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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67화 (367/541)

영겁종말(6)

“그러니까 그 말은, 아즈텍이 정말로 ‘태양이 사라졌던’ 시절을 겪었고, 그것은 혁세주의 출현이었으며, 인신 공양으로 효과를 봤기에 그 야만적 풍습을 유지했다는 뜻인가?”

“네.”

“인신 공양이 혁세주를 물리치는 방법이었다면……. 우리는 고려와 몽골에서도 같은 방법을 통해 혁세주를 물리쳤다고 가정할 수밖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는 민감한 정치적 문제이기도 했지만, 소름 끼치는 상상이 그들의 머리를 관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도 각종 연구를 하면서 온갖 험한 꼴은 다 봤다. 그러나 아직 ‘인신 공양’이라고 할만한 조직적인, 오로지 대상자의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의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만큼 썩어 문드러지진 않았다.

“……그 문제는 정치권이나 첩보 분야에서 다뤄야 할 문제겠지. 다음으로 넘어가게. 첫 번째는 무엇이지?”

오직 벨리사리오스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저 ‘연구원들의 사기에 좋지 않다’는 점만 생각해 화제를 전환했다.

먼저 발표하던 연구원이 황자의 말에 서둘러 서류를 뒤적였다.

“첫째는 바로, 고려의 초기 수도인 개경입니다. 당시에는 송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고려가 건국되기 전입니다. 고려 왕조의 전신인 신라 후기의 일입니다.”

“또 고려인가? 그 사람들 혁세주와 정말 인연이 많군.”

벨리사리오스는 그 이상의 말은 아꼈다. 고려를 ‘문명인 척하지만 인신 공양을 마다하지 않는 야만’이라 매도해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나눠드린 자료를 함께 봐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동안, 회의실에선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혁세주가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때는 혼자서만 넘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파멸인의 출현 빈도도 높아지며, 신종의 씨앗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는 혁세주 출현의 전조 증상이기도 하지만, 혁세주 출현 이후에는 더욱 높아지는 듯합니다.”

그럴 수밖에. 혁세주가 출현하는 것은 세상의 경계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세주의 출현은 세상의 경계를 더욱 옅게 한다.

두꺼운 옷감 안으로도 사막의 먼지는 끝내 들어오고 말듯이, 그 괴물들도 여기저기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종의 씨앗은 ‘문’의 역할을 해 다른 세상의 파멸인들을 계속 이곳으로 들여보낸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혁세주의 출현 시에는 ‘신종’의 출현 빈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갑니다.”

혁세주가 세상의 틈새로 들어오지 않으면, 신종은 기껏해야 무당이나 광인의 예민한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포획’한 신종도 혁세주의 출현 때 들어왔다고 봐야겠군.”

세 번째 사례인 칸발리크 때는 아니다. 벨리사리오스의 손아귀에 있는 신종은 그 전에 포획되었다.

“첫 번째 사례에서, 저희는 당시에도 신종의 포획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호오, 하며 벨리사리오스의 눈이 빛난다. 자신 이전에 신을 끌어내려 본 사람들이 있었다니. 그들은 어떻게 신을 잡았을까. 신을 잡아서 어떻게 했을까. 신에게서 무엇을 얻어내려 했을까.

“당시는 고려 제1 제국의 성립 전, 신라 시대라고 합니다만…… 신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움직임은 이미 태동하고 있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무력으로 통합하고 삼한을 일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쪽의 발해가 고구려가 5세기부터 쓰던 이름인 ‘고려’를 국호로 삼았던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의 통합은 불완전했다.

“멸망한 옛 왕국, 고구려 혹은 고려 및 백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움직임의 한 축을 이루었던 게 이후의 고려 황실입니다. 당시에는 변방의 영주에 불과했습니다만.”

“그런 역사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때 고려 황실의 선조들이 혁세주를 물리치고 신종을 포획한 주역이라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 혁세주를 불러온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벨리사리오스의 눈이 조금 커진다.

“어째서지?”

“고려 황실의 선조들에겐, 옛 고구려 왕국을 부활시킨다는, 아니 그 이상의 제국을 건설한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발해라 불리는 대 씨 왕조의 고려도, 옛 고 씨 왕국의 고구려도 북쪽과 남쪽을 아우르는 진정한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위업을 이룩하려면,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통상적인 이단의 몸으로도 어렵겠다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신’을 포획하여…….”

거기서 연구원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벨리사리오스의 재촉하는 듯한 고갯짓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 혈통을 자신의 가문에 섞으려 들었습니다.”

벨리사리오스의 눈은 아까보다도 더욱 커졌다. 진정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종과의 혼혈?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인간의 몸으로 신의 피와 살을 품으면 그대로 파멸인이 될 뿐입니다만, 당시 고려 황실의 시조, 작제건이라는 인물은 발상을 달리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신이 인간의 피와 살을 품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죠.”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 지혜로워.”

“고려 황실의 공식적인 건국사는 이러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당시 목격자들이 비밀리에 사원의 숨겨진 벽면에 남긴 기록이나, 개경 일대에 남은 흔적을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하면……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혁세주가 세상에 강림하면 그 지역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고작 천년 정도의 세월만으로는 지울 수 없다. 칸발리크에도 비슷한 흔적이 남을 테지. 마치 큰 상처가 아문 흉터처럼.

“중요한 점은, 우리가 고려 황실의 선조들이 했던 방식을 활용해 전하께서 바라시는 결과에 더욱 근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욱 집중한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반드시 들어둬야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 황실에선 유독 보통의 이단보다 더욱 강력한 이단이 나오지.”

“현 고려 황제 폐하도 그렇듯이 말입니다.”

왕서라, 혹은 루우 테무르가 거대한 신수(神獸)를 드러내 고려 내전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건.

그 일 이후, 이단을 통한 자국의 군사력 강화를 바라는 자라면 누구나 그녀의 강함을 파악해두고 있었다.

“고려 황제 폐하의 강함은 이단을 넘어서서 신에 근접했기 때문인가.”

벨리사리오스의 감탄에는 부러움이 섞였다. 세상 어느 존귀한 가문에나 어두운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황자가 속한 류리크-팔레올로고스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벨리사리오스는 고려 황실의 선조들이 신의 혈통을 얻을 때, 그 방식이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아쉬워하는 것은 당장 자신이 그런 방법으로 힘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내 후손들, 전체 인류에 비하면 한 움큼도 되지 않는 인간 무리를 강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야.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전체 로마인이 이단의 경지에 올라서길 바란다. 물론 그 이상도.”

벨리사리오스가 새삼 자신의 목적을 입에 담자, 회의실 안 모든 연구원이 공손히 그에게 주목한다. 각자의 세세한 목적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벨리사리오스의 이상에 동의하기에 여기서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군. 과정은 어렵겠지만, 이상의 사실을 토대로 기존의 목표보다 더욱 높은 목표를 잡을 수도 있겠어.”

모든 인간의 이단화.

그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벨리사리오스는 그 선을 훌쩍 넘어버렸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신종에 근접하는 것.

그것은 혁세주를 만들어낸 세상이 목표로 했던 바로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전 인류가 영혼을 지니고, 죽음을 극복하거나 죽음 이후의 삶을 누리는 것.

그렇기에 나는 벨리사리오스의 야망이 위험하다고 했다.

“좋다. 모두 물러가도록. 결과를 독촉하진 않겠지만, 모든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

벨리사리오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예를 표하고 방을 나갔다.

나 또한 여기까지 관찰하고, 벨리사리오스가 포획했다는 신종을 관찰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옮겨가려 했다.

그 순간.

벨리사리오스의 눈이 똑바로 ‘나’를 향했다.

그가 나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건만, 나는 그 순간 ‘당황’이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가 나를 향해 똑바로,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나는 그를 피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다가오는 시간, 그와 가까워지는 공간에서 도망친다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벨리사리오스는 오른팔을 뻗어 내 목을 움켜잡았다.

‘숨이 막혔다’.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감각이다.

벨리사리오스는 비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본다.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 이렇게 잡힐 줄이야. 나를 그저 이단으로만 본 게 아닌가? 라틴인.”

그도 강한 이단이기는 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간 떠돌던, 세상의 표면에서 끌어당겨 지는 감각. 강제로 시공간을 초월한 자리에서 뜯겨나오는 느낌.

“고려 황실의 방식으로만 신에 근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보다는 가깝지 못할진 몰라도, 훨씬 안전한 방식으로 이단을 초월할 수 있지.”

벨리사리오스의 머리 위에 하얗게 빛나는 가시면류관이 떠오른다.

등 뒤로는 다섯 쌍, 즉 열 장의 날개가 솟아나고, 그 날개마다 눈알이 붙어…… 모두 나를 노려본다.

천사…… 아니 그마저도 초월한 신의 위용이 아닌지.

그는 대체 무엇이 된 걸까. 나는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 걸까.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문서」의 봉인자. 정말 궁금했다네.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지금 어떤 상태일지, 어떤 비밀을 캐낼 수 있을지.”

벨리사리오스의 얼굴이 바짝 다가온다. 비웃음에 달래는 듯한 친근함을 섞은 표정을 짓고서.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만났군. 내게 협력해주지 않겠나? 그렇다면 나도 그쪽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하지.”

***

나는 ‘내’가 벨리사리오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강제로 추락한 경우를 ‘관찰’한다.

그것은 내가 허풍선이 늙은이로 유럽에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처럼,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거기서 또 멀리 떨어진 시간을 보면, 끝내 모든 인간이 파멸을 맞이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세상의 진정한 비밀을 밝혀내는 데 실패한 경우.

고려든 신성 제국이든 어떤 나라든, 끝내 벨리사리오스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경우이기도 하다.

세상은 또다시 붉은 살점과 내장으로 뒤덮여, 이가 붕괴한 인간의 비명만이 가득 찬 곳이 되어버린다.

혁세주는 다음 희생양을 찾으러 세상들의 표면들을 미끄러져 간다.

그렇다.

내가 세상의 중요한 국면에 관여해서 인류를 구원하는 결말은 없다. 관측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내가 직접 나서서 뭔가를 하려 들면, 혹은 강제로라도 육신 있는 인간으로 떨어지면……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내가 영웅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저 세상의 표면에서, 무수한 멸망만을 관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것이 영겁종말.

나는 그 사이에서, 나 이외의 누군가가 인류의 파멸을 막아낼 가능성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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