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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66화 (366/541)

영겁종말(5)

저들은 어떤 명확한 목적을 품고 이 세상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둑의 틈으로 새어 들어오듯, 당연히 이 세상 경계가 허물어진 부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아직은, 살덩어리 외에는 그 어떠한 형태도 취하지 않는다.

작제건은 한 번 더 시위를 당긴다.

또 한 번 빛의 기둥을 얻어맞은 혁세주는, ‘박동’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행위를 했다.

그것은 혁세주를 지켜보는 모든 인간의 심장에 직접 와닿는 고동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발광하고, 이단도 두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그러나 작제건은 흔들림 없이 서서, 혁세주를 노려보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파멸인 백여 개체가 혁세주의 고동에 응한다. 그것들이 장대 아래로 몰려들었지만 작제건은 눈길도 주지 않고 하늘에만 시선을 던졌다.

그가 잔인무도한 인간인 것은 틀림없으나, 과연 새로운 황실의 시조가 될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늘을 떠다니는 신종들이, 이제 꾸물거리며 뭔가 형태를 취하려 한다. 그 형태는 처음엔 파멸인을 거대하게 만든 것 같았다.

작제건의 두 번째 공격은 혁세주를 겨냥했다기보다는, 저 신종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더 컸다.

이 지상에 작제건이라는 인간이 있다는 외침이었다.

신종들의 변화는 작제건의 그와 같은 외침에 반응한 것이었다.

콧구멍을 만들고, 입과 이를 만들고, 안구를 만들고, 지느러미와 팔다리를 만든다.

하늘에서 정신없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하얀 살점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기괴함 속에도 뭔가 익숙한 것이 있다.

저 영혼 덩어리는 열심히, 지상의 생물들을 닮고자 버둥거린다.

신종들이 만들어가는 신체 기관은 모두 이 지상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 신을 닮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들이 인간에, 지상의 생물들에 응하여 닮아간다.

혁세주가 지상을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으로 바꾸어나가는 것과 반대로, 신종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적응한다.

육체가 영혼을 닮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를 닮는 것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신은 인간과 세상 만물의 창조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성스럽지도 않다. 저것은 그저 지상의 생명들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외계종일 뿐이다.

영혼이라는 것도 영원한 삶을 바라는 우리 인간이 신종을 보고 멋대로 상상한 것일 뿐, 실상은 저 이질적인 외계종의 육체를 구성하는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토록 이질적인 것을 지상의 육체에 쑤셔 박으려 들면, 당연히 육신의 원리가 붕괴할 수밖에.

영혼을 얻으려 들면 파멸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다만…….

“육체의 안에 영혼을 넣는 방식이 안 된다면, 밖에서 해결하면 된다.”

마치 이 활처럼 말이지, 하고 작제건은 중얼거린다. 자신의 발상에 감탄하는 듯하다.

그의 눈이 하늘을 헤맨다. 당황한 게 아니라 뭔가를 찾고 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멈춘다. 찾던 것을 찾은 모양이다.

신종 중 하나가 용과 같은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작제건은 그것을 향해 세 번째로 시위를 당겼다.

적중.

혁세주를 밀어낼 위력의 일격이니만큼, 그것에 직격당한 신종이 어떤 꼴이 될지는 말할 것도 없다.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져 지상으로 추락한다.

“륭아!”

작제건이 아들 왕륭의 이름을 소리높여 불렀다. 왕륭이 즉각 병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아버지의 장대로 접근하려 한다.

병사 10여 인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모두가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이단이다. 장대 주변에 몰려든 파멸인 100여 개체를 베어내면서도 기세가 줄지 않는다.

“여기가 아니다! 방금 추락한 신룡 쪽으로 가라! 여기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왕륭과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작제건이 가리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이다. 명령에 대한 불복은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실력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혼자서 충분하다면 그런 것이다.

작제건은 장대 아래 파멸인들을 보며 비웃었다.

“너희 버러지들 따위야 대장의 목을 꺾으면 흩어질 무리에 지나지 않지.”

네 번째 활시위는, 혁세주 너머 하늘을 겨냥했다.

검붉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캄캄한 밤보다도 더 어두운 무언가를 향해.

이제껏 없던 기세로 작제건의 어깨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장신인 그의 몸이 더욱 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아까보다 훨씬 더 오래 시위를 당긴다. 그러면서도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다.

활로 태양을 떨군 신화 속 영웅처럼, 작제건은 검은 태양을 겨냥한다.

앞선 세 번의 화살보다도 더욱 강력한 공격이, 허공을 질주했다.

소리가 큰 것을 넘어 아예 세상의 소리를 지워버리듯이, 혁세주의 박동마저도 덮어버릴 기세로.

모두의 귀와 심장을 뒤흔들며 화살이, 빛의 기둥이 검은 허공 너머의 무언가를 향해 사라졌다.

작제건은 이(理)를 겨냥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괴물이 활보하는 데에도 원리가 있다. 혼돈은 혼돈이 발생할 원리가 있기에 일어난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일어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작제건은 그 원리를 쏘았다. 혼돈이 혼돈으로 있기 위한 원칙마저도 깨뜨리는, 진정한 혼돈을 불러오는 화살로.

1930년의 칸발리크에서 그러하듯, 혁세주는 송악의 하늘에서 물러났다.

아니, 작제건이 파괴한 원칙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나갔다.

이런 방식은 작제건이기에 가능하지, 미래의 주견하나 루우 테무르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파멸인들이 몸부림친다.

세상의 원리는 그들 역시 강제 퇴거한다. 그러나 그들은 날아올라 하늘에 닿을 수 없다. 그러니 녹아내리는 수밖에.

물론 혁세주의 퇴거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저것은 멸할 수 없다. 저것은 멸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멸해진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여하튼.

일이 끝나고, 왕륭과 병사들이 거대한 수레에 무언가를 실어 왔다.

작제건이 신룡이라 부른 신종 하나는 생각보다 타격이 컸는지, 몸 절반 이상과 다리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기에 수레에 실린 신룡의 몸은 하늘에서의 인상과는 달리 작았다.

장대에서 내려와, 신룡을 훑어보던 작제건이 입을 열었다.

“용은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신 역시 그러하다지. 아까 하늘에서 본 것처럼 용의 형상을 취할 수 있다면 사람의 형상을 취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 신이 사람이 되게끔 하신다는 겁니까?”

“하늘에서도 떨어뜨리는 데, 못 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인간 여인처럼 길러낼 것이다. 자식을 배고 낳을 수도 있게끔.”

그렇게 말한 작제건의 강렬한 눈빛이, 왕륭의 눈에 닿는다. 왕륭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직감한다.

영혼을 사람의 몸에 직접 담을 수는 없다. 영혼을 몸 밖에서 무기로 운용하는 이단의 방식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다. 작제건 같은 예외도 있지만.

어쨌든 작제건은 왕륭을 자신 같은 강력한 이단으로 키워내는 대신, 보다 효율성 좋은 방법을 모색했던 것 같다.

영혼을 사람의 몸 밖에 두되, 결국에는 사람이 영혼을 얻을 방법을.

사람이 직접 신이 될 수는 없으니, 신종으로 하여금 사람의 아이를 낳게 한다.

“아버지……!”

저더러 사람이 아닌 것과 자식을 낳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라는 항변은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삼킨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만을 드러낸다면, 작제건은 자신을 후계자 자리에서 내치고 말 것이다. 왕륭에겐 동생 왕평달이 있다. 아버지는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

“내가 직접 용을 부인으로 취하지 않는 것은, 너를 자식으로, 후계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용을 부인으로 취한다면 너와 너의 형제, 너의 어미까지 살려둘 수 없다.”

용과 용이 낳을 자식에게 왕륭은 위협이 될 테니까. 작제건은 자신의 직계, 자자손손 이어질 후계자들에게 용의 피가 이어지길 바란다. 왕륭이 용의 피를 거부한다면, 그에게 더 이상의 쓸모는 없다.

“오늘 일은 한바탕 붉은 꿈이다. 너는 꿈에서 이 신비한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몽(夢)부인이라 하거라.”

딱 거기까지, 왕륭이 몽부인을 만난 고려 건국신화의 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난 후, 나는 그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떠나는 중에 아주 잠깐, 커다란 용의 뿔을 단 소녀를 보았다. 그것은 작제건이 그녀를 하늘에서 떨어뜨리고 나서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의 모습이었다.

묘한 슬픔이 담긴 소녀의 얼굴은, 어딘가 천년 뒤의 루우 테무르를 닮아 있었다.

***

1932년, 콘스탄티누폴리.

여기에선 천년 전 고려 황실이 탄생하던 때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

아니, 좀 더 위험하고 강렬한 욕망의 냄새가…….

이곳의 황자 벨리사리오스는 신종 하나를 자신의 연구소에 잡아두고 있었다.

그의 발상은 작제건이 생각해낸 바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을 지향한다.

작제건이 신을 포획해 그 피를 직접 자신의 가문에 섞었다면, 벨리사리오스는 포획한 신의 은총을 가능한 많은 인간에게 확대하려 한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인류를 도약시킬 수 있길 바라면서.

하얀 가운을 걸친 수많은 연구원이 벨리사리오스 주변을 돌아다닌다. 벨리사리오스는 직접 실험에 참관하기도 하고, 보고를 받기도 하고, 서류를 검토하기도 한다.

내가 관찰하려고 고른 시간과 공간은, 벨리사리오스가 어느 넓은 회의실에서 연구원들의 발표를 듣는 자리였다.

“혁세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년 전 칸발리크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람들에겐 ‘뇌’가 있다. 뇌가 있는 이상 사고할 수 있고, 주어진 단서를 바탕으로 사고한 끝에 완전하진 않아도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적, 신화적 기록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남은 흔적들을 종합한 결과, 우리는 최소 세 번의 혁세주 출현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소 세 번이다. 내가 굳이 관찰하지 않은 것들이 있지만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인류는 언제 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롭게 지표면에 붙어 있군.”

벨리사리오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자, 연구원 역시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류가 그 모든 위기를 돌파해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연구원은 다음 위기에도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긍지를 품고 연구에 임하는 듯하다.

“세 번이라면 각각 어떤 경우지?”

“세 번째는 다들 아시는 1930년의 칸발리크 위기입니다. 이때는 고려와 몽골 정부가 서로 협력해 혁세주를 세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죠.”

연구원은 다른 연구원을 향해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연구원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이 맡은 부분을 말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14세기, 혹은 그 이전 아즈텍입니다. 이때의 충격은 아즈텍을 비롯한 주변 문명에 큰 상처를 남겨…… 다시는 태양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인신 공양을 반복하는 풍습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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