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5)
기름도 피도 나오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오스는 입가를 손으로 닦아내며 일어섰다.
“……산 채로 뜯어먹히는 기분이 어떠냐, 신이라는 이름의 짐승.”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벨리사리오스는 다시 자신의 검을 소환했다.
신은 이제 버르적거리지도 않았다.
벨리사리오스는 그대로 신의 목덜미에 검을 꽂아 넣고, 머리를 베어냈다.
베어내서 들고 보니 그 크기는 완전군장 정도. 짊어지고 가기에 무리는 없다. 적절히 포장만 한다면.
참수당한 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벨리사리오스는 위에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씩 웃었다.
부하들은 그때, 혐오와 경외가 공존할 수 있는 감정임을 처음 느꼈다. 아마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벨리사리오스가 유일할 것이다.
벨리사리오스가 다시 입구 앞으로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부하들은 그들의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그들 모두 배교자가 되었다.
***
집무실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그 소리에 벨리사리오스도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온 사람은 연구원이 아니다. 그는 군사와 정치 분야에서 벨리사리오스의 첩보를 담당한 사람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함께 로마시에 침투해 신종과 전투를 치르고 그 머리를 가져온 부관이었다.
그날 이후 이 부관, 요르요스는 다른 여러 부하처럼 벨리사리오스의 측근이 되었다.
그가 굳이 연구소까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벨리사리오스는 꽤 급박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토칸이 이탈리아에서의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벨리사리오스는 그 보고에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에 앉아서 듣고만 있을 기분이 아니군. 따라오게.”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시설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얼마 전에도 벨리사리오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내려간 적이 있는 곳이다.
바로 납치된 신, 데우스를 보관해 놓은 장소.
요르요스는 그것을 처음 본 신수덕이나 토칸처럼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도 신종을 볼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머리만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마치 곰팡이가 배양되듯, 머리 아래로 목이, 목 아래로 어깨와 가슴이 자라나…… 지금은 근육질 남성의 조각상 같은 몸을 지녔다.
다만 ‘그때’ 벨리사리오스가 먹어 치운 날개만큼은, 여전히 자라지 않는다.
딱히 구속된 것도 아니지만 데우스는 인간에 대한 적대 의사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리 살점을 떼어다 실험을 해도, 총을 비롯한 무기로 공격을 퍼부어도,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그날의 기억이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나 보군. 아니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흡수한 내가 있기 때문인가?”
벨리사리오스는 농담처럼 그렇게 추측을 입에 담아본다.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건 연구가 진척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신수덕과 토칸에게도 이걸 보여줬었는데. 특히 토칸 쪽은 꽤 놀란 것 같더군.”
“토칸이 갑자기 신성 제국 영토에서 행동에 들어간 건 그 충격 때문…… 이라 추정할 수도 있겠군요.”
요르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전하께서 부추기신 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전하.”
“우리 로마 제국은 모르는 일일세. 하지만 토칸으로 인해서 뭔가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 기회를 마다하지도 않을 걸세.”
요르요스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벨리사리오스가 로마의 권력을 잡기 전까진 최소한 유럽의 국제 정세는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요르요스는 제 생각을 벨리사리오스에게 강권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벨리사리오스의 뜻에 따르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주인의 뜻을 묻는다.
“신성 제국에 혼란이 일어나는 편이 좋다고 보십니까?”
“로마시를 향한 갈망은 나도 막을 수 없지. 아버지도 막을 수 없어. 내 형제 중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날 이후로도 로마시에 대한 ‘로마인’들의 의지는 점차 강해져, 아예 대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러했듯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수복해야만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가장 밑바닥 민중부터, 대학의 교수라는 작자들 입에서까지 나오는 주장이다.
“나는 민중 계몽가가 아니야. 민의 자체는 거스를 생각이 없네. 그건 내 야심이 아니지.”
만약 신성 제국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로마 제국은 군사적 개입을 하고, 기회를 보아 이탈리아를 그대로 점령해야 한다는 걸까. 그게 벨리사리오스가 그리는 새로운 유럽의 정세일까.
“토칸이 그 정도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토칸이 무슨 수작을 얼마나 부리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게 우리의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우리는 거기서 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계속 감시하면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보다는 신수덕이 무슨 생각인지 좀 알아봐 주겠나. 그자, 이상할 정도로 얌전히 굴고 있으니까.”
***
로마시 지하에는 괴물이 산다.
그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수년 전이라면 바티카누스의 교종청 사람들은 그런 소문에 움찔, 어깨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이제는 지하에 괴물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 골치 아픈 이교의 신은 동쪽의 로마인들이 잘 처리해주었다.
그래서 교종청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곤 ‘지하의 괴물 소문’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어쩌면 예전의 그 괴물에 대한 소문이 뒤늦게 퍼지는 거라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물론 교종청의 그런 반응에 쓴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토칸은 로마시의 구석구석, 어둠이 자리한 곳마다 자신의 수족들을 퍼트렸다.
여기 사람들은 토칸이나 그 부하들을 볼 때 몽골인, 이라고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못하고 그저 동양인 이민자들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시내를 활보한다고 해서 큰 주목을 받을 일은 없었다. 흘끔거리는 눈길 정도는 받지만.
토칸과 부하들은 먼 동방, 고려의 수도 동명시 지하에서 벌였던 일을 여기 로마시에서 벌여보려고 한다.
로마에는 그 역사가 오래된 만큼 후미진 곳에도 유적이 많았고, 그 유적들 틈마다 파멸인과 신종의 씨앗을 배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술에 취해 컴컴한 골목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거기서 괴물을 목격하곤 하는 것이다.
토칸 패거리와 소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신성 제국의 경찰도 아니었고, 교종청도 아니었다.
로마시의 토박이 깡패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들은 더럽고 미개한 동양인 거지 떼가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한번 ‘손봐주기’ 위해 시비를 걸었다.
깡패들이 시비를 걸어 온 싸움터는, 토칸에겐 아주 좋은 실험장이 되었다. 깡패들은 경쟁자를 혼쭐내주러 우르르 몰려갔다가 그대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난생처음 보는 괴물에게 산 채로 갈기갈기 찢기면서.
총과 단검과 시가의 세계에 살던 사람들에겐 아마, 다시 없을 공포였을 것이다.
정말로 ‘다시는 그런 공포를 겪을 일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지만.
그제야 서서히 경찰들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들의 감시, 감독 아래 있던 깡패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자꾸만 터졌다. 조직 간 다툼이라도 벌어진 건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실종된 깡패들의 소속은 ‘균등했다’.
소매치기들은 진즉에 사라져버렸다. 접촉 가능한 소매치기들을 찾아내서 추궁하니 모두 겁에 질려 이상한 헛소리나 늘어놓는다. 이대로는 소매치기는커녕 완전히 폐인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렇게, ‘이상할 정도로 도시의 치안이 좋아졌다’.
경찰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토칸이 도시의 어둠 속에서 모두를 비웃고 있던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시위.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이 도시를 조금씩 뒤덮어갔다.
이들의 구호를 종합,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이탈리아 독립’.
토칸은 자신이 벌인 일이, 엉뚱한 방향이긴 해도 유럽에서 혼돈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실상은 토칸의 영향도 뭣도 아니었다.
이 시위의 배후에는 벨리사리오스가 있었다.
토칸은 자신이 벨리사리오스의 계획을 밖에서 흔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벨리사리오스는 토칸의 뒤에서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보며 혼돈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이탈리아가 신성 제국에서 떨어져 나오려 몸부림치고, 토칸이 풀어놓은 괴물들이 모두를 광기로 몰아넣을 때,
자신이 구세주가 되어 로마로 진군하겠노라 다짐하며.
***
유럽이라는 연못에 혼돈의 물방울이 떨어졌을 때,
먼 동쪽, 고려의 정계 또한 전혀 조용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무장관 안세규는 태사의 용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시작한 고려국민당의 발표는 미리안의 오른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감탄, 비웃음, 투쟁심 모두를 담은 그 얼굴 근육의 움직임.
그녀의 측근들은 모두 침묵한 채 주군의 반응을 기다린다.
“합당 제안이라.”
유사한 사례를 찾자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선례가 아니라 그런 행동이 몰고 올 파장이다.
“그야말로 거대 여당이 되겠군.”
“선거로 얻을 이익보다 선거에서 ‘절대로 지지 않을 방법’을 골랐다고 봐야겠죠.”
견하의 분석에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 방식도 아주 대담해. 내가 최고회의 의장 자리, 제국입헌당 당수 자리 모두 내놓겠다는 걸 그대로 이용한 거지. ‘저도 각하를 본받아 내무장관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라니.”
리안이 만든 완벽한 명분에 그대로 올라탔다. 안세규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정치공작이지만 정치공작이 아니다.
“두 당이 하나가 되어 새로 탄생할 당의 당수는 ‘류성일’로 하자는 조건도 웃기지 않아?”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에요. 그건 마치 자신은 새로운 당의 당권에는 야심이 없다는 듯 말하는 것 같지만, 당장 ‘고려국민당의 당수 자리에서 물러나진 않을 것’이라는 말이 감춰져 있죠.”
견하의 말대로, 안세규는 내무장관 자리를 내놓고 고려국민당 당수 자리는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러면 합당 제안이 거부당해도 고려국민당 당수 자리는 유지할 수 있다. 내무장관 자리도 유지할 수 있겠지. 설령 내무장관직은 내놓더라도, 자신의 지지 세력 앞에서 체면은 선다.
“역시 안세규야.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몰아붙이면 반격하는 법인데, 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하겠지. 이건 예측해내지 못한 내 실수야.”
하지만 실수를 방치해놓을 순 없다. 수습안을 내놓아야 한다.
“안세규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좋든 싫든 안세규가 짜 둔 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군요.”
견하의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