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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87화 (387/541)

사냥(6)

“언제부터 신성한 카간의 자리가 천한 것들의 뜻에 따라 주어졌답니까? 칭기스 카간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해 온 우리 조상들, 그 고귀한 피를 이은 우리 가문들의 쿠릴타이야말로 카간을 선출하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을…….”

“그 쿠릴타이도 요즘은 더럽혀진 지 오래지요. 서양인들의 의회인지 뭔지와 다를 게 뭡니까.”

“긍지도 뭣도 잊어버린 것들……. 아랫것들이 총칼로 협박한다고 동렬에 세워주느니 차라리 총칼을 맞고 죽고 말지.”

“자, 자, 여기 계신 왕공귀족 여러분의 비분강개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일은 일단 벌어졌습니다. 그걸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면, 말도 안 되는 세상의 규칙이라도 당장은 인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내.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단어에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실제로 인내심이 깊든 그렇지 않든, 이들은 그런 품위 있는 사람이고 싶어 했다. 아랫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

방금 나온 말은 그런 그들의 허영을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는 울제이 칸에게 카간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약속했지, 반드시 카간이 되게끔 해주겠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칸은 전쟁장관과 내무장관 자리를 내놓고 키타이로 돌아가면서 우리 ‘황정회’ 사람들을 후임으로 추천했죠.”

덕분에 내각에서 황정회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해졌다.

무엇보다도 ‘볼로드에게서 독립적인’ 황정회만의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는 점은, 울제이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에 황정회는 다소 의견 차이는 있더라도, 울제이와의 협력 관계가 가치있다 여기고 이어가는 중이다.

“현 상황을 제대로 통찰해봅시다. 아직 입헌 개혁의 방향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울제이 칸이 다음 카간이 되든, 혹은 우리 황정회가 칸발리크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든, 실제로 헌법을 적용할 때는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 겁니다.”

참으로 옳은 말을 한다고 연신 끄덕이는 자도 있고, 고개를 돌려 웃음을 감추는 자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반대는 없다.

“게다가 일단 칸과 협력하기로 한 이상, 당장은 그를 우리의 적으로 간주해선 안 됩니다. 우리 눈앞에는 정말로 적대해야 할 자들이 따로 있으니까요.”

“‘제국입헌당’인지 뭔지 하는 그 강도들 말이지.”

“그들이 하는 주장도 이상하고, 그들을 비호하는 고려 태사도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 자들이 옹립할 루우 테무르 황제도 뭐……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바로 그들입니다. 일단은 쿠릴타이에서 ‘불순물’을 몰아내고, 쿠릴타이를 진정 고귀한 가문들의 의사결정 기구로 회복시키고 나서야, 우리는 미래를 향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죠.”

***

“울제이와 황정회의 연합전선, 이라…….”

시반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세력이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면, 이쪽도 그에 대항하기 위해 윤곽을 분명히 할 수밖에 없다.

윤곽이 분명해지면 조직의 구조나 방향성은 단단해지지만, 문제는 유연성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오찬이다.

시반의 눈앞에 앉은 류성일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접시 위의 음식에만 집중했다.

급한 건 시반과 몽골 제국입헌당이지, 류성일이 아니다.

시반과 데렘칭, 차파르 사이에 빠르게 시선이 오간다.

황정회와 울제이에 대항하려면, 이쪽도 동맹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고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게레센제 카간과 잘 지내보려는 그런…… 어중간한 태도는 이제 허락되지 않는다.

칸발리크에서 권력을 쥐고 싶다면, 혹은 지금 지닌 것이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황정회와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황정회는 자기네 외의 모든 정파를 칸발리크에서 몰아낼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몽골 제국입헌당은 이제 루우 테무르의 동군연합을 확고히 지지해야 하고,

게레센제의…… 폐위, 혹은 선위를 지지해야 하며,

이 모든 과정에서 고려의 제국입헌당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긴밀한 관계’라 돌려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고려 제국입헌당의 감독을 받는 것이다.

-지역당이니 대중정당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건, 류성일 본인이 감독 역할을 맡겠다는 뜻이겠지.

류성일은 유쾌한 기분으로 세 몽골인의 시선 교환을 지켜본다.

시반이 짐작한 대로 류성일은 급할 게 없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저들이 이 자리에서 물러나 심사숙고한다 해도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저들은 협력할 수밖에 없다.

몽골 제국입헌당이 본격적으로 루우 테무르의 동군연합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그 사업에 자신이 뛰어들면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다.

하나는 주견하를 비롯한 ‘동명’에 유용한 인간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안세규에게 ‘모호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점.

애초에 지역당 조직의 문제는 안세규의 요청이었다.

류성일이 본격적으로 몽골 제국입헌당 문제를 건들기 시작하면, 안세규는 이것이 자기 제안을 받아들인 건지 생각해 보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안세규의 생각과 달리 몽골에 확대되는 제국입헌당은 동군연합 사업을 목표로 움직일 테니.

류성일이 자신의 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닌가 계속 고민하리라.

주견하의 폭로로 곤란한 처지에 빠진 안세규가 희망의 향기를 맡게 하자.

아, 그러고 보면 세 번째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겠군.

카라코룸에 구성될 지역당은 특히 자신의 직계로 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친위 세력을 조직한다.

지금껏 정체가 불분명한 ‘원로에 대한 존경심’을, 구체적인 조직으로 만든다.

그러면 더는 이렇게 무력하게 수모를 당하는 일은 없겠지.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더, 자신이 가진 정보를 활용해볼까 한다.

-나는 주견하의 약점을 쥐고 있다.

아직 법무성 장관이던 시절의 일이다.

주견하는 칸발리크 사태 해결을 위해, 류성일에게 수감자들을 요구했었다.

그들은 분명 어떤 의식의 ‘희생양’으로 쓰였다.

그 의식이 얼마나 추악한 것이었는지도, 류성일은 대략 파악하고 있다.

그 사실이 대중에 알려진다면 어떨까?

주견하, 나아가 미리안에겐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건들면 역시 위험하겠지. 상대는 수틀리면 살인도 불사할 인간들이다.

미리안은 미승휴의 조카고, 백부를 닮도록 키워졌다. 주견하는 그런 미리안의 충실한 사냥개고.

-아니, 이 판에 올라와 있는 인간들이 다 마찬가진가.

여하튼 비밀의 활용도 ‘조직’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이다. 개인이 비밀을 가지고 날뛰면 개죽음당하기 딱 좋다.

시반과 류성일의 눈이 마주친다. 둘은 서로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낸다.

화기애애한 오찬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계산이 점차 복잡한 단계를 밟아나간다.

***

-안세규는 국적(國賊)과 손을 잡았다.

이건 범 알타이 인민동맹, 그리고 그들이 건설한 알타이 자유 공화국을 의미한다.

-안세규는 멋대로 외국에 큰 피해를 끼쳤다.

이것은 그 적들과 손잡는 바람에 몽골의 내전에서 피해가 커졌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칸발리크 사태에도 간접적인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안세규는 동료 장관을 암살하려 했다.

조유관 암살 시도를 의미하는 거겠지.

배영훈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주견하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 푸념할 수는 없다. 미리안과 달리 주견하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적절하게 자기 밑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주견하는 배영훈을 건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업무의 범위가 겹치고, 그래서 ‘경쟁자’가 된다면?

“……그는 배제 외에 다른 답은 찾지 않겠지.”

‘그림자’가 배영훈에게 암시했듯, 안세규와의 싸움이 격화하면 고려에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혼란도 감수할 생각인가, 아니면…….”

혼란이야말로, 주견하가 바라는 것인가.

적절한 혼란 상황을 만들어, 당황해서 머리를 드는 적을 단숨에 베어낸다. 주견하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다.

그렇다면 의도를 읽어야 한다. 불평은 소용이 없다. 주견하가 바라는 것이 배영훈이 바라는 안정과 거리가 멀다면 더더욱.

의도를 추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냥.”

안세규 사냥이 시작되었다.

사냥개는 사냥감을 쫓을 뿐.

책상 한쪽에 놓인 보고서는 이미 대학가에서 수위가 높아져 가는 갈등 양상을 담고 있다.

오래전부터 민주화와 진보를 이야기하며 대학가에 뿌리내린 민국 정부의 학생운동 세력. 대부분은 고려국민당의 지지층이다.

새롭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황제의 지지자이면서 곧 제국입헌당의 지지자인 학생운동 세력.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이…… 점점 잦아진다.

무력 충돌은 아직 없다.

그것이 안세규와 주견하 사이의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폭력 사태를 먼저 일으킨 쪽이 아주 곤란해지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인지. 그것까진 모른다.

그런 건 배영훈으로선 파악할 수 없는 성질의 일이다.

충돌은 두 집단이 주도하는 각종 토론회에서 일어난다.

어쨌든 대학의 토론회는 공개로 진행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한쪽이 다른 쪽의 토론회에 참석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정해진 토론자들끼리만 토론하게 한다고 치더라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돌발적인 질문을 싹 무시할 순 없다.

논리적 도발에 응하지 않으면, 논리적 기반이 빈약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비칠 수 있다. 양쪽 모두 그걸 두려워한다. 토론은 반드시 격해진다.

말로 오가는 싸움이지만, 대학가의 분위기는 이미 진흙탕이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골……. 그게 이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까.

혹은 그 악영향을 통해 주견하는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어두운 예감 속에서 배영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그리고 여기, 또 필사적인 사람이 있다.

고려 안에서 ‘안세규 사냥’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밖에서 ‘게레센제 사냥’을 개시하려는 자가 있다.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과감한…… 아니 무모한 짓을 실행에 옮겼다.

키타이 측 관계자와 직접 접촉하기로 한 것이다.

-목숨 걸고 나서는 건 오랜만이군.

보통은 부하들을 통해 먼저 충분한 예비 회동을 한다. 외교 분야와 마찬가지다.

이 바닥은 더 민감한 일들을 다루기에, 서로 충분히 ‘안전’하다는 게 검증되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고태용쯤 되는 사람이 함부로 움직이면, 저쪽에선 정보만 캐가면서 고려의 중요한 인재 하나를 없애버릴 기회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내일쯤 어딘가에서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품에 넣은 권총과 자결약 등을 확인하면서, 초조한 기분으로 상대를 기다린다.

이윽고 상대가 약속 장소로 들어온다.

공터, 흙바닥을 자동차 타이어가 짓이기는 소리.

자, 그럼 저 차에서 나올 건 예의 바른 인사일까, 아니면 총구일까.

단숨에 죽여준다면 그것도 예의는 바르겠군.

어딘가로 끌려가서 실컷 고문당하는 것보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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