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7)
차에서 내린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고태용은 어린 시절 잃어버린 형제가 아닌지 잠깐 생각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형제와 생이별한 안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의 부모님에게도 그런 가슴 아픈 비밀은 없다. 그는 외동아들이다.
자세히 보니, 그다지 닮은 것 같지도 않다.
-느낌이 닮은 거겠지. 살아온 삶이 닮으면 그러기도 하니까.
요컨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말이다.
고태용은 자신을 고평가하지도 않지만 저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위가 있는 첩보 기관 인물이 대부분 그렇듯 위험한 현장과 위험한 시대를 거쳐 위험한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진짜’ 위험한 인간들에 비한다면 그는 책상물림에 불과하다.
그럭저럭 겉모습은 위험해진 자신과 달리, 저쪽은 내용물마저 괴물일 수 있다.
고태용도 그런 괴물의 생리를 익히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흉내와 진짜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자신이 조심스레 상대방을 살피는 것도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고태용을 살핀다. 그 시선에 고태용의 목덜미 털이 곤두서지만, 그는 상대가 자신과 똑같이 불안해한다는 사실은 모른다.
“……접촉은 짧을수록 좋겠소.”
키타이 쪽 사람이 그렇게 말을 던져온다. 몽골어다.
고태용은 고려어로 대답했다.
“동감입니다.”
각자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말하는 건, 기 싸움이다.
일단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줘야, 자신이 가진 정보를 방어하며 상대의 정보를 캐낼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야 제대로 된 식사 자리에서 격식을 갖추고, 느긋하게 논의를 나눌 수 있었겠지. 그래야 오해도 줄이고 앞으로 제대로 손발도 맞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를 신용할 수도 없고, 어디서 누가 이 만남을 주목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충분한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라 대화는 급할 수밖에 없다.
효율을 극한까지 중시하는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더욱 그렇다.
“우리가 제공해드릴 건 신원경제자원연구회의 활동에 대한 자료요.”
그렇게 말하며 고태용은 자기 손에 든 가방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상대의 시선도 가방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고태용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그간 조사한 치청공방전 관련 자료를 가져왔소.”
신수덕의 마지막 보루, 치청에서 있었던 공방전.
그 전투의 관련 자료라면 신수덕의 ‘탈출’에 대해서도 뭔가 새로 발견된 사실이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고태용은 흥분하지 않는다. 게레센제가 그 문제에 혐의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고태용과 제국정보사령부에서 따로 조사해서 발굴해낸 것들도 있고.
그러니 함부로 흥분하지 않는다. 키타이 측에서 가져온 자료가 ‘새로운’ 자료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뭘 갖고 있다, 는 식의 이야기는 누구라도 할 수 있소.”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지.”
“번잡하더라도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하지 않겠소?”
상대의 고개가 한 번 무겁게 내려갔다 올라온다.
***
어떤 권력자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 공간은 그저 주변 사람들을 물리고 홀로 남은 집무실이기도 하고, 따로 마련한 공간이기도 하다.
울제이의 경우엔 후자다.
그런 공간에선,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어린아이 같은 흐느낌, 미친 사람 같은 유쾌함의 표출이든 뭐든.
지금 울제이는, 초조감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문을 노려본다. 하지만 울제이가 여기서 나가지 않는 이상 들어올 사람도 없다.
-이런 공간은 나 같은 사람한텐 꼭 필요한 곳이야.
정치도 결국 인간의 일이다. 기계 같은 인간이라 해도, 아니 설령 기계라 해도 ‘마모’되는데 인간이라면 오죽하랴.
어딘가에서 머릿속에 차오른 압력을 적당히 풀어주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에게 절대 보여서는 안 될 추태를 보이게 된다.
단 한 번의 추태로도 사람들의 마음은 떠나버린다.
정치는 결국 사람에 의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일단은 사람을 확보해야 한다. 충분한 수의 사람이 확보되어야 그 안에서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재도 뽑아낼 수 있는 법이다.
카간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이는 이때, 사람의 확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칸발리크에서, 혹은 응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장악하느냐가 다이온의 판세를 결정할 것이다.
-마음껏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거나 감추려고 술이나 여자에 의존하는 자도 있지만…….
그건 오래 갈 방법이 아니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이 꼭 필요하다.
발산하고, 가다듬고, 정리할 여유 말이다.
그래야 시시각각 닥쳐오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어쨌든 지금,
울제이는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린다.
그가 직접 선발해서 보낸 요원이, 고려 측과 접촉해 가져올 소식을.
울제이가 보낸 첩보원은, 일단은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간 것이다.
특정한 정보를 알려줘서, 이쪽이 원하는 반응을 고려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울제이가 구상하는 큰 그림은, 고려가 게레센제 퇴위를 향해 적절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게끔 하는 것.
어차피 진행될 퇴위라면 울제이 쪽에서 거들어주는 게 좋다. 그래야 좀 더 효과적으로 게레센제라는, 카간 자리를 향한 커다란 장애물을 치울 수 있다.
그리고 고려와 게레센제가 다투는 틈을 타, 울제이는 황정회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 황정회의 우두머리.
볼로드 타이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 정당을 장악한다.
-황정회가 나를 이용할 속셈이라는 건 이미 파악하고 있다.
울제이는 그들이 순수한 의도로 지지를 표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자신의 극진한 대접에 진심으로 감탄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머릿속 한구석에서 계산을 굴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가와 장사치는 그런 면에서 빼닮았다.
황정회가 울제이를 어떻게 이용할지 따져보고 있을 때, 울제이 역시 황정회 깊숙이,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두었다.
-갖은 애를 써서 얻은 전쟁장관과 내무장관 자리였다. 그걸 허무할 만큼 쉽게 내놓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받아내야겠지.
물론 이미 이자는 받고 있다.
울제이는 장관 시늉만 냈던 게 아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칸발리크에서 충실한 관료 역할을 하면서, 전쟁성과 내무성 사람들을 결코 무시 못 할 ‘울제이 파’로 만들어 둔 것이다.
그렇기에 울제이가 칸발리크에서 물러나 개봉으로 돌아왔다 해도, 그의 영향력이 칸발리크에서 증발하진 않았다.
아니, 지금도 칸발리크의 내무성과 전쟁성은 어느 정도는 울제이를 위해 움직인다.
마치 고려의 류성일과 같다.
류성일 역시 카라코룸으로 물러나 있어도,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동명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
그처럼 울제이의 지지층도 칸발리크에 남아, 그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해준다.
그런 사람들이 황정회에도 있다.
울제이는 그들을 통해 황정회를 칸발리크에 뻗은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활용할 속셈이다.
그들은 남쪽으로 낭키아스의 ‘울제이 지지파’와 연계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제이에게 무심한 척하며 황정회에서 암약한다.
울제이를 이용하자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쑤시면서도, 실은 황정회의 여론을 울제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통해 일차적으로 볼로드가 제거되고, 이후 고려가 게레센제를 제거하면, 황정회의 추대로 자신이 카간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울제이도 황정회도 만족할 수 있는 결말.
문제는 여기서 어떻게, ‘게레센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고려 세력’을 물리치고 카간이 되느냐 하는 일이다.
쿠릴타이를 장악한 황정회의 추대를 받았으니,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면 될까?
아니다.
-고려는 무력뿐만 아니라 여론전까지 총동원해서 그 쿠릴타이가 정당하지 않음을, 나에게 정통성이 없음을 주장하려 들겠지.
일단은 고려 황제 루우 테무르에 버금가는 ‘개혁군주’ 혹은 ‘계몽군주’라는 평판이 필요하다.
루우 테무르는 그런 면에서 참 운이 좋았다. 그녀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인식하지도 못했을 것들을 대신 수행해줄 신하이자 동료가 곁에 있었다.
미리안.
고도로 훈련된 정치 기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또 어떠한 방해물이라도 내던져버리며 추진할 의지도 있는 자.
루우 테무르는 미리안을 신하로 두었지만, 미리안은 루우 테무르의 스승이기도 했다. 미리안이 황제를 직접 가르치는지, 황제가 어깨너머로 배우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루우 테무르는 성장하고 있다는 것.
울제이는 냉철하게 자신을 평가한다. 개혁군주라는 면에서 자신은 조카에게 미치지 못한다. 미리안처럼 자신을 이끌어줄 천재적인 재상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개혁군주라는 평판을 얻으려면, 두 사람분의 노력을 홀로 해나가는 수밖에.
울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보수 귀족 세력인 황정회와 ‘개혁’이라는 말은 양립하기 어렵다. 귀족이 전멸하다시피 하고, 남은 귀족들도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반대하는 자들은 쓸어버린 고려와는 사정이 다르다.
당장 황정회 내부에서 볼로드에게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높아진 건, 볼로드가 미리안의 개혁 요구에 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레센제가 끝내 황정회를 우군으로 삼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혁은 국가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필요하기도 하지만, 권력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족 반란은 진압했지만 일시적일 뿐’이라는 인식은 울제이도 하고 있다.
결국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개혁의 압력에 모두가 무릎 꿇어야 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문제는 언제 무릎을 꿇느냐는 것.
당장 개혁을 선언하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밀어붙일 순 없다. 황정회와 손잡은 울제이에겐 그런 면에서 제약이 걸려 있다.
물론 카간이 된 후에도 보수 귀족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머저리 짓은 할 수 없으니, 그때는 황정회를 사냥 끝난 사냥개처럼 삶아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카간이 된 후의 일.
당장은 황정회와의 동맹을 굳건하게 유지하자.
그리고 그보다 더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자.
고려의 제국정보사령부, 고태용이라는 장교를 만나러 간 요원이 일을 잘 처리해주길 바라는 것.
돌아온 요원의 보고를 받고, 그 결과에 따라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것.
일이 잘만 풀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