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종말(4)
단언하는 듯한 말에, 왕륭의 어깨가 움찔한다. 평생을 신궁(神弓), 그것도 동명성왕에 비견된다는 명성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 그런 아버지보다 왕륭의 얼굴은 심약해 보인다.
그러나 그도 훗날 황제의 아버지가 될 자. 아직 젊고 경험이 없어 다가오는 난세에 위압감을 느낄 뿐, 야심은 가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렇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번에도 이 인간들을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다.
야심은 호기심으로 변하여, 이 청년으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물음을 던지게 한다.
“신라는 번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신라가 망한다 확신하십니까?”
자신의 말을 자르듯 들어온 질문이지만, 작제건은 아들의 물음에 그닥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후계자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친다는 듯, 무게를 담아 당부하듯 말했다.
“번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나라의 흥망을 결정한다.”
왕륭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작제건은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은 오래도록 바다를 누비며 부를 거머쥐어 왔다. 동으로는 일본부터 서로는 천축에 이르기까지. 반대로 먼 대식국 사람들이 우리 앞바다까지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보이는 것이 있지. 무엇인지 아느냐?”
왕륭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작제건은 답을 꺼냈다.
“부의 흐름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걸 보게 된다.”
작제건은 손을 들어 검은 바다를 가리켰다.
“어떤 나라가 언제 전성기를 맞이하는지 아는 자는 거의 없다. 나라의 국력이 쇠하면 멸망한다는 분명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만, 흥하면 어디까지 흥하게 될지…… 그 한계가 잘 보이질 않지. 그럴 때는, 부의 흐름을 보면 된다.”
해외에서 흘러들어온 부는 쌓인다. 일정하게 쌓인 부는 곧 흘러갈 곳을 찾는다.
“어디로 흘러갈지를 정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데 서라벌은 어떠한가. 어디로 흘러가게 한 것 같더냐.”
왕륭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서라벌 안에서만, 진골들 사이에서만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내가 신라가 망한다고 한 이유이자, 너에게 용건이라는 이름 대신 ‘왕’이라는 성씨를 새로 지으라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아버지. 진골들이 부를 독점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 같은 성주와 장군들도 각자의 지역에서 부를 독점해왔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곧 망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를 즐기는 것과 부를 쓸 방향을 통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내가 얻은 부는 어디로 가더냐. 내가 매일 비단과 보석을 모으고, 허리띠를 차고 가죽을 걸치고 관을 쓰더냐? 아니면 병졸들의 급료를 지급하고,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사고, 군량을 모으더냐?”
후자다. 왕륭은 그제야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듯하다.
“나는 해안과 강변의 습지를 다지고, 산과 언덕을 깎아 농지를 늘리며, 보를 쌓아 가뭄에 대비하는 데 돈을 쓴다. 그렇게 늘어난 농지에 새로 정착하는 농민이 있다면, 그가 곡식을 거둘 때까지 지원하는 데 돈을 쓴다. 그렇게 해서 부는 더 큰 부를 데려오는 것이야. 늘어난 백성들 중 장성한 이들은 새로운 군사가 되는 게고. 이것이 ‘흥하도록 부의 흐름을 조정하는 것’이다.”
“허나 서라벌의 진골들은…… 금은보화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부를 낳지 못합니다.”
이해했다는 듯한 아들의 말에 작제건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신라의 변방인 이곳 송악, 한낱 성주의 아들도 이해하고 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왕과 진골들이 행하지 아니한다. 그 나라가 오래 갈 것 같으냐?”
신라는 삼한을 일통했다. 그런 그들이 승자의 권리로 부를 쌓아 올리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부를 ‘다음에 얻을 더 큰 부’를 위해 쓰지 않는다면, 지금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에 만족해버린다면 거기서 나라의 한계는 결정되고 만다.
“그런 작자들이 건방지게도 고려가 쓰던 ‘태왕’을 참칭하고 있다. 자격 없는 자들이 태왕을 칭한다면, 내가 하지 못할 게 무엇이냐. 내가 새로운 동명성왕이 되지 못할 게 무엇이냐. 혹은 내 아들이, 혹은 내 손자가 하지 못할 게 무엇이냐.”
왕륭은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야심을 목구멍 안쪽으로, 가슴 속으로 삼킨다. 북국의 대씨가 고려를 칭하는데, 왕씨의 고려를 세우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작제건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 이제 우리 가문에 나라를 얻을 힘을 부여토록 하자!”
작제건의 선언은 포로들에겐 죽음의 선고이기도 했다. 병사들이 포로들 옆으로 다가선다. 포로들의 흐느낌이 비명과 통곡으로 변했다.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작제건이시여! 제발……! 그만하시오! 작제건이시여! 안 됩니다……!”
귀를 때리는 폭풍의 소리마저도 가르고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작제건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초라한 승려 한 사람이 넘어질 듯 달려오고 있었다. 사병들이 다가가 승려의 앞을 가로막았다.
“늙은 여우가 왔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제건은 승려를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 비슷한 조롱을 던졌다.
“요승(妖僧)이 오셨구려! 이토록 경사스러운 날에 또 무슨 요사스러운 말로 자리를 어지럽히러 오셨는가?”
“경사라니요! 사람을 죽여 제물로 바치고, 하늘의 도를 어그러뜨리는 참혹한 의식의 어디가 경사란 말입니까! 당장 그만두십시오! 작제건!”
사병 중 급이 높은 자가 눈빛으로 작제건에게 묻는다. 벨까요?
하지만 작제건은 고개를 저었다.
“스님께서 몹시 흥분하신 모양이니 밧줄로 단단히 묶어 뫼시어라. 혹여 거친 바람에 날아가실까 걱정이구나.”
명령이 떨어진 즉시 병사들이 승려를 결박해 무릎 꿇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작제건의 명령이 이어졌다.
“스님께서도 오늘 일을 똑똑히 보실 수 있도록 고개를 받쳐드려라.”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손이 승려의 머리와 턱을 붙잡고 강제로 들어 올렸다.
그 덕에 승려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이 무고한 사람들의 가슴을 찌르는 것을.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끄집어내는 참혹한 광경을.
즉사한다면 차라리 복이 있는 것이다. 심장이 뽑히고도 한동안 멍한 얼굴로 주변을 보며 고통과 공포를 그대로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승려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슬픔도 잠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얀 살덩이들을 운반해오는 병사들을 보며 승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작제건은 만족스럽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설명 아닌 설명을 늘어놓는다.
“구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스님. 먼 옛날 무당들의 동굴부터 일본의 깊은 숲속 사당에 이르기까지 뒤져서 겨우 백 덩이를 구하지 않았겠습니까.”
“멈추시오……! 멈추시오, 제발……! 저게 사람을 어떤 괴물로 만드는지 잘 알지 않소!”
“세상의 경계란 흐릿한 법이라 우연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들이 넘어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아예 세상의 문을 열어젖혀 그들을 불러와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무당들이 말로만 떠드는 것을 현세에 드러내렵니다.”
포로들의 심장이 비어 있는 자리, 거기에 병사들이 하얀 살덩이를 채워 넣는다.
살덩어리들이 맥동한다. 마치 죽은 자들의 심장을 대신하기라도 할 것처럼.
포로들의 사지가 발작하듯 뒤틀린다. 그들의 벌어진 입에서 손이 튀어나온다. 혹은 발이 튀어나온다. 새로운 머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파멸인이 되어 간다.
“다들, 스님을 모시고 멀리 물러나거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처리하마.”
작제건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활을 ‘소환’했다.
아직은 ‘이단’이라는 개념이 잡혀 있지 않던 시대. 그렇기에 작제건은 그저 ‘신궁’이라고만 불렸다. 그러나 작제건은 활을 잘 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파멸인 백여 개체.
그것들이 ‘머리’에 해당하는 것을 들어 하늘을 향해 자신들만의 찬송가를 바친다.
이 모든 참상이 가능하도록 해주신 그들의 주께.
검붉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세상의 주인께.
아, 저 부서진 지표면 같은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저것의 모습은 저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했는지 암시하면서, 저것이 완전히 들어오면 우리 세상이 어떻게 될지도 암시한다.
이미 사람의 감각을 벗어났으면서도, 그리고 내가 사람으로서 살던 시절에는 지나가 버린 일을 ‘관찰’하는 것이면서도,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론가 끌려가며 승려가 소리를 지른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작제건! 당신의 탐욕이 세상을 망가뜨릴 것이야!”
“아니, 우리는 세상을 구할 것이다. 우리 일족의 통치 아래 멸하는 것은 신라뿐. 세상은, 백성들은 우리로 인해 극락으로 한 걸음 더 옮겨갈 것이다.”
똑같다. 이로부터 천년 뒤에 또 다른 야심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승려의 목소리는 이제 발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신만이 신궁은 아니야! 또 다른 활(弓)이 서라벌에 예비되어 있다! 그 아이가 너희 일족의 숨통을 끊고 네가 그토록 바라는 고려의 태왕이 되고야 말 것이다!”
작제건은 승려의 저주를 깔끔하게 무시해버렸다. 이제 한낱 승려에게 신경을 기울이기보단 눈앞에 나타난 것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여유롭게 냉소와 위엄을 드러내던 그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었다.
활을 들고, 활시위를 당기는 동작을 취한다.
동작을 취할 뿐이다. 그가 소환한 활에는 시위 따위는 없으니까. 그러나 작제건의 동작을 따라 활은 구부러지고, 그의 오른손부터 왼손에 걸쳐, 가슴팍을 가로지르며 기다란 빛의 화살이 맺힌다.
화살을 놓는다.
빛의 화살은 쏘아 올려지지 않는다. 화살은 그 궤적을 추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혁세주에게 직격했다.
분명 화살을 쐈건만, 빛줄기의 굵기는 작제건의 장신에 필적한다. 마치 작제건 자신을 쏘아 올리기라도 한 듯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이 신궁의 화살은 그대로, 혁세주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서 벗어난 나에게 ‘처음 알게 된’ 것은 없지만, 그런데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일반인보다는 훨씬 강한 이단. 그러나 일개 인간의 몸으로, 신의 영역에 도달하지 않은 채로도 혁세주를 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작제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것은 어려운 적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한 데서 오는 미소가 아니었다.
혁세주는 세상과 세상의 틈새를 열고 그 육중한 몸을 밀어 넣는다.
그런데 그 몸을 억지로 밀어낸다 해도, 틈새 자체는 남는다.
그 틈새로, 지금껏 세상에 간접적으로밖에 손을 댈 수 없었던 것들이 고개를 들이민다.
하얀 살덩어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어떤 생물과도 이질적인 것들이 검붉은 하늘에 뻥 뚫린 구멍으로 들어온다.
저것이 영혼. 저것이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