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16)
바이다르는 역사책은 현실과 다르다고, 통감하고 있다.
역사책에서는 수많은 충신과 간신의 사례를 든다. 그리고 충신은 멀리하고 간신은 가까이한 어리석은 군주들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다른 왕조, 다른 시대의 군주에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는 교훈을 전한다.
그러나 역사책은 실로 말뿐이로다, 하고 바이다르는 한탄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군주들을 닮지 않을 수 있는지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역사책은 결과적으로 충신으로 판명된 자, 간신으로 판명된 자를 역사가가 참 편한 마음으로 적어 넣은 것일 뿐이다.
지금 눈앞의 이 사람들이 간신인지 충신인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란, 간신과 충신이라는 유형으로 딱 잘라 나눌 수 있던가?
만약 사람을 몇몇 유형으로 편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인간사의 수많은 갈등과 고민은 진즉에 사라졌을 것이다. 인류는 벌써 대평화의 시대를 맞이했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은 그런 동물이 아니다. 복잡하기 짝이 없다. 가장 단순한 인간조차도 무엇이라고 규정한 순간, 의외의 면모를 드러내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심지어 이 규정조차 의외의 방향으로 어긋나곤 한다.
그것을 이제 겨우 열너댓 살 소년이 유연하게 파악해서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세상에는 종종 어린아이가 뜻하지 않게 집권하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미리안이나 루우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바이다르는 따라잡아 보려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방식으로.
“우리 낭키아스도…… 입헌 요구를 받아들일까 하오.”
문제는 바이다르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울제이와 루우 테무르, 미리안에게 있는 카리스마, 경험, 지적 능력 같은 것이 바이다르에겐 많이 부족했다.
그는 예리한 정치적 안목으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아니고, 그 판단을 뒷받침할 만한 유무형의 자산을 지니지도 못했다.
그저, 고려나 키타이가 그와 같은 조처로 괜찮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기에, 소년도 흉내를 내보았을 뿐이었다.
바이다르에겐 그게 얼마나 섬세한 계산에 따른 작업인지 가르쳐 줄 이가 없었다.
그래서 곧장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들을 보며, 섬뜩함에 마른침을 삼켰다.
바이다르에게 존경을 표하거나 그의 판단에 뿌듯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어떤 이는 안도한다.
어떤 이는 득의양양한 얼굴이 된다.
또 어떤 이는 경멸을 눈에 담는다.
어떤 이는 아예…… 적의를 드러낸다.
그들이 왜 각자 저런 감정을 품는지, 바이다르는 이해할 수가 없다. 거기까지 통찰하기엔 바이다르의 경험이 너무도 부족했다. 바이다르는 그저 당혹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누군가 아주 용감한 귀띔을 해줄 수 있다면 바이다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전하께선 어전과 정치권의 신뢰를 잃으셨습니다.
극소수라곤 하지만 이 어전에도 바이다르 ‘개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바이다르의 후견인에 더 가까운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그런 말을 해줄 사람들이 못 되었다.
바이다르는 이미, 이 어전의 사람들이 아니라 루우 테무르, 미리안과 낭키아스의 미래를 논의했다.
어린 칸에게 우호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외세 의존성을 한탄했다.
어린 칸을 곱게 바라보지 않던 자들은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아이라 단정 지었다.
표현의 강도는 다르겠지만 어린 것이 벌써부터 못된 버릇만 들었다, 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물론 바이다르가 어떤 가르침과 경험을 얻느냐에 따라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할 여지는 충분했지만, 여기 응천의 어전에 있는 사람들에겐 ‘지금’ 칸이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했다.
루우 테무르나 미리안의 입장에서 보기엔 바이다르는 꽤 총명한 아이다. 실제로 이 아이는 나이치고는 총명하다. 보통 아이 같으면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나 총명하다는 것이 어떤 때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고려 황제와 태사가 바이다르의 총명함을 좋게 보는 건 어디까지나 바이다르의 행보가 고려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바이다르의 행보가 손해로 작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의 총명함이 그저 ‘교활함’일 뿐이다. 혹은 자신의 이익을 해한다는 것 자체로 ‘어리석음’이라 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겐 어리석고 현명함에 관한 기준은 실제 지적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으니까.
어떤 이들은 그날 어전에서 물러나 지기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이런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전하께 ‘입헌’에 관한 당신만의 뚜렷한 관점이 있다면 좋으련만…….”
“관점만 있으셔선 안 되겠지요. 누가 뭐라 불만을 드러내든 밀어붙일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아쉬움은 울제이나 미리안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울제이는 헌법을 세우겠다면서 한족 문제에서의 개혁안을 함께 내놓았다. 몽골인의 권리를 재규정하면서 한족이 얻을 ‘기회’를 보장했다. 그리하여 ‘키타이 국민’ 형성의 등을 살짝, 밀어주었다.
미리안과 고려는 이미 헌법을 세우는 단계를 벗어났다. 그들은 이제 비상시의 조치를 벗어나 ‘헌법대로’ 살아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리안은 ‘권력 분립’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된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이제는 정점의 한 사람에게 강대한 권력을 몰아주지 않아도, 고려는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용감한 한 걸음을 옮기리라.
더 나아가 고려인들은 아예, 자신들의 배움을 다이온 전역으로 확대하려 한다.
바이다르는 울제이나 미리안처럼 헌법으로 세우려는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지 못한다. 헌법을 세우겠다는 선언을 따라는 것, 딱 거기까지가 소년의 한계일까. 이중, 삼중의 효과를 노린 정치적 계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다.
“애초에 그저 아이이신데 거기까지 기대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지…….”
게레센제는 아들에게 뛰어난 스승이나 후견인을 붙여주면서 응천으로 ‘피난’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카간은 그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낭키아스의 정세가 최선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게레센제는 아들이 비교적 ‘안전한 역경’을 겪으며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성장하길 바랐다.
하지만 낭키아스의 정세가 바이다르에게 준 역경은 측근들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인데다, 바이다르의 독자적 판단은 아버지가 경계하는 고려인들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렇다. 바이다르는 ‘아버지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려인들을 향해 손을 뻗음으로써, 낭키아스 정계에서 고립되었다.
“정치권의 반응이 이래서야 언론도 칸의 결단을 우호적으로 보도해주진 않겠죠.”
응천 정계의 누군가가 이렇게 한탄한다.
언론 보도의 본질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글로 전해지는 신문부터, 음성으로 전해지는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예외는 없다. 정론직필을 내세우던 언론인도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의 평판에 기대어 제 입맛에 맞는 여론이 형성되도록 말장난을 친다.
강도 짓을 가난을 못 견딘 불쌍한 사람의 절규로 포장하는 것,
혹은 부자의 잔인하고 비열한 범죄 행각을 기업가의 모험심으로 포장하는 것.
그 모든 말장난이 기자라는 자들의 펜이나 혀끝에서 새어 나온다.
바이다르도 예외는 아니다.
울제이와 미리안의 선언은 ‘용감한 결단’으로 보도되지만, 바이다르에겐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보는 언론인이 있어도 그 말이 신문에 실리거나 라디오 전파를 탈 일은 없다.
바이다르에게 적대적인 정치인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고, 언론사는 그 구린내를 언제나 잘 맡아 알아서 배를 드러내니까.
그렇기에 바이다르가 한 일은 그저 ‘등 떠밀려서’, ‘마지못해’ 내린 결정으로 평가절하된다.
국내 여론에 등 떠밀려서, 미리안과 울제이가 개혁을 하니 바이다르도 마지못해, 그렇게 ‘입헌’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 것뿐이라고.
따지고 보면 다른 나라의 개혁에 자극받아 자국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언론은 ‘그런 해석’은 절대로 해주지 않는다.
특히 바이다르의 등을 떠민 사람으로는 ‘울제이’가 주목받을 것이다.
그렇게 비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개봉에 찾아가 울제이와 협의를 마친 ‘키타이파’는, 울제이 칸이 올 길을 닦아두기 시작했다.
-결국 울제이에게 낭키아스의 통치까지 맡기는 게 옳지 않은가.
-한족 반란 진압 이후의 민족 문제에 관해, 울제이는 하나의 대답을 제시했다.
-키타이에서의 ‘국민’ 형성을 향한 개혁을, 그대로 낭키아스에서도 실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
키타이파는 이런 식으로 입헌이라는 화두에 올라타, ‘개혁적’ 이미지를 취하고자 한다. 그런 식으로 낭키아스 정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리한 위치에서 반대파를, 바이다르 칸을 압박한다.
이 모든 것은 울제이와 키타이파가 짜 둔 각본이다. 동아시아 대륙을 뒤덮은 이 입헌 혁명의 파도는 한편에서는 국가 체제의 격변을,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 구도의 격변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이른바 ‘키타이파’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 반대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키타이파의 뻔뻔한 주장 배후에 울제이가 있음은, 어깨 위에 머리가 달린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굳이 증거를 잡을 필요도 없다. 그 외에 다른 어떤 설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 구도, 성가시군요…….”
응천 어딘가의 연회장에서, 혹은 같은 파벌의 구성원들끼리 가진 간단한 점심 식사 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오갔다.
“이래서야 마치 저들은 ‘입헌파’고, 우리는 ‘보수파’라 저들의 개혁 시도에 저항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민족의식의 각성과 그로 인한 갈등의 폭발. 불완전한 통치체제의 한계는 지난 수년간의 동란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오면 어떤 정파에 속하더라도 개혁에 착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미루던 숙제를 하듯 말이다.
물론 끝내 숙제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있듯, 끝까지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치 세력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이다. 국가 존망의 갈림길에서 그런 작자들이 나타난다면, 국가는 그들을 모조리 죽이든지 아니면 멸망을 향해 나아가든지 선택해야 한다.
그런 예외적 인간들을 제외하고, ‘키타이파의 반대 세력’ 모두는 대응 방안을 고심했다.
키타이와 대립한다는 점에만 정신이 팔려서 덮어놓고 입헌 개혁에 반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낭키아스 국내의 분위기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가 용납하지 않는다.
유행에 뒤떨어지면 사교계에서 밀려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 정교한 통치체제의 구축이라는 국제적 흐름에서 뒤떨어지면 그런 정치사상도, 정치인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단순히 ‘힘’만이 현실이라 보는 미련한 낭만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겠지.
“이미 칸께서 고려인들과 협력하기로 한 이상…….”
미리안의 개혁 요구는 그 자체로 각국을 움직이는 힘이 있지만, 바이다르의 지지가 거기에 힘을 더욱 얹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