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5)
투글룩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리안이 정말 우려하는 바는 따로 있다.
고려 영토 내에서 활동하도록 내버려 둔 신원경제자원연구회.
투글룩이 말한 대로 게레센제가 혁세주를 소환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 신원연구회라는 집단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형, 자원, 경제적 효과를 탐사하는 단체라고 내세우긴 했지만, 글쎄……. 실상은 파멸인을 뱉어내는 고대 유적지를 찾고 이단 관련 연구를 진척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게레센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칸발리크를 인질로 삼는 게 아니라 ‘동명’을, 혹은 고려 어딘가를 인질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고려 내에서 활동하는 신원연구회에는 엄중한 감시를 붙여두고 있지만, 모든 감시가 그렇듯 완전하지 않다.
인간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고, 그 시야를 벗어나 엉뚱한 짓을 벌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역시 시간이 문제인가.”
게레센제가 뭔가 손을 쓰기 전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다이온의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고 선위를 강요해야 한다.
“이렇게 재촉해본 적은 없는데. 빨리…… 빨리들 좀 했으면 좋겠군.”
대원철도주식회사는 진행 중인 철도 사업의 첫 단계를 마무리하고.
고태용과 효윤은 게레센제의 목을 조일 올가미를 빨리 완성했으면 하고.
낭키아스 내 고려파도 정국을 움직일 준비를 빨리 마쳤으면 한다.
“초조해해봤자 저절로 되는 일은 없지만.”
당장 자신부터 올해 말의 ‘제2차 동아시아 협력회의’를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역외사국의 개혁 진행도 검토하고, 그 중 대예, 보우슈엥, 탕구트의 다이온 정식 가입 문제도 다뤄야 한다.
바라트와 버마 문제, 아즈텍 내전과 일본 문제도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한숨을 내쉰다. 기지개를 켠다. 몸의 긴장을, 초조감을 줄여보려 한다.
다시금 인내심을 마음 한구석에서 꺼내온다.
어렵지만 해왔던 일이다.
그리고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고.
“……하지만 아무래도 익숙해지질 않는군.”
***
-안세규는 국적(國賊)과 손을 잡았다.
-안세규는 멋대로 외국에 큰 피해를 끼쳤다.
-안세규는 동료 장관을 암살하려 했다.
동명의 대학가를 도는 이 소문에, 멀리 카라코룸의 류성일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주견하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굳이 소문의 출처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시점에 그런 소문을 흘릴 자는 주견하 밖에 없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면 나도 움직이지 않을 순 없지.”
이 상황은 하나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류성일이 안세규와 협력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뒤이어 안세규의 죄상도 이렇게 드러났다?
류성일 역시 안세규의 죄에 협력했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견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혐의를 벗고 제 보호를 받고 싶으시면 누구 편인지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장관님.
그러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이대로 화들짝 놀라 주견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할까?
목숨을 지키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모든 야망은 물거품이 된다. 한번 꼬리를 말아버린 개가 되면 다시는 고개를 들고 짖을 수 없다.
제국최고회의 의장이든, 제국입헌당 당수든, 차기 태사든…… 다시는 꿈도 꿀 수 없겠지.
그럴 순 없다!
지금부턴 섬세하게 거미줄을 당겨야 한다.
주견하는 누구든 거미줄을 칠 수 있다고, 그 정도는 이해해주겠지만, 거미줄이 건방지게 자기 머리 위를 스치면 단숨에 불태워버릴 것이다.
그리고 거미를 찾아내서 짓이겨버리겠지.
그러니 ‘유용하게’ 보이면서,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저항한다’는 느낌은 주지 말아야 한다.
류성일은 세 사람을 카라코룸의 행정장관 관저로 초대했다.
몽골 제국입헌당의 대표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시반.
전에는 ‘깡패 동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데렘칭.
역시 전에는 ‘무당 동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차파르.
이 세 사람은 류성일의 부름에 당황하면서도,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몽골 제국입헌당이 고려 제국입헌당 덕분에 탄압받지 않고 정계에 진출한 이상, 어쨌든 그 눈치를 봐야 하니까.
고려 제국입헌당의 원로인 류성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당장 그가 ‘유배’된 상태라고 얕잡아봤다간, 고려 정계의 상황이 달라졌을 때 큰 곤란에 빠질 수 있다.
연줄은 여럿 잡아놓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도 하필이면 이 ‘세 사람’을 불렀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몽골 제국입헌당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범좌익’ 세력.
한때는 몽골 내에서의 활동이 불법이었던 자들이다. 실제로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고.
그렇기에 당시에 행동하던 ‘혁명가’ 그룹인 데렘칭과 차파르는 이름까지 바꾸고 전면에 나서는 걸 꺼리고 있지 않은가.
대신 시반을 당의 대표로 내세워, 다른 정당 및 정부 요인들과 교섭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세 사람을 지목했다는 건…….
“류성일은 우리 사정 정도는 꿰뚫어 보고 있다는 의미겠지.”
“그 노회함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닐 테니.”
“류성일이 대학 총장일 때, 고려 내 좌익 학생들을 비호했다니 제자들을 통해 우리를 파악하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고려의 동지들이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류성일의 독자적인 정보력과 통찰로 파악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어쨌든 그들은 긴장을 목덜미 아래로 감춘 채, 당당하게 행정장관 관저로 걸어 들어간다.
정중한 안내를 받아 들어간 응접실 안에서, 류성일은 일어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식적이지만 예의 바른 인사가 오가고, 오찬 전 간단히 차를 마시기로 한다.
“이제는 몽골 정치에 좋은 세월이 왔다고 봐도 되겠지요?”
갑작스럽게 류성일이 그런 말을 꺼낸다. 몽골 제국입헌당에서 온 세 사람은 동요하지 않고 차를 마저 마시거나,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류성일을 바라본다.
의도가 있는 말이다.
본론을 꺼내려는 신호기도 하고.
“선대 카간 시절엔 양지에서 활동하시기 어려웠겠죠.”
“시레문 카간을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장관께서 말씀하신 바는 사실입니다.”
시반이 먼저 나서서 류성일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넘기려 한다. 그는 그런 재능이 있기에 ‘간판’으로 선택될 수 있었다.
“우리 고려도 그랬습니다. 선대 태사 시절까진 지금 같은 다당제 민주주의는 꿈도 꿀 수 없었죠.”
루우 테무르가 고려의 황제가 된 이후.
미리안이 태사로서 온전한 권력을 쥐게 된 이후.
그 후에야 미리안은 다양한 정파와 화해, 협력하고 새로운 시대로의 길을 열지 않았나.
“몽골의 민주주의도 우리 폐하께서 도움을 주신…… 칸발리크 사태 이후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고려 황제 폐하의 은혜에는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우리 태사 각하께서 카라코룸을 일찍 해방하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겠습니까.”
“귀국의 태사께서 신묘한 전략으로 모두를 구했음은 이견이 없는 일이지요.”
시반의 말은 류성일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깊이 들어가지 않고 겉도는 중이다.
류성일의 의도가 분명해지기 전까진 신중하겠다는 의미다.
데렘칭과 차파르는 침묵을 지킨다. 마치 류성일과 시반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지만, 그보다는 시반과 같은 의도를 드러내는 중이다.
세 사람의 의도를 읽었기에, 류성일은 다시 한번 미소로 주름살을 만든다.
“대중정당으로서 몽골 제국입헌당은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요?”
“말씀하셨던 대로 시레문 카간 시절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긴 합니다만…….”
“점진적인 것도 좋지만 저는 조금 서둘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대화는 계속 표면과 이면의 이중주로 이루어진다. 류성일이 방금 뱉은 말 역시 그렇다. 얼핏 들으면 류성일이 몽골 제국입헌당의 방침에 간섭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반은 그 말 너머에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음을 읽어낸다.
“‘준비’가 필요한 때가 오고 있는 겁니까?”
“쿠릴타이도 슬슬, 다이온 전체의 의회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래에 다이온 연방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모두가 대략 동의할 수 있는 몇 가지 단계는 있다.
일단 이 연방의 초석이 된 관세동맹.
‘다이온’이라는 이름만 선포된 느슨한 연맹 단계.
그리고 본격적인 다이온 통합을 향한 첫 단계로, 몽골과 고려의 동군연합 단계.
몽골 범좌익에 우호적인 새로운 카간이 서는 것만으로도, 몽골 정치는 다시 한번 혁신을 맞이하리라 기대 중이다.
물론 고려인들은 두 나라의 정부와 의회를 완전히 통합하길 바라고, 몽골인들은 독립된 정부와 의회를 유지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이견이 있지만.
그런 논의도 일단은 동군연합이 이루어져야 시작할 수 있을 터.
“칸발리크의 비극 이후, 수도의 시민들에겐 확실히 우리 폐하에 대한 지지가 널리 퍼져 있지요. 하지만 정말로 대업을 일으키려면 그 지지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시반은 슬쩍 차파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좀 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겠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차파르는 입술을 비죽이는 것으로 답한다. 그렇게 하시오.
시반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역당 조직의 확장에 일손과 자금이 부족함을 통감한다는 겁니다.”
류성일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둘째는, 지역당 조직의 확대를 체계적으로 펼쳐나가려면 중앙당이 확실히 칸발리크에서 터를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볼로드가 이끄는 황정회의 방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황정회. 그 이름이 나오자 류성일은 두어 번 되뇌어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황정회에 관해 재미있는 소식을 입수했소만.”
***
황정회.
다양한 집단이 결합해 탄생한 정치조직인만큼 그 성격을 딱 잘라서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주도 세력만 놓고 보면 쿠릴타이를 주름잡던 보수적 귀족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당연히, 개혁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레문 카간의 죽음, 뒤이은 내전으로 어쩔 수 없이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왜 울제이와 접촉했을까.
고려의 미리안이 처음 다이온 구성국들을 향해 입헌 개혁을 요구했을 때, 울제이는 가장 먼저 나서서 그 요구를 수용했다.
즉 미리안이 개혁의 물꼬를 텄다면, 울제이는 그 물이 다이온 전역에 고루 돌도록 물길을 다진 셈이다.
황정회 주류파의 입장에선 밉살맞다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전쟁장관, 내무장관 자리를 내놓고 물러났지요.”
칸발리크의 귀족 저택 밀집 지역. 늘 그렇듯 여기 어딘가에서 베풀어진 ‘조촐한’ 연회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조촐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귀족들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로, 일반인들이 보기엔 호화롭기 짝이 없다.
일상처럼 열리는 연회에선, 일상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정치 이야기도 오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 이야기도 이 귀족들에겐 일상의 일부라고 봐야 하리라.
지배층이면 당연히 정치를 주제로 담소를 나눌 소양이 있어야 한다.
정치 이야기로 드잡이질이나 하는 천것들은 이런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 천것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저질스러운 농담이다.
이것이 여기 칸발리크 귀족들의 기본적인 태도다.
누군가 그런 태도로, 앞서 나온 울제이에 대한 평에 자기 말을 덧붙인다.
“아랫것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걸 개혁이니 진보니 부르는 요즘 세태에, 저는 도저히 동의하지 못하겠더군요. 울제이 칸이 뭐라 하든 그 생각도 이해하지 못하겠고요.”
“그야, 울제이 칸은 다음 카간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게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