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63화 (363/541)

영겁종말(2)

죽어가는 노인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말은 날숨으로 만든다. 그래서 쿠빌라이는 그 한마디를 하는 것도 힘겨워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징조다. 인간인 나는 그것을 예감했겠지만, 세상 사이에 걸친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대가 아직 청년이던 시절을 기억하네.”

“그토록 미숙했던 청년을, 폐하께선 신하로 받아주셨죠.”

“그럴 만큼 유능했어, 그댄. 재능있는 색목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지 아는가.”

카간은 소탈한 웃음을 만들려 했겠지만 나온 건 기침이었다. 그 기침만으로도 노인의 수명은 깎여나갔다.

“청년에서 중년이 되고, 호기심 가득한 눈이 능란한 관료의 눈으로 바뀌어 갔지. 한데 그대는……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던가.”

쿠빌라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그러할 것이다. 무척 아쉬웠지만, 나는 그가 맡긴 ‘마지막 임무’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까. 나이와 신분,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랬었죠. 하지만 벗을 보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벗이 바라니까요.”

노인의 움푹 꺼진 눈이 축축해지는 것이 보인다. 냉혹한 매와도 같았던 그도 이렇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내다.

“정말 고맙군. 이 늙은이 마지막 가는 길에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야. ……허나 미안하기도 하네.”

그가 미안해하는 것은 나에게 녹봉 이상의 무언가를 줄 수 없다는 것.

“그대가 어떤 공을 세울지라도 정사(正史)에는 남을 수 없을 것이야. 다이온 예케 몽골은 그대를 기껏해야 수많은 색목인 관료 중 하나로 기록할 걸세.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지.”

“카간이시여, 그런 것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대는 참으로 헌신적인 신하로다. 명예욕마저도 버린 것인가.”

“버렸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내게는 이제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남든 말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나’도 있고 허풍선이로 욕을 먹는 ‘나’도 있지만, 그것들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나’도 있는 이상…… 더는 그런 데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런 불경함은 나를 비롯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카간께서도 위업에 우리의 일을 남길 수 없음이 아쉽지는 않으신지요?”

“위업? 위업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간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내겐 시간이 많으므로, 아니 시간은 별 의미가 없었기에 그의 다음 말이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 혹은 그때의 나를 관찰한다.

“일족의 반란을 제압하고, 각지를 정벌해 예케 몽골의 강역을 최대로 넓힌 것. 그런 것들은 위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허나 짐이 그대에게 명한 일은…… 그대의 위업이지 짐의 위업은 아니야.”

노인은 씁쓸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짐은 위업을 완수하지 못했네.”

“그렇지 않습니다, 카간이시여. 폐하의 통찰로 저에게 명을 내리신 것만으로도 인류는 그 목숨을 연장했습니다.”

“짐의 강역 내에서는 그렇겠지. 허나 짐의 능력 밖에서는 어떠한가? 인도나 멀리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그것’의 존재를 알고 멋대로 위험한 일을 진행시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은가.”

“그래서 제가 바다 멀리까지 나갔던 것 아닙니까. 세계 각지에서는 그 괴물들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것들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아직 그는 일본인들이 언젠가 동쪽 먼바다에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리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대륙에서는 정말로 하늘에 장막이 덮이고 하늘이 사라져…… 극단적인 대책을 실행 중에 있다는 사실도.

이 시점에 내가 쿠빌라이에게 들려주는 말은 그저 거짓을 좀 섞어 위로를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카간이시여, 지나친 책임감은 내려놓으십시오. 카간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책임감이라. 그렇게 보아주는 건가. 인정해주는 건가. 짐은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는 영광만이 있는 줄 알았네. 허나 그렇질 않았어. 설령 점령지를 도륙 낸다 해도 남을 사람은 남아. 결국 정복자는 산 사람들을 끌어안을 책임을 지게 되네.”

정복지가 늘어날수록 책임은 늘어나네, 라며 쿠빌라이는 말을 이었다.

“짐과 예케 몽골 울루스는 세계를 정복하기로 했네. 실제로 우리가 세계 각국에 서한을 보낼 때도 그들의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나. 그랬다면 마땅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터.”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지려 했습니다.”

“그래, 세계를 정복하지도 못했고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저 위험을 조금 유예했을 뿐이야. 후대를 위해 경고를 조금 남기고.”

문명이 전하지 않은 사원이나 신전 따위에, 우리는 신종의 씨앗과 파멸인을 남겼다. 그것을 발견하게 된 이들이 괴물의 무서움과 인류 멸종의 위기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카간의 말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꼴이었지만 쿠빌라이는 괘념치 않았다.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

위험의 완전한 극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류의 현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무척 지혜롭지만, 그 자신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지나치게 지혜롭다. 세상의 멸망을 가져올 위험성을 느끼면서도, 그 위험성을 활용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간.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듯, 못다 한 뜻은 후대에 맡겨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계승될지 안 될지는 사람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카간의 손을 떠난 일입니다.”

“……그대의 말이 옳겠지, 아마도. 허나 이 늙은이의 걱정에 조금만 더 답을 내어줄 수는 없겠는가?”

지금껏 없던 간절한 눈빛을 띤 채,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가 고향으로 돌아가 했다는 조치는 어떤 것이었나? 유럽의 크리스트교에는 그 방면에서 상당한 강점이 있다고 했었지. 짐이 안심할 만한 조치가 취해졌는가?”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걸 폐하께 알려드리면, 저 외의 다른 누군가가 아는 비밀이 됩니다. 그건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고, 폐하께서 안심할 수 있는 조치도 아니게 되죠. 제가 평생 안고 가야 할 비밀입니다.”

***

쿠빌라이는 끝내 세상의 최종적 비밀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에겐 내가 유럽의 교회에서 각종 성스러운 의식을 통해 비밀을 봉인했다고 했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고 일부 그쪽의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나는 신앙을, 버렸다.

신의, 신종의 실상에 실망했다든가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나에겐 신앙을 버리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혁세주의 의지에 대항할 방법은, 다른 의지로 맞서는 것뿐이니까.

혁세주는 자신이 만들어진 세상의 실험을, 다른 세상에서 반복한다는 의지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쪽에선 이쪽 세상의 인류를 지킨다는 어떤 의지가 필요했다.

그 정도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을 초월해야 했다. 초월…… 이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인간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만 했다.

영혼에 대한 갈망.

고깃덩이로 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는 본능.

감각기관과 뇌에 의존하는 사고.

그 모든 것을 집어던지는 건 불가의 해탈과 비슷한 경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 내가 그렇게 된 이후로 그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중요하다 여기는 그 사고마저 여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나의 존재가 여전히 인간의 육신을 지닌, 내 삶의 여러 측면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내가 ‘한 걸음 물러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에서 벗어나, 세상의 표면에서, 세상과 세상의 경계에서 부유한다.

마치 혁세주처럼.

그것이 여러 세상을 삼키고, 혹은 그러려다 튕겨 나오고,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는 의지로 다시 달려드는 모습을 무수히 많이 관찰한다.

세상의 안쪽에서 혁세주와 접하고도 살아가는 인간들을 본다.

혹은 그들의 과거를,

혹은 그들이 맞이할 미래를,

그 시간대를 관통하는 그들의 발버둥을 본다.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동시에, 물론 이런 시간 표현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안다.

이제는 점점 더 감정이 희미해져 감을 감각하면서, 약간의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며.

나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잃어가는 소년을, 혹은 청년을 본다.

내가, 그가 마침내 끝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도, 주견하도 그러할까.

유가가 말하는 칠정, 그 칠정을 상실해버린 인간. 사단만으로 움직이는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성(聖)은 과연 뒤에 인(人)을 붙일 수 있는 말일까. 성(聖)은, 혹은 신성은 인간성과 겹치는 요소가 있긴 한 걸까.

이렇게 되고도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다.

그러니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계속하는 수밖에.

질문은 근본적인 부분을 향해야 한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고깃덩이가 그토록 추구하는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을 지닌 신종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혹은 반대로, 신종은 어째서 영혼을 지녔다 믿어지는가.

신종이 지녔다는 그 요소를, 인간은 어째서 자신에게도 있다고 상상하게 되었는가.

***

1930년, 다시 칸발리크.

결국 칸발리크가 내장처럼 붉게 물들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600여 년의 기간을 두고 도시의 두 가지 모습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희미하게 남은 나의 감정은 안타까움이라는 형태로 뭉쳤다.

이것이 가혹하다 느끼지 못하는 삶이야말로 가혹하지 않은가, 라고 누군가는 평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칸발리크의 거리 위로 나의 육신을 움직였다.

“……검붉은수평선너머에서나를부르시네영혼없는이몸뚱이에혼을불어넣으사미천한이내몸이기꺼이피를바칠지니부디흠향하사한낱고깃덩이를신성케하시고……”

익숙하다면 익숙한 기도문이 들려온다.

몇 번을 반복해서 관찰해야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그럴 시간도 의지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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