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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62화 (362/541)

영겁종말(1)

신은 사고하지 않는다.

사고는 뇌라는 기관이 있는 생물이 하는 것이다. 뇌는 육신의 움직임을, 즉 생을 이어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판단을 하려 든다.

뇌가 멈추면 죽는다.

사고가 멈칫거리는 것만으로도 육신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든다.

어떤 이는 삶을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 말한다.

죽음에서 삶은 끝난다.

말하자면 결국은 죽기 때문에 삶인 것이다.

죽지 않는 삶은 무엇일까?

혹은 절대로 삶의 끝에 자리할 수 없는 죽음은 무엇일까?

영생이란 죽지 않는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삶인가?

영원한 정적은 삶의 정지와도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생은 곧, 영사(永死)다.

영원히 사는 것은 곧 영원히 죽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죽지 않는다면, 신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은 생명이라 말할 수 없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음의 회피’를 전제로 한 ‘사고’를 할 수 없다.

죽지 않는 것이 삶을 이해할 리 없으니, ‘신의 의지’라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에겐 늘 아리송할 따름이다.

그야, 신은 사고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누군가 신의 자비, 무한한 사랑을 구하고자 한다면

‘신을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답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 신에 근접한 ‘것’이 있다.

그것이 이번에 의지를 드러낸 세상에선 그것을 ‘혁세주’라 부르지만, 그것은 별다른 감상을 품지 않았다.

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따위의 인지는 수 겁 전에 초월했다.

감상을 품을 수 없음이 문제다.

그것은 생명과 공감할 수 없으니까. 말했듯이 죽질 않으니 살아 있지도 않다.

아니, 한없이 영생에 근접했다고 말해야 옳으리라. 정말 죽지 않는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니까.

증명될 수도 없을 것이다.

혁세주는 이번 세상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부유했다.

신에 한없이 근접한 그것에 사고는 없고, 오로지 의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의지는 관성 같은 것이다.

이 혁세주가 처음 만들어질 때, 그 세상 사람들, 무수히 많은 고깃덩이가 강렬히 바라던 것이 의지로 남았다.

의지의 실행, 의지의 관철, 그것만이 이 혁세주를 움직인다.

문제가 있다면 그 의지가 지향하는 바는 딱히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목표는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척도다. 그러나 혁세주는 성공이나 실패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 자신을 떠민 힘이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요컨대, 주견하라는 인간 개체가 짜낸 대응책은 혁세주에겐 위협이 아니었다.

위협은 생의 중지에 대한 공포다.

그러나 혁세주에겐, 아직까진 죽음이 없다.

정말로 누군가 죽음을 안겨줄 수 있다면, 이 ‘인간의 산물’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죽음을 회피할 ‘사고’를 할 테지만.

주견하는 그저 혁세주가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을 만든 것이다. 혹은 혁세주의 경로가 완만히 꺾이도록 길을 다듬었다 말해도 좋다.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없는 건 어떤 존재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주견하는 혁세주를 세상 안에서 밖으로, 튕겨냈다.

아마도 이 신에 한없이 근접한 존재는 그런 모순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고하지 않는다. 따라서 굳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장애를 ‘극복’하려 들지 않는다.

의지는 그저 작동할 뿐이다. 자동 기계처럼.

혁세주는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던 세상의 ‘의지의 총체’다. 그 의지는 실로 강렬하여, 이 ‘인공신’을 거의 전지전능에 근접하게끔 했다.

영혼은 육체를 초월한다. 그렇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생도 사도 없는 것에 영혼이 깃들었다.

혁세주는 자신의 육체 바깥으로 ‘촉수처럼’ 영혼을 뻗어, 사람의 정신을 어루만질 수 있다.

말이 어루만지는 거지, 실은 뇌를 마구 휘저어 혁세주의 ‘의지’대로 사고하게끔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사고’할 수 있다.

혁세주를, 그 부산물을 직접 맞닥뜨리든, 혹은 간접적인 영향을 받든 인간은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뇌를 통해 판단을 내리듯이.

이것은 치명적이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 깨닫고 만다. 자신은 그저 영혼이 없는 고깃덩이이며, 죽음 뒤에는 그 어떠한 구원도 없다는 사실을. 그저 기능을 정지한 고깃덩이가 되어 썩어가고, 무(無)가 될 뿐이라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결론에 다다른 뇌는, 발악한다.

생을 유지하기 위한 뇌의 사고는 불쌍할 정도로 발광한다.

죽기 싫다, 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레 죽음 이후의 삶을 상상하게 한다. 영혼이라는 게 있어서, 죽고 나선 육신에서 빠져나와 다음 삶을 이어나간다는 식으로.

환생을 하든, 천국을 가든. 어쨌든 삶은 이어지리라 상상하기에 지금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주지 않았다.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없다. 유한한 삶이 끝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 고기가 시간이 지나면 썩듯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이고 혼백이고 없이 그걸로 끝이다.

‘지식’으로 알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인생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라며 체념과 태연함으로 꾸며낸 태도를 보였겠지.

그러나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혁세주를 접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혁세주의 영혼은 인간 정신의 본능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유한함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절망감.

영혼의 성취 같은 것은 없다. 그 어떤 내적 충족도 의미는 없다.

너는 너의 고기를, 세포를 번식시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은 생명체다. 기본적으로 너의 생육과 번성은 곰팡이의 포자가 퍼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위액처럼 뇌간에 스며드는 깨달음.

의지가 강한 이라면 그것을 두통 정도로 느끼겠지만, 보통 인간은 결국 광증에 다다르고 만다.

광증의 첫 증상은 종교를 믿는 것이다.

신도들이 영혼의 구원을 바란다면 특히 그러하다. 없는 것이 있다고 애써 부정하며 위안 삼는, 정신적 방어다.

‘깨달음’의 단계에 다다르면 증세는 심해진다.

영혼이 없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영혼 그 자체를 추구하게 된다. 고깃덩이에서 영혼 있는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혁세주교’라는 것을 만들어 혁세주를 섬기고, 신종을 탐구하며 신종의 씨앗을 만들고 그 영혼을 추출하는 것. 그런 행위들이 모여 혁세주가 이 세상에 내려오기에 적당한 조건을 만들어낸다.

물론 혁세주에겐 목적의식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러한 환경 조성은 혁세주가 의도했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혁세주가 내려오는 것 역시, 그저 자신이 만들어지던 환경과 유사한 환경이 이 세계에 조성되니 ‘이끌렸을’ 뿐이다.

혁세주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고, 인간이 그 영향을 받아 지상을 혁세주에게 적합한 공간으로 만드는 악순환.

악순환은 반복될수록 더욱 깊은 악영향을 끼친다.

마침내 혁세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면 그 악은 절정에 이른다.

혁세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정신적 간섭은 극에 달한다. 결국 뇌가 있는 고깃덩이들은 자신의 육체마저 파멸에 이르게 한다.

파멸인.

‘보는’ 걸 견딘다 해도, 피와 살을 직접 섭취하는 경우엔 파멸을 막을 수 없다.

애초에 인류 대부분은 그것을 견딜 수 없기에, 이는 인류의 확실한 파멸을 의미한다.

파멸 인류라는 것은 이후에 어떠한 역사도 만들어내지 못하니까. 그 어떤 사회도 정치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그것 나름의 어떤 인생관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인류의 입장에서는 동포로 분류하긴 어렵다.

파멸인들은 그저 신종의 씨앗과 함께, 혁세주와 함께 다른 세상으로 또 흘러 들어가 같은 비극을 반복할 뿐이다.

금속의 표면에 점점 퍼져나가는 녹처럼.

몸을 잠식해가는 병마처럼.

혁세주는 이미 세상의 표면에 부유하고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이번 세상에 영혼을 뻗을 것이며, 아마 이번 세상도 끝내 자신의 일부로 삼을 것이다.

인간이 육체를 뛰어넘는 영혼을 추구하는 한. 그런 분수를 모르는 탐욕을 지속하는 한.

이것이 ‘나’, 마르코 폴로가 세상과 세상의 틈새에 주저앉아 관찰한 것과 그 결론이다.

***

1293년 겨울, 칸발리크.

어떤 세상의 나는 이 무렵에 이미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 있지만, 여기서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죽음을 앞둔 카간을 찾아왔다. 그가 나를 찾았기 때문이다.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 세상의 비밀을 캐던 중, 나는 자연스레 일반적인 인간에서 멀어졌다. 어떤 한족 사상가는 그런 존재를 ‘이단’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혁세주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겪는’ 세상을 육신의 감각으로 체험하면서도, 그런 ‘세상들’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겪는다’는 표현을 쓴 것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겪었다거나 겪을 것이라는 식의 시제 표현이 오히려 낯설다. ‘겪는다’는 표현도 마땅한 방도가 없으니 그렇게 말한 것일 뿐,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인간 육체의 감각으로만 따지자면 실로 기묘한 느낌이겠지만, 이런 존재가 된 이후엔 느낌 자체보다는 그 느낌을 인간의 언어 체계로 표현하는 게 훨씬 더 괴상하게 느껴진다.

여하튼.

시간에 있어서도 그러하듯이, 나는 공간에 있어서도 별다른 제약 없이 내가 있는 곳에 접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갔고, 그곳에 있었으면서, 그곳에 있던 나의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카간, 아니 이제는 내 앞에서 그저 죽어가는 노인일 뿐인 남자는, 내 기척을 느끼자 감았던 눈을 떴다.

“그대가 올 것 같아서 사람들을 물렸지.”

어떤 세상에서든, 쿠빌라이의 통찰은 놀라웠다. 그는 여러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암군이기도 했고 폭군이기도 했으며, 명군이거나 성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세상에서든, 그가 어떤 평가를 받는 군주든 놀라운 통찰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나의 벗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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