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9)
그 제안을 연극으로 만들 순 없었다. 미리안이 두 개를 내놓겠다고 했으니 안세규는 최소한 하나는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내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게 있지.”
제국입헌당과 고려국민당의 연합을 통해 탄생한 이 정권.
고려국민당은 연합을 철회하고, 이제 야당으로 돌아선다.
“우리 당은 내년 총선거에서의 승리를 노린다. 즉, 내가 직접, 태사 자리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무장관으로서 장악했던 경찰력은 손아귀에서 놓치는 것 아닌가. 그런 우려가 목구멍 안을 찔렀지만 그림자는 삼켰다. 그의 주석은 분명 그 부분에서도 생각해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예를 표하는 일도 없이 조용히, 안세규의 집무실을 나섰다.
***
세규가 류성일의 침묵에 웃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류성일은 안세규의 제안에 응하지도 않았지만, 즉각 부정하지 않는다.
안세규의 제안으로 곤혹스러웠다면 동명에 열심히 해명이라도 했을 법한데,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한다.
이는 안세규를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즉, 여전히 안세규와의 동맹을 저울에 올려놓고 있다.
그리고 류성일의 행동을 통해, 주견하 또는 미리안과 거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주견하와의 거래일 것이다. 루우나 미리안이 배후에 있진 않을 테고, 아마 주견하의 단독 판단일 가능성이 크겠지.
-줄타기를 해보겠다는 건가, 류성일.
류성일이 자신의 제안대로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본국으로 귀환할 가장 빠른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성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다.
카라코룸에 남아 있는 쪽으로, 저울이 기울기 때문이다.
-굳이 카라코룸에 남겠다는 건, 카라코룸이 더는 류성일의 귀양지가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카라코룸을 두고 뭔가 계획을 꾸미는 인간들과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후보로 가장 가능성이 큰 자는 원철 등의 사업을 주도하는 주견하일 테고.
-주견하에게도, 나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 자신이 열쇠를 쥐겠다, 그런 뜻인가.
두 사람이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무엇을 두고 거래하는가.
먼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들이밀며, 류성일을 흔들어야 한다.
-하지만 류성일이 주도권을 쥐려 한다는 건, 다음 태사 자리를 노린다는 뜻.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세규도 태사 자리를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미리안은 이번에 패한다.
그리고 자신이 태사가 된다.
태사가 되는 과정에서 류성일을 지렛대로 삼으며, 강대한 미리안을 거꾸러뜨린다.
-초조해하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겠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한 것도 사실이다.
사색에 빠져 있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당장 행동에 들어가야 했다.
내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만큼, 그 손해를 고려국민당에서 벌충해야 했다.
특히 주견하가 자꾸만 영역을 확대해오는 ‘대학가’에서.
안세규는 ‘개혁’의 상징이 되어, 청년층을 확실히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
-다시금, 공산당 및 사회민주당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나.
이들과 연합하여 거대 야당을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들도 개별적으로 제국입헌당을 상대해선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 건 잘 알 테니까.
구호는 정해두었다.
-평화적 정권 교체의 경험!
미리안이 아무리 개혁적이라 해도 미승휴의 후계자다. 그 정권에서 미승휴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순 없다.
이번에 안세규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계기로, 그런 점을 부각한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발전의 첫걸음임을 내세운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진 모르지만, 방향은 옳다.
1년 조금 넘게 남은 총선거.
안세규는 마치 눈앞에 총선거가 보이기라도 하듯 정면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다른 잡다한 일들은 제쳐두고, 오직 총선거에만 집중한다.
***
위에서 아래로, 적의 가슴과 배를 가른다.
내장과 피가 얼굴을 적시지만 효윤은 고갯짓 한 번 않고 전진했다.
총알을 막고 사람을 찢어발기며, 하늘을 가르고 땅을 갈아엎는 이단. 그런 이단 중에서도 분명 효윤은 강자였다.
피보라가 둥글게 효윤의 주변으로 흩어지고, 긴 머리카락도 그녀의 동작을 따라 상모처럼 휘감아 돈다.
참혹하지만 아름다운 타원형을 그리는 살육.
그 어떠한 의문도 망설임도 품지 않고 적을 베어나가는 효윤이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계속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반쯤 무너진 담벼락을 엄폐물 삼아 부대원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다른 분대가 엄호 사격을 가하길 기다린다.
그녀의 전투력이라면 혼자 돌진해 적을 도륙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효윤은 이번엔 철저하게 전술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런 작은 전투에서도 경험을 점차 쌓아 올려, 마침내 중장이라는 의전용 계급에 어울리는 군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호 사격이 시작됐다.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들리는 소리보다 더 많은 수의 총알이 적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자세를 바짝 낮추고, 표범이 땅을 기듯 돌진한다. 뒤따라오는 이단 군인들 서넛이 그녀의 좌우로 퍼진다.
일반 군인들도 정예들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단 군인들이 적진지를 망가뜨려 놓은 후에 돌진하는 편이 안전하기에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온다.
효윤은 박도를 크게 휘두를 준비를 하면서도, 적의 행동을 관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석연찮은 느낌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간다.
효윤과 태주갑을 비롯한 군인들이 맡은 임무는 철도 공사 현장 경호다.
고려의 영향권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리의 테러에 맞서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표면적인 임무와는 별도로, 고태용이 귀띔해준 바를 추가 조사한다는 목표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원철의 거대한 철도망 건설 사업을 따라 각지를 누비며, 방해하는 적들과 싸웠다.
처음 몇몇 집단은 분명 몽골인이지만, 낯익은 전술로 덤벼왔다. 고려군의 전술이었다.
고태용 말대로 고려군을 통해 훈련받은 자들이라면, 혹은 그들이 고려군의 방식으로 다시 교육한 자들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적을 물리친 후 노획한 무기 중에는 고려제 무기가 많았다. 물론 밀수한 것일 수도 있고, 지난 몽골 내전에서 얻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전술을 생각하면 이 역시 고려 내부의 누군가가 지원해줬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로 마주친 집단들은 한족 비적떼였다.
아마 대부분이 한족 반란군의 잔당일 것이다. 혹은 한족 반란 중에 발생했던 난민들이 그대로 도적떼가 되어버렸거나.
……신수덕의 한족 대학살 때 난민이 되었던 사람들도 섞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에겐 전술이나 교리라 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별다른 특징도 없었고, 매번 손쉽게 격퇴했다.
하지만 세 번째, 오늘 맞닥뜨린 것과 같은 무리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영양 상태나, 복장이 너무 좋다.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고는 있지만 고려군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차량까지 있다. 장갑차까진 아니지만 차량에 이것저것 붙여서 성가신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노획한 무기는…….
순간 효윤의 오른쪽을 스쳐 지나간 검은 형체에 그녀의 생각은 끊겼다.
형체는 다름 아닌 태주갑 중령이었다. 그는 선두에 선 효윤에게 화력이 집중되는 그 잠깐 사이에 오른쪽에서 빠르게 치고 나가 적의 의표를 찔렀다.
태주갑의 거대한 창이 적이 숨어 있던 공사장 장비들을 뒤엎는다.
적을 물리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거의 포격을 퍼부은 것처럼 박살 내놓았으니 피해는 크다. 이런 식으로 공사장에 피해가 누적되면 원철의 사업에도 차질이 생긴다.
적이 의도하는 바도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쪽에선 적의 출혈을 마구 유도해서, 적이 감히 이런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끔 해야 한다.
더 잔인해질 필요가 있음을 느끼며 효윤은 이를 악문다.
갑작스레 목표를 효윤에서 태주갑으로 바꿔야 했던 적들은 뒤이어 짓쳐들어오는 고려측 이단들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진다.
하지만 그들의 지휘체계는 상당히 잘 잡혀 있는 듯했다. 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철수를 개시한다.
효윤은 추격을 멈추지 않는다. 태주갑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 그대로 달려나가 적의 오금을 벤다.
다리가 잘려 비명을 지르는 적을 뒤로하고, 그대로 적들이 올라탄 트럭에 뛰어들어가, 마구잡이로 박도를 휘둘렀다.
트럭이 찢어지고 피와 기름이 땅을 적신다.
뒤에서 적을 정리한 일반 군인들이 마침내 효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와, 저항을 멈추지 않는 잔당을 향해 정확한 사격을 날린다.
적은 공사 현장을 막 습격했을 때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서 도망쳤다.
전투는 끝났다. 밤이 지나고 지평선 부근에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어디 소속된 도적떼인지는 몰라도, 이번 일로 충분히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군요.”
고려와 원철은 이단을 동원해서라도 이 사업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 괜한 희생을 늘리지 마라. 태주갑은 그런 메시지가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입에 담았다.
“적 무기, 노획한 게 있나요?”
“멀쩡한 게 거의 없긴 합니다만, 뭔지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태주갑이 총을 내밀었다. 이단의 무기로 깔끔하게 절단된 단면. 두 동강 난 총을 보며 효윤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몽골군의 총이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까 적들의 전술도…….”
“예, 몽골군의 방식이었죠. 저도 합동 훈련을 몇 번 해봐서 눈에 익은 전술입니다.”
“보통 이런 일을 벌일 때는 정체를 감추려 하니까, 설령 들켜도 다른 조직의 짓이라는 변명을 하려면 무기에도 신경을 쓰겠죠?”
효윤은 최대한, 어떤 결론에 접근하지 않으려 이런저런 가설을 변명처럼 내민다. 그러나 주갑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몽골은 내전을 거친 나라니까, 어떤 조직이 몽골군 무기를 입수해서 쓰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다시 말해, 적들이 몽골군의 지원을 받고 있거나, 몽골군 소속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신원경제자원연구회……. 그들이 결국 무력을 써서라도 사업을 방해하려 드는 게 아닐지?”
하지만 효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까지 큰 희생을 내고, 여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원철의 사업을 방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태용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신원연구회의 활동은 비교적 ‘부드러운’ 방식의 방해다. 짜증스럽긴 해도 무력 충돌은 피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갑자기 무력 사용에 나섰다?
좀 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고태용 소장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