 받았다.
“우리도 마카오에서 다리다나 마닐라를 경유해 고려로 돌아온 작자들을 추적할 순 있었지만, 다들 신수덕과 게레센제의 관계에 대해 추궁하면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
그 밖의 다른 경로로 도주한 잔당에 대해선 솔직히 추적할 역량이 부족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 대부분은 신수덕의 ‘아즈텍 망명’을 가리기 위한 미끼였으니까.
간신히 가짜들의 장막을 걷어내고 신수덕이 아즈텍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잔당들이 일으킨 동명역 쿠데타에 대응하느라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다.
고려의 이런 사정에 반해 키타이 측에선 신수덕이 아닌 ‘게레센제’에 초점을 맞췄던 모양이다.
“낭키아스면 몰라도 마카오에서까지 신수덕의 거래 흔적을 지워줬다면, 그건 그것대로 증거가 되는 것 아니겠소?”
“피가 묻어 있어야 할 자리에 피가 없다면 ‘누군가 지웠다’는 뜻이니까. 충분히 알겠소.”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바꿨소. 게레센제가 통과시켜 준 자들을 추격하기보다는, 게레센제의 그 거래를 도운 자들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말이오.”
응천이나 칸발리크 궁정에서 캐보는 건 한계가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그곳들은 게레센제의 눈길이 닿는 곳이니까.
“우리는 에스파냐에 요원을 파견했소.”
낭키아스에서 국경을 한 번 넘어, 에스파냐령 마카오를 거쳐 바다로 탈출하게 되면 허동주 잔당을 추격하는 건 무척 어려워진다.
그러나 잔당 추격이 아닌 ‘잔당 추격을 도왔던 정황’에 초점을 맞추면, 의외로 상대가 감추지 못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게레센제 카간도 거기까지 신경 쓰진 못했던 모양이군.”
“바로 그 말이오. 우리는 게레센제의 거래에 응했던 자들을 찾아내, ‘누군가의 은밀한 도주를 도왔다’는 증거를 입수했소.”
키타이의 요원은 턱짓으로 고태용에게 넘겨준 서류 가방을 가리켰다.
“그 안에 든 게 바로 그 자료고.”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강력한 증거다.
키타이 측 요원은 고태용의 눈치를 살핀다.
이런 문제를 대할 때 늘 그렇듯, 완급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
그냥 술술 불듯이 정보를 넘겨주면 상대는 이쪽의 의도를 의심하리라.
물론 이쪽의 의도가 순수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를 들켜선 안 된다.
그러면서도 이쪽의 의도대로 고려 측이 움직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눈앞의 이 장교 하나를 통해 들어간 정보가 어느 정도의 파문을 일으킬지 가늠하면서.
고태용도 턱짓으로 자신이 건네준 자료를 가리켰다.
보답은 해야겠지. 이런 절차를 거쳐 키타이도 고려도 정보를 ‘제공’한 게 아니라 ‘거래’한 셈이 된다.
“최근 다이온 신철도 건설 사업을 방해하는 무리가 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걸 추적한 결과물이오.”
“……게레센제의 신원연구회가 종종 훼방을 놓는다고는 들었는데.”
“무장 강도 떼 말이오. 그들의 전술 양상이나 입수한 무기에 대한 자료요.”
“한족 반란군 패잔병이 아니었던 건가……?”
반쯤은 혼잣말인 질문에 고태용은 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놓이고, 그 위로 눈빛만 오간다.
“……몸조심하시오.”
게레센제가 자신의 뒤를 캐려는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다이온 신철도 공사 현장을 기습하는 자들의 목적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주의를 돌리고, 게레센제에 대한 조사도 방해할 심산이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낀다.
만일 오늘 일이 잘못되어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자리에 게레센제의 부하들이 들이닥쳐 기관총을 한번 드르륵, 갈기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을 거다.
오늘은 무사히 넘겼지만, 내일은?
앞으로도 게레센제의 마수에서 자유로우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급하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 어떻게든 최대한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그러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니까.
고태용과 키타이의 요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났다.
***
“고려와 몽골, 물밑 대립이 격화한다…….”
울제이는 요원의 보고에, 그렇게 첫 감상을 내놓았다.
“우리에겐 좋은 일이다.”
보고를 마친 요원은 아무 말 없이 울제이 앞에 서 있다. 나라의 수장, 키타이 군부의 최상급자 앞에서 직접 보고한다는 긴장과 기쁨은 드러내지 않는다.
울제이 역시 그 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요원이 다음에 해줘야 할 일이고, 요원이 느낄 감정은 그 일에 얼마만큼의 효율성을 불어넣느냐는 측면에서만 중요하다.
“대립이 격화한다 해도 승패의 방향은 정해졌다.”
지금 몽골의 국력으로는 고려와 정면에서 맞붙으면 이길 수 없다.
시레문이 세상을 떠난 후엔 군사도, 경제도 고려에 의존하는 구조가 되었으니까.
한때는 시레문이 고려의 황위를 넘볼 정도로 강했다는 사실이, 이제는 꿈만 같다.
“다만 형님이 순순히 카간위를 내놓고, 루우 테무르가 그걸 부드럽게 넘겨받아선 안 될 일이지.”
요원의 얼굴에 희미하게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라고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듯하다.
“가급적이면 피를 봤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피.
유혈 사태.
물론 괴물이 날뛰던 그때처럼 칸발리크 전체가 말려드는 비극은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몽골은 확실히 몰락한다.
울제이가 최종 승자가 된다 해도 그런 몽골이 전리품이어서야 안 가지느니만 못하다.
“딱, 형님이 피를 흘리는 선에서 말이야.”
게레센제의 피.
불가피하게 더 흘려야 한다면 타이시 볼로드의 피, 그리고 게레센제의 아들이자 낭키아스의 칸인 바이다르의 피까지.
“내 손이 아니라, 루우 테무르를 비롯한 고려인의 손으로.”
아마 미리안은 게레센제를 겁박해 카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속셈일 것이다.
과정이 다소 거칠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는 방법을 택하고 싶겠지.
“우리는 그들의 등을 조금 밀어줄 뿐이야.”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가, 보르지긴 게레센제의 피를 흘리게 한다.
칸발리크에서 루우 테무르의 인기가 높은 것은, 그녀가 칸발리크를 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칸발리크를 구한 ‘보르지긴’이다.
보르지긴이 보르지긴을, 황족이 황족을 죽이는 추태.
그런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루우 테무르를 카간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루우 테무르가 구해줬음을 기억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기억은 가까운 것이 옛것을 쉽게 덮어버리는 법이야.”
요원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칸발리크 사태 당시 루우 테무르의 활약을 잊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는 만큼, 감사는 의심으로 변한다.
루우 테무르가 칸발리크 사태에 뛰어들 때, 그녀의 의도는 순수했던 걸까 하는 의심.
대다수 민중의 머릿속에서는 선한 의도와 권력욕이 함께할 수 없다.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기가 신민이 시민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한계 지점이다. 울제이에겐 유용한 한계지만.
“칸발리크의 여론이 자연스레 ‘루우 테무르는 선을 넘었다’, ‘같은 보르지긴의 피를 땅에 쏟은 자는 카간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움직일 게야.”
하지만 카간 자리를 빈 채로 남겨둘 순 없다.
누군가는 카간이 되어야 한다.
누구를 택할 것인가?
차선책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울제이는 카간이 된다.
“우리는 미리안의 계략도, 주견하의 음모도 가로막을 이유가 전혀 없어. 오히려 길을 잘 닦아줘야겠지. ‘지나치게’ 잘되도록 말이야.”
고려인들의 계획이 최고조로 발동되다 그만 그 최고조까지 넘어서 버리길.
울제이가 이번에 몇 가지 정보를 던져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물론 미리안, 주견하, 루우 테무르가 그런 일로 아예 몰락해버리진 않겠지. 그저 뼈아픈 실책으로 남을 뿐.”
그렇다. ‘뼈아픈’ 실책이다.
“다이온 체제에서 고려는 떨어져 나간다. 미리안은 수년을 공들인 정책이 실패한 여파로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 들겠지만, 뜻대로 될까? 누구 하나 극단적인 선택을 고르면, 이를테면 고려인들의 특기인 숙청이 또 한 번 벌어진다면 어떨까?”
울제이는 안전해진다.
울제이의 카간 자리는 안전해진다.
고려는 그가 몽골과 키타이, 낭키아스를 아우르는 통합 제국을 건설하는 걸 막지 못한다.
자기들 일에 급해서 이만 갈며 바라볼 뿐이다. 고려가 안정되고 나면 이미 울제이의 카간 자리도 공고해진 뒤일 것이다.
“고려인들은 내가 조급하게 움직여주길 바라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움직일 생각이 없다. 급한 쪽은 내가 아니라 고려인들이어야 해.”
분위기가 변한다. 요원은 이 느낌을 확실히 알고 있다.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팽팽해지는 공기.
“고려를 충동질할 공작을 개시하도록.”
***
효윤의 전투는 점차 최전선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지휘소에서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태주갑의 어깨너머에서 병력 지휘를 배웠지만, 점차 태주갑이 그녀를 앞세워 간단한 명령을 내려보게끔 하면서 익숙해져 갔다.
작전은 이단 전력이 하나 빠진 만큼 느리게 진행된다. 하지만 이 지휘를 통해 효윤은 전장에 선 자신이 아니라 보통 병사의 감각을 익혀가리라.
팀을 나눠, 목표로 삼은 창고 지대를 여러 방향에서 조여 들어간다.
팀들이 모두 서로의 사각을 보완하도록 하고, 은밀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핀다.
이동, 접근은 합격점이다. 뒤에서 지켜보는 태주갑은 그렇게 평한다.
하지만 교전에서 합격점을 받아야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할 것이다. 배운 대로, 경험한 대로 되지 않는 실전. ‘돌발 상황은 늘 벌어진다’라는 교훈만이 매번 반복된다.
전선에 직접 서 있을 땐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지만, 지휘소에서는 어떨까.
지휘소에서 관측할 수 있는 상황은 한정적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이번 작전은 시야를 방해하는 물체가 너무 많다. 창고 건물, 각종 차량과 장비들…….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피부로 공기를 느끼는 전장과 달리, 여기서는 한정된 정보를 종합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최전선에 있는 부하들의 주관이 한 번 걸러낸 정보를 말이다.
그렇기에 지휘관에겐 풍부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망상이나 희망이 아닌 상상력이.
이들은 지금 ‘강도 떼’의 물자 집적소로 추정되는 거점을 공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