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12)
“견하 네 생각은 어때?”
리안은 이미 답을 정해뒀으면서도, 짐짓 그렇게 물어본다.
“로마 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은 아닐 거예요. 신성 제국도 이탈리아반도 북부를 얼씨구나 좋다 하고 내놓을 순 없으니까요.”
“신성 제국령 이탈리아 전역이 봉기해서,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고선 말이지.”
“네. 그런 극단적 상황에 이르기 전에는요.”
극단적 상황에 이른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게 하려고, 신성 제국은 군사적 해결법도 마다하지 않겠죠.”
“신성 제국의 반응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면, 그때는 전쟁뿐이야.”
로마 제국으로서는 전쟁을 감수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그러니 이탈리아 독립 시위에 누군가 개입했다면, 그건 벨리사리오스의 독단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그게 사실이더라도 여전히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벨리사리오스 황자의 손익이 로마 제국의 손익과 그렇게까지 거리가 있진 않을 텐데요.”
그 의문의 답은 루우에게서 나왔다.
“벨리사리오스가 고려 내전의 전개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하며 견하는 끄덕였다.
루우는 흠, 하며 가벼운 콧바람을 내뱉고는 방 안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벨리사리오스 황자의 관심은 주 국장이나 태사만을 향한 게 아니야. 짐을 향한 것이기도 해.”
벨리사리오스가 루우에게 관심을……?
루우의 말에 살짝 의문을 품었다가, 견하는 이내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폐하께서 황제가 된 과정을 배워보고 싶다는 거군.”
“아예 왕조를 새로 창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내 처지. 정치 개입이 거의 불가능해진 현대 입헌군주국의 황실. 이 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어디까지나 벨리사리오스가 이번 사태의 배후다, 이런 전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고려의 황제가 내전에서 활약해 그 공로로 민심을 잡고 황위에 올랐듯이, 자신도 황제가 되려거든 뭔가 공을 세워야 한다고 본 건가.”
리안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지 중얼거려본다.
“로마시를 비롯한 이탈리아반도 중부와 북부를 로마 제국의 영토로, 아니 신성 제국에게서 독립시켜 영향권 안에 넣을 수만 있어도 시민들은 열광하겠죠.”
루우 앞이라 더 말을 잇진 않았지만, 리안은 벨리사리오스가 정말 그런 의도를 품고 있다면 위험하다 여겼다.
군주의 권력을, 견제되는 상태에서 견제되지 않는 상태로 만든다. 이것은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변혁하려면, 그리고 그 후에 벨리사리오스가 황제가 되려면 그만한 힘과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명분에서 온다.
명분은 공로에서 오고.
만약 벨리사리오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로마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렇게 변화한 로마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만약 로마가 ‘벨리사리오스 황제’의 새로운 체제에서 마구 폭주하기 시작한다면, 누가 로마 제국의 폭주를 막을 수 있을까.
유럽 각국은 아즈텍 대륙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발을 뺄 수가 없다.
바라트가 로마의 배후를 노릴 수도 있지만, 그들 역시 배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와 다이온은 그들 기준에선 어쨌든 ‘제국주의, 자본주의 열강’이니까, 완전한 신뢰는 불가능하다.
당장 다이온을 하나로 묶는 문제만으로도 절박한 고려는, 그에 더해 일본이나 태평양 건너편 아즈텍 문제까지 신경 쓰느라 여력이 없다.
게다가 거리상으로도 로마 제국에 간섭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차라리 우호 관계를 맺느니만 못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 벨리사리오스와 이탈리아 문제에 침묵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까.
리안은 그런 불안을 희미하게 느꼈다.
리안이 침묵하며 생각에 잠긴 사이, 견하는 다른 생각을 한 듯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당장 주목해야 할 건, 도시에 나타난 파멸인이겠죠.”
견하의 지적에 리안도 퍼뜩 의식을 전환했다.
시위야 사람의 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파멸인의 출현은 아주 다른 문제다.
여기 있는 모두는 파멸인으로 인한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으니까. 당장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루우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리안은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할 차례임을 알았다. 그녀는 국무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두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칸발리크를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닥쳤던 파멸인들보다는 규모가 작아. 하지만 칸발리크 사태도 처음에는 소수의 파멸인이 간헐적으로 출몰했었다는 걸 잊어선 안 돼.”
일차적으로는 격퇴되었다. 사실 완전히 격퇴했다고 말해도 좋지만, 로마시든 신성 제국이든 교종청이든 신중한 태도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2차, 3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긴장하며.
그들도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일이 로마시에서 반복되는 건 아닐까 하는 정도의 발상은 할 테니.
“우리는 그보다는 ‘하필이면 이탈리아 독립 시위가 벌어지는 이 시점에’ 주목했지만 말이야.”
그 말에 루우가 의문을 던진다.
“그 시점이 문제라면 벨리사리오스 말고도 의심할 자들이 많지 않나?”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괴물을 푼 것 아니냐’는 식의 말은 현지에서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야.”
괴물이 나오는 건 그 자체로 사람들을 집밖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괴물의 효과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것이 출현하면, 지금껏 싸워 왔던 인간사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공동의 적’이 나타났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게 된다.
-괴물은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을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의 독립이니 뭐니 사소한 것에만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하나로 뭉쳐서 재해에 맞서야 하지 않는가?
이탈리아 독립의 대의가 얼마나 강하든, 무차별 살육의 괴물들 앞에선 빛이 바랠 수밖에.
“신성 제국 정부 쪽의 흉계라고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이지.”
“하지만, 신성 제국이 그 정도로 어리석을지는 의문이에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설득과 타협에 나서느니만 못하다.
도시에 파멸인을 푼다는 건, 그 도시가 궤멸할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게레센제 카간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칸발리크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거예요.”
“로마시가 궤멸하면 그 충격으로 이탈리아 독립 여론 자체가 한 번에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마시 자체를 잃는 건 손해가 너무 크겠지.”
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도 그 말을 받아 잇는다.
“로마시에는 가톨릭 총본산인 교종청도 있으니까. 교종청까지 휘말려서 궤멸한다면 서유럽 사회에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로마시뿐만 아니라 교종청을 지키지 못한 신성 제국의 위신이 크게 손상된다…… 라.”
리안은 팔짱을 꼈다.
“그럼 다시금 벨리사리오스를 주목할 수밖에.”
“벨리사리오스 말고도 제3의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유력한 용의 선상에는 올려놓아야겠죠.”
벨리사리오스가 루우의 사례를 본뜨고 싶어 한다면, 일부러 혼란을 일으켜 로마시의 ‘구원자’가 되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이탈리아의 구원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겠지.
“추측은 여기까지.”
리안이 팔짱을 풀고 왼손을 들어 대화를 중단시켰다.
“짐작에 짐작만 이어질 뿐이야. 당장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국무회의의 결론도 그렇게 나왔고.”
주어진 정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만 놓고 보면 리안의 말이 옳다.
하지만 견하에겐 아니었다.
그는 아까 지나에게 로마시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여기서 루우나 리안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느낌에 점차 확신이 들었다.
“이건 로마시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요.”
딱 이야기를 꺼내놓고, 루우와 리안의 반응을 살핀다. 두 사람 모두 할 이야기가 더 있냐는 눈치다. 지금 견하가 꺼낼 말을 짐작도 하지 못한다.
“아까 제가, ‘게레센제 카간이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했었죠.”
루우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린다. 안 그래도 게레센제 이야기는 루우에겐 민감한 화제다. 그런데 마침 로마시 이야기를 하다 게레센제 이야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짚어내진 못하더라도, 루우의 마음속 어딘가엔 기분 나쁜 예감이 기어 올라올 것이다.
리안은 풀었던 팔짱을 다시 끼고 명했다.
“계속해봐.”
“게레센제는 신수덕의 탈출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죠. 그리고 신수덕은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협력했던 게 거의 확실하고요.”
그건 아마도 허동주의 유산일 테지.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비극의 배후에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이 있었죠.”
견하는 토칸과 총 세 번 마주쳤었다. 그와 나눈 대화나 행적을 생각하면 이건 확실하다.
“잠깐.”
이번에 견하의 말을 멈추게 한 사람은 루우였다.
“혹시 게레센제 숙부가 알타이 자유 공화국과 손을 잡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손까지 잡진 않았을 것 같아. 카간 자리를 노리는 게레센제와 카간 자리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손을 잡긴 어렵지. 기껏해야 칸발리크 참극을 방관하지 않았을까 싶어.”
다음 말을 내놓기 전에 견하는 살짝 눈을 감았다.
“어쨌든, 게레센제 카간은 참 적절한 시점에 해결책을 내놓았으니까.”
아즈텍과 비슷한 인신 공양 수법으로, 혁세주를 몰아내야 한다고……. 그런 방법을 제시했었다.
견하와 감찰국은 세상에 알려지면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몰락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방법을 실행에 옮겼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견하는 여전히 머리 한구석에서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게레센제는 어떻게 이런 방법을 알고 있었을까?
그가 방법을 보았다는 「쿠빌라이 문서」들은 고려 쪽에선 입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걸 입수했을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게 또 하나 있어요.”
리안이 고개를 갸웃한다.
견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바닥 너머, 지하를 향했다.
“칸발리크 사태 전에…… 여기, 동명시 지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견하의 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 들고 나서, 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지하철 복구공사 현장이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괴물의 목격담이 들려왔어. 그리고 내가 직접 조사에 나섰지.”
태사 미리안은 파멸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겪었었다. 그런 위기를 넘기며 기어코 비밀 노선까지 들어가, 파멸인을 토해내는 역겨운 구체까지 보았다.
다른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문.
신종의 씨앗이라 불리는 그것을.
루우와 리안의 시선이 무심결에 견하의 왼팔로 향했다. 그러나 견하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일 또한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소행이라면요? 동명시에서 일어난 일은 칸발리크 사태의 예행연습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