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80화 (380/541)

각축(13)

“이제 와서 무관하다고 말하긴 어렵겠지.”

“네. 토칸은 첫 대면부터 저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동명시에서 우리가 파멸인을 격퇴하는 걸 보고, 더욱 철저히 대비해서 칸발리크 사태를 일으켰겠죠.”

“칸발리크 테러를 일으켰던 세력이 고려까지 들락거릴 수 있다?”

루우의 물음이었다. 견하는 끄덕이다가, 루우 쪽으로 몸을 바로 돌리고 말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아. 신수덕은 아즈텍으로 망명했지. 그리고 철혈의 꽃, 지금의 ‘멕시카 자주국’에 기갑사를 비롯한 기술들을 넘겼어.”

기갑사 기술만 넘긴 게 아니었다.

아즈텍 대륙 내전의 최전선에 파멸인들이 나타났다.

“신수덕이 위험한 기술들을 보유한 건 확실한 사실이야. 그런데 지금 그는 어디에 있을까?”

견하의 그 말을 리안이 받는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듯이.

“……아즈텍 내전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모습을 감췄지.”

“하지만 이제는 어디 있을지 짐작되지 않으세요?”

“주 국장 말대로 로마시에서 일어난 사태가 동명, 칸발리크의 후속편이라면…….”

“혹은 다음에 있을 무언가의 예행연습이라면 말이죠.”

신수덕이 다음 망명지로 택한 곳이 콘스탄티누폴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신수덕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 누군가가 벨리사리오스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아직 잡지 못한 토칸,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잔당도 거기 있지 않을까 싶어요.”

견하의 말에 물증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리안은 그의 말이 맞을 것이라 직감한다.

정말이라면,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사태다.

동맹을 제안한 제국의 황자가, 뒤로는 ‘고려의 적들’과 손잡고 있다? 그런데 고려는 그 황자를 향해 경고를 보낼 수도 없고 제국을 적대할 수도 없다?

“이러다 어느 날 외교 석상에서 신수덕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걸.”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고 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시선이 발끝으로 향한다.

견하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게 있어요.”

리안은 고개를 들어 뭐지, 하는 눈길을 보냈다. 견하는 다시 한번 루우 쪽을 바라본다.

“게레센제의 ‘징검다리 역할’을 끝낼 때가 다가온다는 거죠.”

신수덕이라는 국제적 테러리스트와 협력했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대 카간의 죽음에 일조했다.

그것만으로도 폐위의 명분은 충분하다.

“문제가 되는 증거는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최효윤 중장과…… 제국정보사령부 간 합작으로 어떻게든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울제이 칸의 협력도 바랄 수 있다. 볼로드도 그렇고, 여차하면 응천의 바이다르도 조종할 수 있을 테니 그 부분은 큰 문제가 아니다.

허나,

“게레센제 카간이 혁세주를 물러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불러내는 방법도 안다고 봐야겠네요.”

“여차하면 게레센제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그런 수단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이야?”

“칸발리크도, 자신도, 자기 목을 조여오는 모든 적도 함께 끝장내기로 마음먹는다면요.”

대비는 해둬야겠군.

리안의 눈길은 다시 루우 쪽으로 향했다.

황제는 침묵한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게레센제 폐위를 이야기하는 신하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각오를 다시 다지는 걸까.

아니면 숙부를 동정하는 걸까.

혹은 새삼 깨닫게 된 숙부의 검은 속내에 분노하는 걸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가오는 카간위의 예감에 전율하고 있을까.

루우가 감히 리안의 속내를 읽지 못하듯, 리안 역시 루우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필요한 일만 하기로 했다.

“투글룩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

최근 황자의 부관, 요르요스라는 이름의 사내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신수덕은 태연했다.

그가 뭘 찾아내서 벨리사리오스에게 보고하든, 상관없으니까.

찾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범부의 안목으로는 신수덕이 다루는 원대한 구상의 일부도 알아챌 수 없다.

“보잘것없는 두뇌를 지닌 자들이 신이라도 된 양 날뛰는군.”

벨리사리오스가 토칸을 부추기고, 뒤에서 자신의 계획이 착착 진행된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다는 사실은 신수덕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정도 통찰력도 없었다면 태평양을 건너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냉소하는 동시에, 신수덕은 기묘한 겸손함도 갖췄다.

“토칸도 당장은 나나 벨리사리오스의 뜻대로 움직여 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 뜻대로는…… 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몽골인들은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어도, 늑대를 숭상하는 그 관습만큼은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토칸은 그런 몽골인들 중에서도 특히 더 늑대를 닮은 남자였다.

“야생이 아닌 것, 귀족, 정치인…… 이런 것들을 혐오하는 남자다. 아니, 증오에 가까울까.”

토칸은 자기 입으로 단 한 번도 과거를 말한 적이 없지만, 이미 이단 관련 연구에 깊이 관여해본 적이 있는 신수덕은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단인 건 확실하지.”

다만 그 격은 확연히 다르다. 정상적인 실험의 산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성격적인 면에서도 확실한 파탄이 엿보인다. 부하들의 신임은 받는 걸 보면 얼핏 훌륭해 보이기도 하지만, 토칸은 분명…….

세상의 파멸을 목적으로 하는 자다.

“세상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려는 자와, 세상의 기반부터 무너뜨리려는 자가 같은 편이라니 가관이 따로 없군.”

그러나 정말 우스꽝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속물적인 목적으로 붙어 있는 나는 뭔가.”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신수덕의 복수를 향한 집념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허동주 전사, 라 적힌 급보를 받은 날부터, 신수덕의 뇌리에선 단 한 순간도 복수가 떠난 적이 없다.

“배은망덕한 나의 조국이여.”

그로서는 드물게, 목소리에 감정을 담았다. 부하들이든 가족이든 그 누구 앞에서도 드러내지 않는 목소리였다.

“너희는 국가의 아버지를 죽였다.”

신수덕에게 있어 허동주는 그렇게까지 나이 차가 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비롯한 전우들을 이끌었고, 제3 제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제국이 나아갈 사상적 기초를 다진 사람.

그런 사람을 국가의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미리안을 찢어 죽이고, 그년과 붙어먹는 애송이의 내장을 꺼내고, 거짓 황제를 폐한다.”

다시금 신수덕은 자신의 목적을 되뇌어 본다.

잊지 않기 위해.

심장에 문신을 새기는 듯한 마음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니까 혼돈이 필요하다.”

자신이 일조한 아즈텍 대륙의 혼돈에 이어,

토칸의 증오가, 벨리사리오스의 야망이 유럽 대륙에 일으킬 혼돈이.

혼돈이 그쯤은 되어야, 신수덕은 미리안의 제국과 맞설 수 있을 테니까.

***

정체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밤.

이 여름에 창문까지 꼭 닫아건 사람들은, 그 소리를 내는 것이 새가 아님을 안다.

건물 안쪽은 아마 더위로 숨이 막힐 지경이겠지. 하지만 어둠을 뚫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괴물의 울음소리는 그들의 피부에 소름이 돋게 하리라.

그런 상상을 하며 토칸은 로마의 골목을 느긋하게 누볐다.

경찰도 군인도 순찰을 꺼리는 곳을.

조금 고생스럽긴 했지만, 이 도시도 차츰 그의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추악한 신성함으로 물들어 갔다.

토칸은 하얀 촉수로 변해버린 손을 들어, 어떤 벽을 긁었다.

긁힌 자리에서, 나올 리 없는 피가 배어 나온다.

결코 바라지 않았지만, 손에 넣은 김에 잘 쓰고 있는 그의 능력이었다.

벽의 긁힌 자국에서 떨어진 피는 바닥을 적시고, 이내 피 웅덩이를 이룬다.

피 웅덩이 한복판에서, 작은 구체가 천천히 떠올랐다.

아직은 어린, ‘신종의 씨앗’.

토칸은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나마 ‘문’을 열 수 있었다.

전에는 이 능력으로 아주 잠깐, 주견하의 의식을 붉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토칸은 신종의 씨앗을 움켜쥐고 골목의 더욱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식물의 씨앗을 심듯, 한층 더 어두운 구석에 씨앗을 내려놓고 토닥토닥 눌러주었다.

“혁세주교의 신앙이 퍼지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여기서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렵지.”

붉은 세상의 주인께 영혼을 달라고 빌고, 그 피와 살을 접하는 종교.

그 신앙으로 확실히 사람의 육신부터 사회까지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예배.

아직 그것보다 효과가 좋은 의식은 없다.

일을 마치고 돌아선 토칸의 눈앞에는 신앙의 흔적이 가득한 건물들과 그 건물들이 만드는 또 다른 골목들이 보였다.

방금 토칸이 벽을 긁어낸 건물도 성당이었다.

이 도시에는 크고 작은 성당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불안에 빠진 시민들은 성당에 모여 가족과 이웃의 안전을 신께 빌었다.

“다른 신이긴 해도 기도한다는 행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니까.”

사람들은 신체의 안전을 기도했다.

설령 육신의 위험이 주의 뜻이라 해도, 영혼만큼은 구원받기를 바랐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했다.

‘없는 영혼을 바라는 것’과, ‘당연히 영혼이 있으리라 믿고 구원을 바라는 것’은 성질이 다르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토칸이 이 도시에서 능력을 발휘하긴 어렵다.

하지만 유사품이라도 어쨌든 대량이라면 쓸 데가 있기 마련이다.

“신앙만 있으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 유용한 자료를 얻었으니. 실험은 이쯤에서 그치도록 할까.”

토칸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골목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람들은 오늘 밤에도, 그들의 신앙이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도시 하나에서도 이러할진대,

대륙을 뒤덮는 신앙심은 어떤 결과를 자아낼까.

혹은 전 인류의 신앙은…….

상상만 해도 즐거워 몸을 떠는 사내의 광소가, 그날 밤에도 무고한 이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