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2)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는 표정으로, 재연은 물었다.
“황제 폐하께선 분명 특정 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진 못하시겠지. 하지만 넌지시 어디를 지지한다, 그런 뜻을 드러내실 순 있어. 그러면 우리가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도 큰 문제는 없을 텐데?”
총선거의 승리를 위해 지나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아닌가. 재연은 그것을 묻고 있었다.
“안세규도 당하고만 있진 않아. 그걸 이번 내무장관직 사퇴로 보여줬지. 몰아붙이면 어떤 식으로든 더 강하게 반격할 거야.”
상대가 태사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견하라면 더욱 거센 반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견하의 이 행보를 태사가 알고 있을까? 모른다면 태사의 비호를 받긴 어려울 수도 있다.
“선거에서 이긴다고 끝이 아니야.”
총선거 다음의 일. 그것이 견하가 바라보는 지점이었다.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면 안세규라는 장애물은 치워버려야 한다.
그가 위협이라 해도 감당해야 한다.
“제국입헌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당연히 각하께서 태사 자리를 계속 지켜가시겠지. 하지만 선언하신 대로 제국최고회의 의장은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실 거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국최고회의 의장이 된다 해도, 그 사람은 태사 각하의 입김이 닿는 사람이겠지. 큰 변화는 아니야.”
“그럴까? 각하께서 국가와 당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장악하고 계신다지만, 과연 제국입헌당이 각하의 뜻대로 움직여줄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
원로들.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들.
그들은 살아온 세월만큼 깊은 음모를 꾸밀 수 있다.
지금도 태사 미리안을 향해, 소심한 반항 정도는 해볼 생각들일 것이다.
“그런 그들을 위한 딱 좋은 인재가 있지.”
류성일.
안세규가 류성일과 손잡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이상, 당의 원로들 역시 안세규와의 제휴를 염두에 둘 것이다.
그렇게 안세규와 원로들이 지원하는 류성일이 기습적으로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차지한다면?
류성일은 남은 세계대전의 영웅 중에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영향력이 컸던 자들은 대부분 죽었다.
미리안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건 기대도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때부턴 류성일과 견제를 주고받느라 리안의 권력은 약해진다.
“우리는 이제 게레센제의 폐위를 생각해야 해.”
견하의 그 말에 모두가 숨을 삼킨다.
드디어 때는 오고야 말았구나.
우리의 황제가 몽골의 카간이 되는 날이.
오랜 정통성을 자랑하는 두 황실이 완전히 결합할 날이.
한재연의 경우 거기에 한 가지 생각을 더 덧붙인다.
고려 민족이 진정한 동아시아의 주인이 될 날이, 라고.
약간씩은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시대가 다시 한번 격동하리라는 예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것은 불안일 수도 있고,
흥미일 수도 있고,
고조일 수도 있고,
전의일 수도 있다.
어떤 감정이든 견하의 이야기를 흘려듣는 자는 없다.
“게레센제의 폐위는 고려의 총력을 다해야 한다.”
무거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견하의 그 말은 절대적이었다.
감찰국 간부들은 모두 고려와 몽골의 동군연합이라는, 역사적 사업 쪽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이건 자칫 제대로 탄생하지도 못한 다이온 연방이 내전에 말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야.”
견하의 말에 지나가 끄덕였다.
“게레센제도 순순히 카간 자리를 내놓으려 들진 않을 테니까요.”
“물론 우리 고려의 역량이라면 군사력으로 몽골을 찍어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간 관세동맹부터 쌓아 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돼.”
동군연합의 성립, 다이온 연방의 궁극적 완성은 구성국 각국의 힘을 온전히 합치는 데에 있다.
그러니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구성국들이 피투성이 누더기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섬세한 작업을 할 때 온 힘을 다해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듯이.
만약 고려가 다이온을 무력으로 통합하려 든다면, 통합 과정에서 소모되는 국력이 이후 얻을 국력을 넘어서고 말 것이다.
즉, 합치지 않느니만 못한 상태가 된다.
“류성일과 안세규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펼칠 다이온 통합 정책에 계속 방해가 될 거야.”
“그렇습니다. 류성일은 우리 통제 아래 둔다고 치더라도…….”
대학가에서 학생조직들을 상대하면서 이익서는 안세규와 고려국민당의 위협이 얼마나 거대한지 피부로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견하의 의견에 동의했다.
“류성일을 카라코룸에 박아두고, 최고회의 의장에 ‘꼭두각시’를 올려둔다 해도 계속 세심한 정책을 펼쳐야 해. 꼭두각시에게 야심이 생기는 일도 없진 않으니까.”
선거 이후로 체제는 변화한다.
리안이, 루우가, 견하가 의도한 체제지만 그들 모두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야 한다.
“온 힘을 집중한다 해도, 지금처럼 태사 각하의 뜻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긴 어려울 거야.”
절차는 복잡해지고, 견제는 늘어난다.
고려국민당은 연합정권을 끝내고 확실히 야당으로 돌아섰다.
제국입헌당만의 힘으로, 그 안에서도 미리안과 그 지지 세력만의 힘으로, 앞으로 펼쳐질 난관을 모두 돌파해야 한다.
견하의 날카로운 눈빛이 모두를 훑는다.
각오는 되었냐는 물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또 한 번 자신들의 인생길을 바꿀 결정임을 직감하면서.
***
투글룩은 고려로 망명하긴 했지만, 여전히 고려의 군인이라기보다는 보르지긴 황실의 가신이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비단 투글룩만의 것은 아니었다.
국가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많은 군인이, 멀고 추상적인 국가보다는 가깝고 구체적인 개인적 관계에 더 충성한다.
혁명을 거쳐 공화국으로 거듭난 나라들에서도 그러할진대, 군주 개인과의 관계가 중시되는 나라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몽골 역시 마찬가지다.
몽골은 중세 제국에서 근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개혁을 거쳐왔지만, 얼마나 많은 개혁을 했든 보르지긴 황실 자체는 변하지 않고 남았다.
황실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황실과 함께하는 다른 요소 역시 변하지 않고 전해 내려온다는 뜻이다.
카간과 전사들의 유대는 그대로 황실과 장군들의 개인적 유대로, 근대 국가 몽골에 남았다.
여기에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었다.
바로 ‘몽골의 군사 전통’이라는 이름이.
그런 이름으로 근대 이후 몽골군의 특성을 설명하곤 하는 것이다.
전통은 때론 유용하다. 카간의 정통성에 별다른 논란이 없고 충분한 지도력만 보여준다면, 장군들도 절대적인 충성으로 보답한다.
그러나 카간위의 정통성에 논란이 있다면?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상’이 당연한 나라 사람들에겐 의아한 사고방식이겠지만, 몽골군 상당수는 국가가 아니라 황실에 충성한다.
따라서 시레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거기에 내전까지 겹치면서 군인들은 자연스레 ‘어떤 카간을 따를 것인가’를 고민했다.
‘황실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들 대부분이 ‘알타이 자유 공화국’에 가담했기에, 남은 몽골군의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투글룩은 게레센제와 울제이, 루우 테무르의 경쟁 구도 속에서 루우 테무르를 택했다.
그 자신이 시레문과의 개인적인 유대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볼로드 역시 내심 루우 테무르를 지지하곤 있지만, 그 동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몽골 국가를 위해 좋은 카간을 택하고 섬기려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문민정부의 우두머리라 할만하다.
반면 투글룩은 자신이 적합하다고 여긴 보르지긴 황실의 후예가 고려의 황제이든 몽골의 카간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언젠가는 루우 테무르가 카간위를 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랬기에 투글룩은 리안의 호출에 적잖이 당황했다.
망명을 받아준 고려의 대신(大臣). 그러나 미리안은 자신을 고려군의 한 사람으로 편입시키는 게 아니라 황제 루우의 가신으로 둘 생각이라고…… 짐작했었다.
그게 암묵적인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태사가 불렀다면 대체 무슨 이유일까. 투글룩은 그 이유를 추측해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을 직감했다.
미리안이라는 그 여자는 자신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부분을 남겨놓으려 하지 않는다.
소문으로는 황제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하지만, 권력의 문제에서는 아마 다를 것이다.
투글룩은 본인이 이단인 장성이기도 하지만, 이단 기술 쪽에서 특히 더 중요한 인물이다.
요즘 같은 시대, 특히 칸발리크 사태 이후로 자신 같은 사람은 더욱 중요해졌다. 투글룩은 그렇게 자부한다. 그러니 미리안이 언제까지고 태사의 정부에서 분리된, 황제만의 가신으로 남겨두려 하진 않을 것이다.
집무실로 들어선다.
안에는 작은 체구의, 귀여운 얼굴의 여자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은 소장이고 상대는 대원수.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위압감은 대부분 그 외양에서 나오지만, 태사 미리안에겐 외양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대원수라는 계급, 혈통을 비롯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후광을 십분 활용한 탓일까?
아니. 그 너머에는 미리안 개인이 지닌 뭔가가 있다. 천성일까. 통제하고 지배하는 데 있어 타고난 뭔가가 있는 걸까.
그녀의 가문은 고려의 황족도 아니고 황금가문 보르지긴과도 관련이 없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봤자 제2 제국 후반에나 간신히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신진 귀족이 시조로 등장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단인 것도 아니다. 미리안의 체격과 헤쳐나온 전장을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까지 수련한 사람인 건 맞다. 하지만 투글룩 같은 이단의 관점에선 나약한 일반인에 불과하다.
혈통의 힘을 믿는 투글룩에게, 미리안은 참으로 의아함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입을 연다.
“칸발리크 사태에 대한 장군의 분석을 듣고 싶군요.”
예상치 못한 물음이었기에 투글룩은 멈칫한다. 여기까지 불러서 최근의 일도 아니고 한참 전의 일을 묻는다?
왜 묻는 걸까?
“칸발리크에서 일어났던 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람의 짓이라면, 동명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나요?”
그런 우려 때문인가.
위정자로서는 당연한 우려다. 허나 그 사유가 당연하다 해서 그냥 끄덕이고만 넘어갈 순 없다.
동명 역시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칸발리크 사태 직후 이미 각국의 정계에 대두되었을 것이다.
인접국, 그것도 수도의 위치로 보면 칸발리크에서 가장 가까운 동명의 정부는 더욱 심각한 우려를 품었겠지.
인제 와서 새삼 그게 우려일 리는 없다.
표면으로 드러낸 우려 너머에 뭔가 있다. 그걸 잘 계산하면서 답해야 한다.
투글룩은 이방인이다. 특별히 신변의 위협은 없겠지만, 권력자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은 없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만, 저는 고려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