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8)
루우나 견하, 리안에 비해 느릴 뿐, 효윤도 주어진 퍼즐 조각은 얼마든지 맞출 수 있는 사람이었다.
최효윤과 태주갑을 비롯한 군인들은 안세규와 관련된 문제로 여기 와 있다.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은 ‘다른 고려인’이 몽골 내전에 개입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고려인’의 자리에 ‘안세규’를 집어넣지 않는 게 이상하다.
문제는 그가 몽골 내전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협력했는가 하는 것.
그리고 칸발리크 사태의 한복판에 있던 효윤은, 분명 ‘다른 고려인’의 개입은 느끼지 못했다.
“안세규는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전신,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몰래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전을 일으킬 역량을 갖추도록, 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도록 말입니다.”
효윤의 눈이 커지는 그 순간 고태용의 눈길은 슬쩍, 태주갑의 얼굴을 향했다.
***
“조유관이 서부군에서 인력을 차출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훈련을 도왔다?”
“본인도 가끔 몽골로 ‘시찰’을 나가 훈련 상황을 점검했었던 모양입니다.”
배영훈은 뻣뻣한 자세로, 시선은 천장 바로 밑의 벽을 향한 채 그렇게 대답했다.
황제와 태사, 감찰국장, 이렇게 제국의 실력자 세 사람이 모인 자리.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가 보고하는 내용이 내용인지라 더욱 어쩔 수 없었다.
“잠깐, 그전에는 안세규에 의한 조유관 암살 음모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조유관 장관이 서부군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동명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렇게까지 두 사람 사이가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루우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우리가 놓친 민국정부 내 파벌 다툼이 있었겠지. 예를 들자면 안 장관이 고려국민당에서 반대파를 쳐낼 때부터 앙금이 쌓였다든가.”
미승휴가 살아 있던 시절, 혹은 허동주를 토벌해야 하던 시절에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모든 정파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과 민국이 타협하고, 하나의 정부를 이루면서부터 갈등이 터져 나왔다.
현실적으로 민주공화국을 달성하는 혁명이 당장은 어렵다고 보고, 입헌군주 아래 엎드린 안세규와 그 추종자들.
평소 젊은 안세규를 못마땅해하다가, 민주공화국이라는 목표마저 포기하는 것 같자 불만이 폭발한 원로 파벌.
“굳이 따지자면 조유관은 후자에 더 가까웠겠지.”
“어쨌든 자신은 군인이니까 전 임시정부 주석이자 고려국민당 당수인 안세규의 말을 따르다가…… 전역을 계기로 반기를 든 건가?”
루우는 그렇게 추측했다. 그 추측에 견하가 다른 가정을 보탠다.
“혹은 반대로, 안세규가 자신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했던 흔적을 없애려 들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그럴듯한 가정이다. 리안의 눈길은 다시 배영훈을 향했다.
손가락이 까딱, 흔들렸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봐. 조사 과정까지 곁들여서.”
“예. 저는 원래 안세규 장관을 직접 조사하기보다는, 그 주변을 조사하며 안 장관의 비밀에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유관 장관과 서부군 사령부가 안 장관의 ‘암살 음모’에 대응했던 문건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은 최종 수단이다.
즉, 생각 없는 범죄자나 살인광이 아닌 이상 살인은 그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을 때 선택하는 것이다.
안세규쯤 되는 사람이 조유관을 죽이려 했다면, 암살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그 상황이 바로, 조유관을 통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한 일인가.”
“몽골 내전 초기에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기세를 떨칠 수 있었던 건, 조유관이 보낸 물자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조직원들 상당수도 우리 서부군 장교들의 훈련을 받았는데, 그 덕분에 그들이 내전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죠.”
“어쩐지 민중의 분노를 타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치고는 정규군을 상대로 잘 싸운다 싶었어.”
고개를 갸웃한 뒤 견하를 향해 물었다.
“동명-카라코룸 간 철도 건설을 방해하던 반란군 잔당도 아마 그들이겠지?”
“고려군은 세계대전 때 경험을 바탕으로, 지휘부가 소멸해도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교리를 확립했으니까요.”
안세규가 뿌린 악의 씨앗은 정말 끈질긴 뿌리를 내린 듯하다.
“주 국장, 조유관이 감찰국의 도움을 받아 암살을 모면하지 않았었나?”
“조금 도움을 주긴 했죠. 그 덕분에 저도 조유관 장관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었고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암살당할 뻔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그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다물더라니…….”
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가 뱉는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이건 반역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문제야.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칸발리크의 비극을 일으켰어.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으로 진격할 당시…… 적진에는 기갑사까지 나타났어. 조유관이나 안세규가 그 기술까지 유출했다면,”
그때는 제2차 고려 내전이 일어나든 뭐든, 두 역적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
“기갑사 기술이야 신수덕이 아즈텍에 유출한 사례를 생각해보면,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유출한 것도 신수덕일 가능성이 커. 그런데 짐이 의문인 건…….”
루우의 시선도 배영훈을 향했다.
“도대체 왜 그랬냐는 거지.”
견하가 그 물음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말을 살짝 끌면서 이어나간다.
“이유를 캐본다는 구실로, 어쩌면 조유관과 안세규 두 사람 모두 목줄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
류성일의 침묵에 안세규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일입니까?”
그림자 사내는 안세규의 집무실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런 물음을 던졌다.
“암, 웃을 일 아닌가.”
“이제는 지나가는 어린애도 주석과 류성일이 뒷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알 테고, 그러면서도 태사는 합당 제안을 거부했고, 정작 류성일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뭐가 웃을 일이란 말인지.”
“처음부터 거부당할 제안을 던졌네. 우리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국민의 지지를 확보했지. 태사는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만으로 지지세가 꺾였고.”
“하지만 류성일과 손을 잡았음이 드러난 이상, 사람들은 진실에 접근할 겁니다.”
류성일이 미승휴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진실.
안세규가 미리안 암살을 시도했다는 진실.
류성일과 안세규가 내전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몰아갔다는 진실.
안세규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하고 몽골 내전에 개입했다는 진실.
그리고 그걸 묻어버리려고 조유관 암살을 시도했다는 진실.
“그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폭로되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하나만 수면 위로 떠 올라도 주석한테는 치명적일 겁니다.”
그림자의 말을 들은 안세규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찡그림과 웃음 사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승휴와 허동주가 우리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했던 일을 벌써 잊었나?”
그들이 벌였던 체포, 암살, 고문…… 그 외 각종 비열한 수단들은 민국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폭로전이 시작되면 박살 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태사일세.”
그 정도까진 이르지 못해도, ‘두 정부가 다투던 시절의 일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식의 반응만 나올 것이다.
그렇다.
제국정부를 향한 민국정부의 활동이 악으로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제국정부를 ‘정통’으로 놓는 시각에서나 그러한 것이다.
제국정부와 민국정부의 합작으로 ‘새 정권’이 탄생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과거의 다툼이야 ‘그땐 그랬지’ 수준의 이야기일 뿐.
태사도 세규도 그것을 알기에, ‘새 정권’을 부정하는 고려국민당 내 파벌 숙청 때는 손잡지 않았던가.
“하지만 태사가 그 모든 걸 감수한다면? 내전도 불사하겠다고 달려든다면? 그럴 위험성보다 주석을 남겨뒀을 때의 위험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림자 사내는 자신이 배영훈을 협박할 때 썼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 자신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 정치가들은 얼마나 무모할까.
“그땐 순교자가 되는 거지.”
그림자는 말을 잃고 안세규가 떠드는 걸 계속 바라만 봤다.
“왜, 내가 그런 협박을 받으면 벌벌 떨면서 태사 앞에서 목숨이라도 구걸할 줄 알았는가? 나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처음 말단 활동가로 들어왔을 때부터 단 하루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날이 없네.”
형형하게 빛나는 눈.
말을 할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듯한 어깨.
그림자는 새삼 왜 자신 같은 사람이 혁명가들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지 깨닫는다.
그림자가 손 한번 쓱싹 움직이면 안세규의 목숨은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세규를 이겼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굽히지 않는 의지.
자신이 걷는 길에 대한 확신.
이를 갖추고 그림자 사내 앞에 선 안세규는…… 이런 혁명가들은 인간으로서의 격이 다르다.
“나를 죽이면, 진상이야 어쨌든 미리안은 미승휴의 복사본이 될 뿐일세. 백부가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한 어리석은 아가씨.”
내전, 2차 내전이라. 안세규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당장 분노에 차서 말은 그렇게 내뱉겠지. 그럴 각오도 있을 걸세. 미리안이라면 충분히 그 정도 그릇은 되는 사람이지. 허나,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네.”
루우가 몽골 황위 계승을 요구할 수 있는 건, 고려의 막강한 국력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 국력도 지난 내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졌다면 잿더미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날 운 좋게 허동주를 참살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내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2차 내전이 발발한다면, 대공황의 극복도 간신히 가닥을 잡아가는 상황에 고려의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이다. 고려가 지난 4년간 이뤄 온 모든 것들도 없었던 일이 되겠지.
그러면 루우는 다시는 몽골 황위를 넘보지 못할 것이고, 고려가 주도하는 다이온 체제를 통해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미리안의 야심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미리안이 그 정도 저울질도 못 할까? 주견하가 그 정도 계산도 못 할까? 황제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할까?”
아니지. 안세규는 그렇게 단언했다.
그림자는 슬슬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석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였는지는 이제 잘 알았으니까, 그는 그의 일을 해야 한다.
일어서기 전에, 그림자는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태사가 합당 제안을 거부한 건 어떻게 대처하실 겁니까.”
“합당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계획했던 대로 류성일을 당수로 옹립하고, 나는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노렸겠지. 하지만 거부당한 이상 나는 고려국민당 당수 자리를 유지하겠네.”
“내무장관 자리도?”
“아니, 거기선 선언한 대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