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61화 (361/541)

입헌혁명(17)

“어떤 식으로……?”

“세부로 파고드는 거죠.”

문제의 초점을 입헌 개혁에 찬성하느냐, 혹은 하지 않느냐에서, ‘어떤 식으로 개혁하느냐’로 옮기자는 의견이었다.

“저들이 마련한 무대에, ‘보수파’라는 배역까지 그대로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개혁안을 들고 나오면 되는 거죠.”

헌법이라고 다 같은 헌법이 아니다.

고려의 경우처럼 군주권에 분명한 제한을 두는 헌법도 있지만, 말만 개혁이지 이전 시대의 절대군주를 재확인할 뿐인 헌법도 있다.

“대립의 초점을, ‘어떤 헌법을 만드느냐’로 옮깁시다.”

이런 이야기가 한 번 나오면 논의의 속도는 빨라진다.

키타이파는 고려의 사례, 울제이의 결의를 흉내 내어 낭키아스 칸의 권한 역시 제한하는 방향으로 헌법 초안을 내밀었다.

여기에는 정식으로 의회를 구성하는 안도 포함되어 있어, 응천 궁정을 단순한 식민지 총독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키타이파에 반대하는 무리는 군주권을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군주권의 제한, 입법부 등의 구색을 갖추는 데에는 동의했다.

대신 좀 더 미묘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되면 낭키아스와 몽골의 관계, 다이온 내에서 낭키아스의 지위를 다시 규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낭키아스의 칸이 몽골의 카간으로부터 임명된 존재가 아니라, 낭키아스 의회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자라면 두 군주의 관계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진다.

지금껏 관습과 현실적 여건 사이에 애매모호하게 걸쳐 둔 낭키아스의 국가적 지위.

그것은 헌법 제정과 함께 다시 논의된다.

헌법에 분명하게 ‘낭키아스 칸은 어떤 존재인지’ 규정하여야 한다고, 정치권의 모두가 동의한다. 아니 정치권뿐만 아니라 응천 궁정 밖에 몰려 있는 시민들도 ‘칸의 재규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즉 헌법은 권력 구도의 문제이면서,

국가 체제 개혁이자,

외부, 몽골 및 다이온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며,

시민의 열망 실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 성격 탓에 헌법을 둘러싼 논의는 조심스럽게 진행되었지만, 동시에 격렬하기도 했다.

양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몽골 및 다이온과의 관계 규정은 이후 ‘제2차 동아시아 협력회의’가 열릴 때, 연방 헌법의 초안에 참고가 된다.

의회를 구성하고 의원의 선출, 칸과 의회의 관계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낭키아스 국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의원들에게 표를 준 낭키아스 국민들은 누구인가?

누구를 ‘낭키아스인’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다이온인’인가?

한인(漢人)이니 몽골인이니 하는 민족적 분류에서 벗어나, 국가의 국민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다.

이것이 ‘반(反) 키타이파’가 노리는 부분이었다.

키타이파가 은근슬쩍 낭키아스마저 울제이에게 떠넘기려고 할 때, 반대파는 정면에서 비판하기보다 ‘어려운 과제’를 떠넘겨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입헌.

그리고 ‘낭키아스인’의 탄생.

울제이가 ‘키타이인’이라는 발상을 사람들 사이에 불어넣은 데 착안, 대응책으로 낭키아스 정계에서 나온 개념이었다.

미리안이 던진 입헌이라는 화두는 이렇듯 세상을 어딘가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흐름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낭키아스 정계 한구석에서, ‘바이다르 칸과 고려인들의 결탁을 인정하는 건 어떤가?’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서서히 ‘고려파’라는 실체로 성장해나갔다.

***

‘그림자 사내’의 경고도 있고 해서, 배영훈은 안세규의 비밀을 더 깊이 캐는 건 잠시 단념하기로 했다.

대신 내무성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탐문 방식도 직접 돌아다니기보단 실내에서의 서류 작업으로 바꿨다.

이렇게 하면 그림자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 설마 책상 위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간섭하진 않겠지.

그는 그간 쌓아둔 인맥을 활용해 이곳저곳에서 자료들을 넘겨받았다.

자료들의 성격은 모호하다. 겉보기엔 내무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내용들이다. 그 자료들을 파고드는 배영훈의 모습은 마치 안세규 관련 업무는 끝내고 다른 일에 착수한 것처럼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지…….”

홀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배영훈의 손에는 서류 한 뭉치가 들려 있다. 지금 막 그의 주의를 끈 서류인데, 외무성에서 보내왔다.

“나는 지금 ‘조유관의 뒤를 캐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그림자 사내의 눈을 피한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향해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

조유관은 고려국민당 사람이다. 당내에서 안세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파벌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당연히 외무성에는 고려국민당의 조유관 파벌 쪽에서 모아둔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어떤 기관이든 자신의 업무 외에도 기관 자체가 살아남기 위한 자산을 보유해야 하니까.

그렇게 보내온 자료는 실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흥미롭기도 하고…… 실없는 웃음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내용을 감고 있기도 했다.

“‘외무성 장관 암살 기도에 관하여’……?”

외무성 장관 조유관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외무성이 자체적으로 장관의 신변 보호에 대해 고심했던 것 같다.

자료는 보호 방안을 상세히 다루고 있을 뿐, 정작 배영훈이 궁금해하는 내용은 전해주지 않았다.

누가 조유관의 목숨을 노렸는가. 혹은 노리고 있는가.

암살 시도는 막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막았단 말인가?

태사부나 군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니, 그렇게 보일 뿐이고 실상은 물밑에서 이미 조유관을 중심으로 뭔가 진행되어 온 걸까?

여기까지 하고, 추측을 중단한다.

이 너머로는 추측이 아니라 망상의 영역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추측을 계속 이어가려면 자료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자료는 외무성이 아니라……

“이번에는 옛 극북방위군 쪽 자료를 살펴볼까.”

허동주의 정예였던 옛 서부군은 산동 싸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전사한 이도 있고 포로가 되었다가 그대로 수감 생활 중인 이도 있다. 신수덕을 따라 망명한 자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향해서 지금도 군인으로 산다. 마치 허동주나 신수덕의 부하였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천손민족협회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는 듯이.

물론 미리안 정권도 이들에 대해 무신경하지는 않아서, 이들을 각 지역에 흩어놓았다. 절대로 옛 전우들과 무리 짓지 못하도록, 하나의 대대에 두 명 이상의 전향자가 배치되는 일이 없게 했다.

그러고도 남는 자들이 있어서, 미리안 정권은 ‘동명역 쿠데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줄 아는 조심성 있는 자들은 군복을 벗고 평범한 민간인으로 사는 길을 택했지만, 끝까지 군이라는 조직에 미련을 못 버렸던 이들이 그 사건에 말려들었다.

그들에겐 비극이었지만 미리안 정권엔 ‘골치 아픈 잔당’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배영훈은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되짚어보다, 씁쓸함을 털어버리고 그 이후의 일로 생각을 옮겼다.

서부군은 서북부군과 더불어 제국 육상 방어의 주축이었다. 서북부군이 흥안령 산맥을 따라 몽골 국경지대를 방어한다면, 서부군은 용성을 중심으로 동명의 서부 요충지를 직접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기존 서부군의 해체 이후, 급히 신 서부군을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미리안은 자신의 친위 혁명에서 맹활약한 극북방위군과 조유관을 중심으로 신 서부군을 재건했다. 그들이 가장 정예한 집단인 것도 한 이유였지만, 동맹인 구 민국정부 측에 일정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안세규는 이 신 서부군을 자신의 무력 기반으로 삼아, 허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제국의 이인자이자 가장 강대한 군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텐데.

“내무장관으로 옮겨갈 때부터 좀 이상하군.”

안세규는 내무장관이 되면서 일반경찰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게 되지만, 경찰은 서부군에 비하면 약하다. 사실상 무력 기반을 잃어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태사께선 안 장관을 제2의 허동주로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건가.”

그럴듯한 해석이다. 하지만 분명 안세규도 이에 어떤 식으로든 반발을 표현했어야 할 터. 배영훈이 아는 한 안세규는 태사의 위세에 눌릴 인간이 아니다. 어떨 때는 태사를 압도하기도 한다.

“서부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든가…… 하지 않는 이상은.”

안세규가 내무장관으로 옮겨가고, 서부군 사령관 조유관은 예편. 그대로 비어 있는 외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옛 극북방위군, 현 서부군의 자료에는 조유관이 외무장관으로 취임하기 직전, 동명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차량과 철도의 상태를 엄중히 점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의 점검은 폭탄에 의한 요인 암살에 대처하려는 것이라고 봐야겠는데.”

그렇다면 암살 시도는 몽골 내전 당시, 조유관이 고려로 귀국하던 길에 있었던 걸까.

서부군에서 손을 떼야 했지만 반발하지 않았던, 혹은 하지 못했던 안세규와 조유관.

안세규의 자리를 대신한 조유관.

조유관 암살 시도의 배후에는…… 안세규가 있는 걸까?

“태사의 조치에 반발하지 못한 건, 이미 조유관은 안세규의 손아귀를 떠났기 때문인가. 그러면서도 태사께선 안세규를 달래기 위해 조유관을 군에서 내보내셔야 했고…… 한편으로는 조유관을 완전히 내칠 수도 없으니 외무장관으로 받아들이신 건가.”

추측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추측은 신빙성이 높다고 직감한다.

“그렇다면 ‘왜’ 조유관과 안세규는 반목했는가, 그게 문제군.”

여길 캐보면, 류성일 문제와는 또 다른 방향에서 안세규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

-귀국 후 필요한 조치는 정치경찰실의 협조를 구한다.

“나제홍은 아니겠지.”

좋게 말하자면 그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 나쁘게 말하자면 무사안일주의자.

그런 사람이 이런 큰일에 뛰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자는 어디까지나 징검다리, 완충재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계속 그렇게 충실하게만 산다면 아마 만수무강할 거다.

“다시 주견하인가…….”

미리안 정권의 기반이 단단해질수록, 그 청년의 이름을 접하는 빈도는 늘어만 간다.

몇 차례인가 그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했던 적도 있다. 그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었지.

이번 일에도 그가 관여하고 있다면, 전에 외무성 쪽에서 나왔던 주권선이니 이익선이니 하는 이야기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엔 조유관 장관이 주견하와 몇 차례 접촉하기도 했고.”

조유관이 주견하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었나.

구체적으로 어떤 빚을 졌는지, 왜 빚을 져야만 했는지, 그 자세한 지금 당장은 알기 어렵다.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겨야 하나.

안세규를 향했던 시선은 이제 주견하와 조유관을 향해 옮겨갔다.

아마도 ‘그림자 사내’를 상대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정말로 탐문을 중단해야 한다.

안전한 삶을 바란다면, 태사가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눈 밖에 나고, 그러다 전역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배영훈에게 큰 출세욕은 없다. 솔직히 군인을 직업으로 택한 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렇다. 그의 인생은 ‘어쩌다 보니’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생김새처럼 우직했기 때문이다. 맡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최상의 성과를 거두진 못해도 완수는 해낸다.

군인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직업을 택해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배영훈은 생각했다.

“자, 이번엔 어디서부터 시작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