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7)
“문제는 증거야.”
태사는 다리를 꼰 채 앉아 있고, 황제는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배회한다.
리안이 침묵하는 가운데 루우의 말이 이어진다.
“안, 류, 두 사람의 제휴 자체는 불법이 아니야. 여태껏 태사나 다른 사람들을 속여 왔냐는 정치권의 지탄을 받을 순 있겠지. 두 사람의 동맹이 언제부터였는가,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 나올 테고.”
동맹 시점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내전’을 둘러싼 정황까지 사고가 닿는다. 물론 두 사람과 허동주 사이의 연결점을 먼저 찾아야겠지만.
“증거가 없어.”
증거야 조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무리도 있다. 그런 조작된 증거로도 여론을 선동해 큰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방법은 꺼내지 않는다.
그녀 눈앞의 태사는 안정성을 극히 중시하는 사람이다. 증거 조작이 필요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겠지만, 다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한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안정적인 길로.
왜냐하면 리안은 조작된 증거가 언젠가 반드시 파국을 일으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당장 고려 정국의 불안정은, 그녀와 허동주가 조작된 상황에 놀아났기 때문 아닌가.
그러니 안세규와 류성일을 사냥할 때는 보다 명확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들이밀어야 한다.
하지만 루우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증거를 잡아야 해. 대책은 있어?”
황제 자신이 파악한 정황과 그에 따른 증언,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승휴의 죽음에 류성일이 개입했다는 증거.
내전을 촉발하는 데 류성일과 안세규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증거.
“저들은 그 점에 있어선 철저해.”
한참 만에야 리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부님의 치료에 관여했던 모든 의료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실종됐어. 한 사람도 남김없이.”
꼭두각시로 있었던 1년.
그 1년이 너무 길었다. 진실을 은폐하기에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자신의 어린 나이, 미숙함이 원망스러워 리안은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물론 얼굴에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실종자 중에 위협을 느끼고 먼저 은거한 사람도 있겠지만, 저쪽에서 찾아내는 데 실패한 사람을 우리가 찾아내긴 어렵겠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황제에게 상황 보고라도 하듯 설명을 이어나간다.
“내전에 뭔가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혐의도 마찬가지야. 허동주가 죽었고 신수덕은 밖에 있지.”
루우는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다. 그러면서 묻는다.
“타이시가 그런 이유로 아예 손을 놓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리안의 얼굴에 알아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다른 방향에서 두 사람을 잡을 덫을 놓고는 있어. 하나는 국내에서,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
“오랜만입니다, 중장 각하.”
“네. 오랜만이에요.”
태주갑 중령 및 함께 칸발리크 사태 때 활약했던 전우들이 효윤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효윤도 그때보다 더 능숙하게, 친밀함을 담아 이제 ‘부하’가 될 사람들의 경례를 받아준다.
부하, 라고는 해도 효윤이 직접 지휘를 맡지는 않는다. 지난번처럼 실질적인 지휘관은 태주갑 중령이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효윤은 ‘강력한 이단 전력’으로만 온 게 아니라는 것.
그녀는 조유관의 도움을 받아 서부군에서 속성으로 지휘관 훈련을 마치고,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태주갑과 부하들이 있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
물론 태사 미리안은 효윤을 지휘관으로 성장시킬 생각으로만 파견한 게 아니다.
효윤은 ‘밖에서’ 안세규 및 류성일 동맹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배영훈이 맡은 것과 비슷한 임무라 할 수 있다.
“이곳 치청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을 땐 의아했는데, 중장 각하와 다시 일하게 되다니 사령부에서도 좋은 일을 해줄 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칸발리크 사태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은 얼마쯤 아부와 장난, 그리고 진심을 섞어서 말했다.
효윤도 그 말에 공감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지만 내가 왔다는 건 험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뭐, 그쯤이야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설마 칸발리크 사태 같은 일에 또 휘말리진 않겠죠.”
효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않겠…… 죠, 중장 각하?”
효윤은 씩 웃으며 농담처럼 질문에 답해주었다.
“보장은 못 하겠는데.”
나머지 병력은 대기, 효윤과 태주갑 두 사람만 자리를 옮겼다. 이들은 치청에서 합류하자마자 쉴 틈 없이 누군가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총독부라 불리던 건물로 향한다.
신수덕의 궁전. 그가 사람들에게 공포를 퍼트리고, 음모를 꾸미고, 학살을 계획한 바로 그곳.
지금은 몽골 군정 사령관의 사령부로 쓰인다.
산동 토벌전 이후 고려령 산동은 다섯 개로 분할되었는데, 그중 동남쪽이 고려의 새로운 행정구역 ‘발해도’로 남았다. 그 서남쪽으로는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각기 영토를 받았고, 서북쪽으로는 몽골의 지배 영역이 확대되었다.
치청은 마침 몽골이 지배하기로 예정된 지역에 있었기에 몽골의 군정 사령부로 넘어가고, 발해도에서는 고대부터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인 즉묵(即墨)에 따로 도청을 두었다.
“즉묵이 아니라 여기 치청총독부에서 보자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죠.”
효윤이 총독부 건물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화려하긴 하지만, 여전히 신수덕 시대의 위압감이 서려 있는 곳이다.
신수덕을 향한 연합군의 공세는 다행스럽게도 이 건축물에는 닿지 않았다. 그 전에 신수덕이 도시를 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총독부는 20년 가까이 비축한 화려한 자산들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산동 북서부를 접수한 몽골은 여전히 이 지역을 정식 행정구역으로 편입하지 않고, 군정 체제 아래 남겨두었다.
주민들이나 정부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는 군정 사령관은 이 총독부를 일종의 사교 클럽으로 만든 것 같았다.
“주변엔 죄다 사업가나 유지들뿐이군요.”
“유지들……이 남아 있었나 보군요.”
“흔히들 돈으로 목숨은 살 수 없다고 합니다만, 이 경우엔 아니었나 봅니다.”
신수덕의 한족 증오가 아무리 강철같다 해도, 강철 아래 깔린 흙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뇌물, 친분을 이용해 살아남은 한족 부호들. 한때는 친려파였으나 지금은 친몽파라는 간판을 내건 이들은 이렇게 옛 주인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역겹다는 얼굴로 효윤은 비난했다.
“비위도 좋군요. 동포들의 학살을 결정한 장소에서, 이 파티가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빙글빙글.”
저들에게도 각자 사정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이고, 살아남았으니 앞으로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겠지.
어떤 사람은 자기 재산을 털어서 학살당할 동포들을 구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태주갑 역시 저들을 변호할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저런 생각 없는 자들이 있는 곳이니,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더 적합한 장소겠죠. 가시죠, 각하. 이쪽입니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자그마한 응접실이었다. 귀빈을 맞기보다는 파티 중 연인들이 밀회를 즐기기 딱 알맞은 장소였다.
방 안에 놓인 의자 세 개만으로도 꽉 차 보일 만큼 좁았다.
고려군 장성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있다 효윤이 들어오는 소리에 일어났다.
그는 경례하는 대신 밖을 살짝 살피곤 문을 닫았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여기서는 굳이 눈길을 끌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제국정보사령부 소속 소장 고태용입니다.”
효윤도 격식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끄덕이고는, 권하는 말이 없어도 적당히 자리에 앉았다.
이 남자가 견하와 함께 일을 꾸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과도 엮일 줄이야.
“기밀을 요하는 사안이군요.”
“예. 발해도 쪽은 고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특히 안세규 쪽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안 되겠기에 즉묵이 아니라 여기 치청에서 뵙자고 말씀드린 겁니다.”
몽골 군정 사령부쯤 되면 군 관계자가 아닌 이상은 들어오기 어렵다.
“여기도 그…… 몽골 측의 어용 단체인 신원경제자원연구회, 줄여서 신원연구회 쪽 사람들이 들락거릴 수 있겠습니다만 그들은 이 일과는 별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런 단체가 대원철도주식회사의 사업을 방해한다는 건 알고 있다.
고태용의 말마따나 당장 효윤이 맡은 임무에선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그녀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흘려듣고,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실은 저희 쪽에서 맡은 일은 조금 다른 일이었습니다. 내전, 그러니까 몽골 내전 말고 우리나라의 내전 당시, 허동주나 신수덕이 외부 세력과 결탁한 흔적은 없는지 찾아보라는 태사 각하의 하명이 있으셨죠.”
“그래서, 뭔가 건진 게 있나요?”
“키타이와 낭키아스 모두, 허동주 또는 신수덕과 거래가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효윤이 살짝 숨을 삼킨다. 이내 곁에 앉은 태주갑의 얼굴을 바라봤다. 태주갑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다.
두 사람이 놀라움을 진정시킬 틈을 뒀다가, 고태용은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내전 당시 허동주에게 물자를 지원하고 뒷돈을 좀 챙긴 것 같은데, 신수덕이 난리를 치기 시작한 후로는 관계가 끊어집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현 카간…… 당시 낭키아스의 칸이던 게레센제가 치청 함락 직전에 거래를 재개했다는 의심은 합니다만…….”
신수덕의 탈출에 게레센제가 도움을 주었으리라는 의심은 모두 하고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고, 증거를 잡기 위한 조사는 게레센제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주견하가 게레센제를 ‘징검다리’로 삼기로 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징검다리라 해도 어쨌든 카간은 카간이다. 그 권위를 함부로 침범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일단 키타이의 울제이 칸 쪽을 집중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원철의 사업을 돕는다며 각지를 쏘다닌 덕분에 이것저것 꽤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죠.”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고태용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뭔가를 찾았구나, 하고 효윤은 직감했다.
“울제이 칸에 대해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만, 우연히 그쪽에서 ‘고려의 정황’을 파악해둔 자료를 입수했죠.”
“울제이 칸이 고려의 정황을?”
“그도 칸발리크의 옥좌를 노렸던 사람이니까요. 칸발리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몽골 본토의 정세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또 거기에 고려는 어떻게 개입해 있는지…… 면밀히 살펴뒀더군요.”
“고려의 개입이라면 황제 폐하와 제가 한창 칸발리크 사태를 수습하던 그 일을 말하는 건가요?”
“울제이는 그것도 파악하고 있긴 했습니다만, 그가 파악한 ‘고려의 개입’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