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15)
어떤 이는 구 민국정부가 이 정권에 참여한 덕분에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리는 있다. 개혁이란 어느 쪽에서 압력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 그 압력에 마지못해 움직이면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국민들은 이것을 태사 미리안의 업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아가씨!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백부와는 달리 새 시대를 견인하는 자! 그런 사람이 늙은 정치인들은 떠올리지도 못한 개혁을 해냈다!
안세규의 마음속에는 미리안의 외모에 대한 시기심마저 피어오른다. 그녀는 아름답다, 귀엽다.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좋은 외모다. 게다가 미리안은 그 외모를 활용할 줄도 안다! 적절한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낸다! 당장 내전을 겪은 젊은 군인들은 그녀를 ‘자애로운 우리의 누이’로 기억한다!
누이를 지키기 위하여! 그 얼마나 가슴 뜨거워지는 구호인가. 그 구호가 얼마나 많은 ‘신진’ 장교들의 충성을 받아내고 있는가.
미리안의 선언이 끼치는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 이 선언은 특히 대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당장…… 아까 잠깐 보고 온 토론회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잖은가.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토론장에 남기고 왔던 보좌관으로부터 소식이 전해져왔다. 본인이 와서 보고하기엔 시간이 걸리니 일단 전화부터 하고 본 모양이다.
이는 다시 말해, 꽤나 급히 전해야 할 소식이라는 뜻.
세규는 다소 긴장하며 보고하라고 턱짓했다.
“……제국입헌당이 저런데 고려국민당은 대체 뭘 하나, 그런 이야기가 나온 모양입니다.”
“음…….”
세규의 낮은 신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보좌관은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나갔다.
“그간 우리가 비판해왔던 제국입헌당이 오히려 더 민주적이고, 고려국민당이야말로 독재적이지 않은가, 하는 말도.”
뼈아프다. 분명 저 말은 고려국민당 내 ‘체제 반대파’를 숙청했던 걸 겨냥한 말일 터이다. 당연히 그 숙청의 주역인……
“안세규 장관은 독재자다, 라고도.”
“……그래서, 독재자니 뭘 어찌 해줬으면 좋겠다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간다. 보좌관은 침을 꿀꺽 삼키곤 말을 이었다.
“당장 안 장관도 태사를 본받아 당수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세규는 당권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라디오 뉴스에서도 나왔듯이 총선이 내년이다.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당을 자기 손아귀에 꽉 쥐고 있어야 한다. 고려국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자신이 태사가 되기 전까진.
하지만 모양이 이래서야, 말로만 민주주의니 공화정이니 떠들고 실상은 구세대 정치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지 않은가.
“그래서, 제국입헌당의 새로운 당수는 누가 된다던가?”
후보들 이름을 들어본다. 세규는 코웃음 쳤다. 다들 허수아비 역할밖에 못 할 인간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세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당수의 실상이 미리안의 꼭두각시라는 것보다, 미리안이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데에 더 주목할 것이다.
아무리 리안의 행동이 기만이라고 소리쳐봤자, 사람들은 귀 기울여 주지 않을 것이다.
“다 계산에 넣고서 한 일이겠지, 태사.”
그렇지 않았다면 각료회의를 마무리하자마자 기습적으로 이런 발표를 했을 리 없다. 라디오의 평론가가 떠들던 것처럼, 이는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도 나를 압박해오는가.
눈을 질끈 감는다.
오래지 않아 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서 순순히 자기네 학생 조직을 자제시키겠다고 했구나, 주견하!”
주견하는 약속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그러고서도 자기 뜻대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 조직 간 갈등을 통해 이쪽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파악해 두었다. 그걸 아주 살짝 만족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을 동요케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이제 스무 살이 된 감찰국장은 한층 더 교활해졌다.
아니, 이젠 어리다고도 할 수 없다. 태사는 그 나이에 내전을 총지휘했으니까.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총선에서 이기고 태사가 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강력한 조직의 힘. 통일된 의사로 움직이는 조직력. 그러나 이대로 손아귀에 모든 걸 쥐고 있다면 지지율은 떨어진다. 총선거에서의 승리는 점점 멀어진다. 태사가 되어 자신만의 정치를 펼 기회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완벽에 가까운 함정이다.
그 순간, 기이할 정도의 평정이 그의 마음을 감돌았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평정이 아니었다면 안세규는 진즉에 지하 활동 중 죽었을 것이다.
“……나는 젊다.”
자신보다 어린 적들을 상대하느라,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늙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계의 거물들 전체와 비교해보면, 안세규는 여전히 젊은 축에 속했다.
“내가 태사가 된다, 그 야망에 집착하느라 잊고 있었군.”
젊다. 그러니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승리를 노릴 수 있다.
미리안이 잠시 선거에서 지더라도 언젠간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규도 자신의 젊음을 돌아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애초에 류성일과 손을 잡을 때, 한 번 정도는 그 늙은 정치인에게 태사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렇게 생각하자 돌파구가 보인다.
류성일과의 동맹을 복구하고, 류성일을 동명으로 돌아오게 하고,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미리안과 주견하에게 반격을 가할 방법이.
“류 장관께 ‘제국입헌당의 카라코룸 지역당’을 여시라 제안드려보게.”
류성일은 아직 제국입헌당원이다. 제국입헌당에는 류성일을 비롯한 ‘원로’들이 아직 많다. 즉 류성일이 뜻만 제대로 드러낸다면, 미리안이 올린 후보가 아니라 류성일을 새로운 당수로 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 고려국민당은 제국입헌당에 ‘합당’을 제안한다. 지금의 연합정권을 넘어선 거대 여당의 시대를 열자고 말이지.”
여기서 안세규는 도박을 시도했다.
“우리는 태사의 개혁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하여 태사가 확보한 인기를 전부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만약 합당이 성사되면 좋든 싫든 제국입헌당은 고려국민당과 이익을 나누어야 한다. 즉 고려국민당 출신들이 연합 거대 여당의 이름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고려국민당은 제국입헌당이라는 트로이의 목마에 타서 다시 최고회의에 입성할 것이다.
“그냥은 아니지. 조건을 건다. 류성일 장관이 새로운 당의 당수여야만 한다는 조건. 그 대가로 나는 내무장관직을 사퇴하지.”
류성일에게 향할 제안과, 미리안에게 향할 제안은 이렇게 하나의 계략으로 합쳐진다.
소란을 일으킨다. 그것도 큰 소란을.
미리안이 이 제안을 거부해도 상관없다. 제국입헌당 내 ‘원로’들은 세력을 확대하고 류성일을 추대할 기회를 놓쳤다며 불만을 품을 테고, 안세규는 안세규대로 ‘사욕을 내려두고 대승적인’ 제안을 했는데 거부당했다는 식으로 불만을 내비치면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이면…… 총선을 앞두고 당의 혼란을 수습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당수 자리를 유지하는 거지.”
한동안은 내무장관으로서 태사와 계속 마주쳐야 하는 ‘불편한’ 관계가 되겠지만, 그 정도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미리안, 주견하, 너희는 어떻게 반격할 테냐.
세규의 커다란 웃음이 내무장관의 집무실 천장을 거침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
울제이는 칸발리크의 ‘황정회’와 접촉했다.
미리안의 개혁 요구에 뒤따른 ‘당정(黨政) 분리 선언’.
그 계집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거침없이 무기로 쓰고 있다. 권력을 쥐기에 다소 ‘불편’한 길을 걸어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물러날 길은 없었다. 정면에서 받아치는 수밖에.
그러니 울제이는 황정회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 전쟁장관과 내무장관을 모두 내놓겠다는 뜻을 전했다.
물론 이 만남은 볼로드를 배제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울제이는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몽골 제국입헌당과는 접촉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볼로드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울제이는 황정회 내, 볼로드와는 거리를 둔 인사들과 접촉했다.
당연히 그들은 기꺼이 울제이와 협력하기로 했다. 울제이는 그들 중에서 새로운 전쟁장관과 내무장관을 밀어주고, 그들은 울제이가 원하는 바를 밀어준다.
울제이가 원하는 바는 바로 ‘키타이 주권의 독립성 확보’였다.
고태용과 원철 직원, 키타이의 관료, 신원연구회의 연구원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울제이의 귀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그 연구원의 행패를 듣자마자 울제이는 직감했다.
여기서 칸발리크 정권과 선을 긋지 않으면, 향후 행동에 크나큰 제약을 받게 되리라고.
그냥 내버려 두면, 신원경제자원연구회든 아니면 그 배후의 형 게레센제든, 그리고 진심이든 아니든 그들은 키타이가 몽골의 ‘속령’이라는 논리를 계속 들이밀 것이다.
대원철도주식회사가 나름 속셈이 있어서 여기저기 사업을 확장해나가듯이, 울제이도 그 사업을 나름대로 이용할 심산이다.
특히 그는 먼저 신호를 보내온 낭키아스의 수도 응천을 겨냥하고 있었다. 거기서 자신을 지지하는 일파와 ‘함께 일을 꾸밀’ 기회를 활용하려면, 철도 사업이 필요했다.
칸발리크 정부의 방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물론, 형에게 카간 자리를 양보하는 대신 얻어낸 내무장관과 전쟁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건 아쉽지만…… 자신이 ‘칸빌리크의 관료가 아님’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게다가 울제이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칸발리크에 자신의 흔적을 확실히 남겨두었다. 내전 중에 전쟁장관직을 맡으면서 몇몇 군인들과는 꽤 친해졌다. 그들은 울제이가 ‘칸발리크에서 일을 꾸밀 때’ 협력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루우 테무르가 몽골에서 분리된 고려의 힘으로 칸발리크를 압박하듯이, 자신도 키타이와 낭키아스, 즉 ‘몽골에서 분리된 남쪽’의 힘으로 칸발리크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들었다.
그리하여 울제이는 준비를 다 마치고, 개봉의 왕궁에 설치된 방송 장비를 통해 키타이 전역을, 전 세계를 향한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 키타이는 오랜 군사 정권 시대를 끝냅니다. 우리는 ‘키타이’라는 이름 아래 형제 동포가 될 의사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두 팔 벌려 안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대표를 뽑을 수 있습니다. 저, ‘칸’조차 어길 수 없는 엄정한 법 질서를 오늘, 이 땅 위에 세울 것입니다. 존경하는 ‘키타이 국민’ 여러분, 본인, 키타이 칸은 여러분의 지배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대표자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