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1)
“게레센제를 폐할 증거 수집은 제국정보사령부나 서부군사령부에 맡길 수밖에 없겠지.”
견하의 그 말은 다시 말해, 고태용과 최효윤에게 일임하겠다는 말이다.
감찰국의 역량도 그렇거니와, 정치적으로도 당장은 국외 문제에 직접 나서지 않는 게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보다 우리는 한동안 국내 문제에 집중해야 해.”
유지나, 한재연과 양수영, 이익서.
견하는 이 측근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각자 자신만의 생각을 담은 얼굴로 견하를 바라본다.
지나는 끝까지 따르겠다며 의욕 넘치는 얼굴이고, 재연과 수영은 각오를 다지는 얼굴이다. 익서는 그러면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은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듯하다.
각자 생각은 다를지라도, 지난 3년간 손발 잘 맞춰서 일해온 동지들이다.
앞으로의 일도 잘 맡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국장님, 준비됐습니다.”
지나가 대학에 입학하고, 맡은 일의 범위가 커지면서 새로 고용한 비서다. 견하는 끄덕인 뒤 측근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가볼까.”
그들이 향한 곳은 한때는 강당이었던 곳.
그곳을 고쳐서 자그마한 의사당처럼 만든 회의장이었다.
수영은 거기까지 견하를 따라 걸어가면서, 처형당하러 가는 줄만 알았던 걸 떠올린다.
-그때, 천손민족협회 출신 포로들이 강제로 주견하의 부하가 되었었지.
이제는 감찰국의 간부, 국장의 측근 중 한 사람으로 직원들 앞에 선다.
지금 이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계단식으로 배치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신을 감히 범접하기 힘든 조직의 주축쯤으로 여기겠지.
3년.
자신이 살아간 이 시대는 분명 격동기로 기억될 것이다. 3년 사이에 이렇게 사람의 삶을 흔들고 비틀어 놓을 수 있는 시대 말이다.
객석의 사람들과 마주 보며, 견하와 측근들은 나란히 앉았다. 견하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나머지가 앉는 배치였다.
발언권은 당연히, 주견하에게 있었다.
“정치경찰실의 정예, 자랑스러운 청년당원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번에 모인 사람들은 전국 대학에서 감찰국의 영향 아래 놓인 학생조직의 간부들이다. 대학에 따라 다르지만, 총학생회에서 활동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사람도 있다.
제1대학교의 경우 고려국민당이 내린 뿌리가 워낙 깊어 총학생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동아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동아리의 회원 중 하나인 원동인이 말석에 앉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역시.
견하는 자신과 격이 다르다고, 동인은 생각한다.
학교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하얀 제복을 입었는데도,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다. 완전히 잘 어울린다.
당연하다는 듯 거침없이 걷고, 거침없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 당연히 자기 말을 경청하리라는 태도로 말한다.
저 어조는 또 어떤가.
견하의 인사말을 듣고 저 사람이 정말 이 자리를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식적인 어조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음 말을 이어나가는 주견하에겐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틀림없이 모두가, 거기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한다.
“……내년, 즉 1933년 6월에는 또 한 번의 총선거가 열립니다. 1929년 당시 내전 중이었던 우리나라는 정부군이 확보한 지역 내에서만 총선거를 치렀기에 불완전한 선거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견하는 그 문장을 힘주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전국에서 총선거를 치릅니다. 정당별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를 배분했던 때와 달리, 이제는 선거구를 제대로 짜고 선거를 치를 수 있는 겁니다. 정부에서는 인구 15만 명당 한 명의 의원의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600명의 의원이 9천만을 대표하게 된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태사 각하께선 제국입헌당의 당수직과 제국최고회의 의장직을 모두 내려놓겠다고 하셨습니다. 민주주의 개혁의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딘 셈입니다.”
동인은 견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아닐 것이다. 아마 별 뜻 없이 자신 쪽으로 시선을 줬겠지.
하지만 말없이 무언가 큰 뜻을 전달받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국가적으로 새로운 경지로 도약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국가 바깥에서는 격변하는 위협에 대처하는 한편으로, 우리의 개혁 성과를 다이온 연방 전역에 전파하고, 우리의 황제 폐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권에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라고 견하는 단정했다.
“민주적 개혁은 분명 더 많은 자유와 혜택을 국민이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국민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개혁은 정치인들만의 힘으로, 정당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사람이라도 할 법한 말이었다.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는 말은 이런 자리에선 상투적으로 나오는 말이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견하의 말은 달랐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말씀하시길.”
황제의 권위를 빌어 이야기한다는 뻔한 수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라는 그 말 한마디는 모두가 견하에게 주목하게끔 했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빼어난 미모, 신비로운 머리칼과 눈동자를 자랑하는 여학생. 강력한 힘을 지닌 이단이자 내전에서도 직접 활약한 영웅.
그토록 고귀한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말은 궁금증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짐의 즉위는 짐의 혈통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짐은 신민의 지지로 등극했다. 그러므로 주권은 짐이 아니라 만민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통감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황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견하에게 그걸 따지고 들진 못할 것이다.
“개혁은 마땅히 다양한 생각들을 품에 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개혁은 그 실행에 있어서는, 충분히 통일된 의지와 멈추지 않을 힘이 필요합니다. 제국입헌당이 2대 최고회의에서도 집권 여당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견하가 할 말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견하는 그냥 만나서 이야기나 나누고 사기나 진작하자고 이들을 여기 부른 게 아니었다.
견하는 이들에게 맡길 일이 있었다.
“실행 단계에서까지 이런저런 잡음이 섞여들면, 개혁은 국가가 아니라 그 의견을 낸 사람들의 사사로운 이익에 봉사하느라 결국 목표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개혁의 힘이 그런 식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감찰국장은 총선거에서의 승리를 주문하고 있었다.
“총선거까지 1년, 길지 않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넋 놓고 있을 순 없습니다. 고려국민당의 당수 안세규는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나 차기 집권 여당과 태사 임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한 뒤, 견하는 침묵에 잠겼다.
다소 불편하게 느낄 침묵이 지나간 뒤에 견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어떤 이는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개혁의 방향은 제국입헌당이나 고려국민당이 별반 다르지 않지 않냐고.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개혁은 고려에서만 머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전체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국민당의 방향은 다르다.
“고려국민당은 고려 내부의 개혁에만 머무르려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나쁜가,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에만 집중하자는 주장이 순수하지 않다면, 오로지 당수 안세규의 집권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주 잠깐, 견하는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고려국민당과 제국입헌당 사이,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될까. 자신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총선거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
“안세규 씨는 자신의 집권을 위해 외국에 큰 피해를 끼치고, 국적들과 손잡은 혐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동료 장관을 암살하려 했던 혐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과연 국가와 세계 평화를 위한 일인지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술렁임이 퍼져 나가려 한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견하는 술렁임이 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제 다들 무엇이 나라를 위한 일인지 고민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모인 이 자리는 그러기 위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여러분이 돌아갈 일터와 학교, 가정에서도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
‘대회’가 끝나고 견하는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를 따라온 측근들의 얼굴을 돌아보자,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장 침착한 이익서까지.
“제정신이에요 선배!?”
평소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폭언으로 지나는 견하를 비판했다.
견하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웃지만 말고 말을 해봐요. 사람들이 잔뜩 흥분해서 질문 쏟아내는 걸 선배도 보셨잖아요?”
견하는 ‘적절한 사법 절차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이 이상의 말은 아끼고 싶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어떤 이는 그저 제국입헌당의 선거를 도우려는 견하의 악선전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사람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려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생각도 그래. 언론사를 부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어. 물론 누군가는 냄새를 맡겠지만, 퍼져나가는 속도가 다르겠지.”
재연도 그렇게 우려를 표한다.
견하는 고개를 내젓고는 대답했다.
“딱 좋은 속도로 퍼져나갈 거야.”
“선배?!”
“선거도 얼마 안 남았지만, 제2차 동아시아 협력회의는 더 촉박해.”
올해, 1932년 말로 예정되어 있다. 거기서 각국은 한 해 동안의 개혁 성과를 보고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고려국민당과 안세규는 폐하의 동군연합, 다이온 연방의 수립에 반대한다.”
“하지만 협력하기로 약속했잖아?”
“그 약속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몰라. 당장 2차 협력회의 때부터 방해를 일삼을지도 모르고.”
그쪽이 주견하의 약속을 얼마나 믿을지도 모르는 데다, 견하는 안세규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조유관에게 썼던 수법,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대한 몽골 내전 지원.
그따위 수작이 감찰국과 견하를 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순 없기 때문이다.
“기세를 한 풀 꺾어놓아야 해. 비난과 의혹을 상대하느라 국외 문제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도록. 그리고 더 나아가…….”
견하는 씩 웃었다.
그것은 지나가 좋아하면서도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는 미소였다. 그 이중적인 감정에 지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가 어떤 기분을 느끼든, 견하는 할 말을 했다.
“……장기적으로는 고려국민당이 확실히 선거에서 패배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