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1)
벨리사리오스는 마르코 폴로를 놓쳐버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본다.
“흠.”
잡았다고 생각했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손아귀에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도 자신의 손을 풀려 애쓰며 캑캑거릴 것이었다.
“역시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벨리사리오스는 자신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신종의 경지에 오르는 중이라 여겼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이나 이단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과 접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마르코 폴로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는 말이지.”
「쿠빌라이 문서」. 그 이름 때문에 처음 탐구에 뛰어드는 자들은, 쿠빌라이 카간이 모든 작업을 주도했으리라 오해하곤 한다.
물론 쿠빌라이 카간이 가장 큰 후원자인 건 맞다. 그러나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고,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정리하고, 다시 봉인하는 과정을 주도한 자는 마르코 폴로다.
「쿠빌라이 문서」는 종이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간이기도 했고 석판이기도 했으며, 혹은 유적의 벽화, 각종 유물에 적힌 간략한 시구이기도 했다. 그토록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그 모든 것에는, 마르코 폴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를 외면하고 「쿠빌라이 문서」를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봉인을 풀거나 문서를 해석하는 과정에 필요한 단서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코 폴로를 이해해야만 하지.”
「쿠빌라이 문서」의 봉인은 이른바 ‘마법적 처리’를 거쳤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단’에 대한 이론이 정립되기 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초능력을 모두 마법이라 불렀으니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다.
봉인의 해제, 숨겨진 문구의 발견뿐만 아니라, 문서를 감춰 둔 사원 등 유적지로 진입하는 데에도 이단의 힘이 꼭 필요했다.
어째서인지 그런 유적에는 꼭 파멸인이나 신종의 씨앗도 함께 있어, 섣불리 일반인을 들여보내면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내곤 했으니까.
게다가 그 일반인들은 이단 연구에 있어 핵심 인력이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잃으면 병사 하나를 잃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대체 왜 그런 괴물들이 유적 안에 함께 봉인되어 있었는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봉인된 「쿠빌라이 문서」의 특이한 성질이, 봉인 후에 그런 것들을 소환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쿠빌라이 문서」를 봉인할 때 ‘함께’ 봉인된 것일까.
전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벨리사리오스는 어쩐지 후자로 마음이 기울었다. 방금 마르코 폴로의 그림자, 혹은 환영 비슷한 것을 움켜잡았기에 더욱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몰랐다.
통성명도 하지 않았지만 벨리사리오스는 그가 마르코 폴로라고 확신했다. ‘마르코 폴로’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눈에 또렷하게 떠오르던 당혹의 감정.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무대 뒤의 모습이 들통난 배우의 당혹감과도 같았다.
“그런 걸 무수히 다루어 왔다면 결국은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될 수밖에.”
봉인을 풀고 주변의 괴물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위험이 끝나는 게 아니다. 「쿠빌라이 문서」의 원본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다. 그것들은 파멸인이나 신종의 씨앗에 접촉하는 것과 똑같은 영향을 인체에 끼친다.
그렇기에 해독이 끝난 「쿠빌라이 문서」는 원본이 아닌 사본으로 보고가 올라온다.
“문서가 적힌 물질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 그 자체가 비슷한 효과를 일으키지.”
사람이 끝내 외면하고픈 진리를 담은 것이 「쿠빌라이 문서」다. 그 진리를 읽는 것, 진리를 집필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은 혁세주나 신종의 씨앗을 정면에서 본 것과 같은 타격을 입는다.
게다가…….
“봉인 과정을 생각하면 저런 식으로라도 살아 있는 게 기적이야.”
이제는 ‘기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지만, 벨리사리오스는 그렇게 평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록에는 서방 교회의 방식으로 「쿠빌라이 문서」의 신비를 봉인했다고 묘사된다. 쿠빌라이 카간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러나 연구 결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서방 보편교회, 이른바 가톨릭의 방식으로 봉인된 문서도 있다. 동방 정교회, 오서독스의 방식으로 봉인된 문서군도 있고.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카간의 사망을 전후해서 봉인한 ‘최후의 문서군’은 다르다.
“상당히 이교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비종교적이라고 해야 할지…….”
마르코 폴로가 취한 봉인의 방식은 혁세주교와는, 혹은 종교 전반과는 철저히 반대 방향에서 접근한 것이었다.
신의 전능함과 그에 대한 신앙에 기대는 종교적 봉인 방식은,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의식의 가장 밑바닥부터 모든 부담을 신에게 돌리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택한 방식은 신의 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대 유럽인이 신앙을 부인하려면 꽤나 고생했을 것 같은데.”
신앙은 품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신이 존재한다, 영혼이 존재한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종교든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 모든 고정관념을 머리에서 떨쳐낸다는 뜻이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 온 모든 기반을 부정하고 오로지 지적 능력에만 의존하여 새로이 삶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오로지 ‘인간’으로서, 다른 신비한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두 발로 세상에 서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 봉인의 모든 부담을 진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함’에, ‘영혼의 존재’에 맞서야 한다. 부러워하지 않고, 갈망하지 않고.
인간인 자신이 단순한 고깃덩이임을 인정하면서도, 혁세주나 신종 같은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쿠빌라이 문서」의 내용을 정리, 집필,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몸을 초월해가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게 되어가면서도 자신은 인간이라는, 그런 중심 잡기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 모순된 상황 속에서도 일정한 형체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마르코 폴로의 정신만큼은 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하긴 그러니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지.”
그 어떤 신성함도 아닌, 인간인 자기 자신을 봉인의 터전으로 삼는 방식. 그런 방식으로 마르코 폴로는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한 방랑자가 되었다.
동양의 이단 연구자들이었다면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이’를 굳건히 지키고 ‘기’를 극한까지 펼쳤다, 고 평했을까.
벨리사리오스는 마르코 폴로의 목을 잡았던 손을 몇 번 쥐었다 펴 보았다. 아쉬움이 남는다.
그 라틴인을 제대로 잡았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전 지구상에서 얻은 것보다 더 많은 「쿠빌라이 문서」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아까 전 생각을 다시 이어 나가보자.
마르코 폴로와 동료들이 ‘일부러’ 유적 안에 신종의 씨앗이나 파멸인을 배치해두었다면, 그것이 대체 어떤 의미일지.
“‘경고’일까?”
「쿠빌라이 문서」에 적힌 쿠빌라이 카간 본인의 말도 그렇고, 「문서」에 일관된 언급이나 제작 의도를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크다.
“이 괴물들은 이토록 위험하다. 세상을 멸망시킬 만큼 위험하다. 그러니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는 이들은 조심하라. 혹은 이것들로 인해 세상에 위험이 닥쳤을 때, 구할 수단을 강구하라.”
지난 칸발리크 사태는 ‘세상이 멸망할 만큼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괴물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특징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상황.
그러한 상황은 고려와 아즈텍에서도 한 번씩 있었다고 한다. 인류는 기록에 남은 세 번의 위기를 모두 극복했지만, 네 번째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세속적이기 짝이 없는 벨리사리오스도 그런 인류 멸망 사태는 우려된다.
그의 야망은 인류의 번영에 기반을 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괴물이 되거나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면 야망 이전에 그걸 이룰 토대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사업가의 욕망과 정치가의 야망은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사업가는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면 토대가 사라지건 말건 이윤을 탐욕스럽게 추구한다. 이들은 경제란 결국 사람 사이의 시스템이라는 걸 곧잘 망각한다. 아무리 수완이 좋은 사업가도 신, 괴물, 짐승과 함께 경제를 꾸려나갈 수는 없다.
정치가는 사람이라는 토대를 망각하지 않는다. ‘표’를 얻어야 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다. 극악무도한 독재자도 결국 그 독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따라서 정치가는 어떤 이념을 내세우든, 토대를 지키기 위해 ‘선을 넘는’ 사업가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벨리사리오스의 야심은, 일반적인 정치가와는 다르다.
바로 그 차이가 벨리사리오스에게 흥미로운 생각을 불어넣었다.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앞선 실패’를 만회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네 번째는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또 극복할 가능성도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혁세주는 다른 세상의 인류가 처절한 실패를 겪은 결과물이라고 한다. 파멸인은 실패의 결과 ‘이’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인류라 한다.
무엇을 실패했는가.
육체에 영혼을 품으려다 실패했다.
모든 인간을 이단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벨리사리오스 자신의 야망……. 이것은 마치 이전 세상의 실패를 참고하여 만들어낸, ‘수정본’ 같지 않은가?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는 점에선 같다.”
그렇다면 그들이 했던 것을 연구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들이 갔던 길을 탐구하고, 그들이 범한 실수를 피해서 나아간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혁세주’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에도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벨리사리오스는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쿠빌라이 카간과 마르코 폴로는 그토록 많은 경고를 남겼건만, 세상은 이단의 군사적 활용에 혈안이 되어 있다.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욕은 끝내 이단을 인위적으로 양성해내는 데 이르지 않았는가.
자신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야망을 위해 전 인류를 건 도박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은 다른 나라의 연구진들에 비해 한 발짝 앞서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신종을 붙잡지 않았던가.
자신이 멋대로 붙인 이름이지만, 어쨌든 ‘데우스’라는 이름의 신종을.
벨리사리오스는 회의실을 떠나, 이 연구소 안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뇌리에, 데우스를 포획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찌 잊겠는가. 사람 사이의 일도 강렬한 것은 결코 잊히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이 신을 잡은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