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14)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굴려본다. 생각하기 어려워서 지끈거리는 게 아니다. 굳이 이런 일로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워서 그렇다.
뭔가 생각을 떠올린 고태용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계속 법적인 문제, 법적인 문제 하시는데, 뭐 좋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고려는 아직 참관국의 입장이다, 그러니 고려계 기업이 다이온 영토 내에서 지나치게 경제를 장악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렇지요.”
고려가 다이온 경제를 장악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려가 지금 이런 방식으로 벌이는 진출은 몽골 입장에서 보자면 침략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겠지만, 상대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공평무사하게, 법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그뿐이라는 태도다.
“그럼 그 ‘법’이라는 게 몽골 측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도 좀 지켜줄 수 없겠습니까?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자 고객의 소중한 투자금입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다이온의 ‘법적 절차’를 밟고, 몽골과 키타이 사이에서 ‘법적 조율’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글쎄요. ‘그런 쪽’ 법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건 해당 기관과 협의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그런가. 교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애초에 ‘법리’ 운운하며 시비를 거는 인간 중에 ‘법치 질서’를 위해 그런 짓을 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법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리저리 짜 맞춘 해석을 내놓는 편리한 상자 같은 것이니까.
시작부터 그렇지 않은가. 이제 막 ‘입헌’ 논의가 시작된 다이온에, 전국에 적용할 수 있는 법체계가 있을 리 없다.
저 작자는 연방의 수장 자리를 몽골 카간이 맡는다는 사실을 무리하게 재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몽골 법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긴 해도, 키타이의 법체계가 몽골의 사정에 구애된 적은 없다.
관련 ‘법적 절차’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당 기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고, 있다 해도 담당 공무원은 헛소리만 하거나 다른 기관으로 업무를 떠넘기겠지.
저들은 그저 시비를 걸고, 방해하고, 시간을 끌고 싶은 것이다.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럼 상식적인 대응은 여기서 끝이다.
우리도 시비를 걸고, 방해하고, 시간을 끌 뿐.
“이걸로 당신네들 목적 확인은 됐군.”
“……뭐라고요?”
고태용은 상대의 물음은 무시하고 자기 말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당신네 연구회에서 고려의 영토에 멋대로 들어와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건 아시오?”
그 말대로였다. 신원연구회의 몇몇 조사원들은 고려 내에서도 활동 중이다. 자신들의 단체 이름대로 경제적으로 유용하고 자원이 풍부한 지역들을 조사한다며 돌아다니고 있다.
고려는 언제든지 이들을 내쫓을 수 있지만 몽골과의 관계, 특히 다이온 각지에서 활동하는 원철 직원들도 있는 만큼 묵인하고 있었는데…….
“당신 말대로라면 고려는 어디까지나 ‘참관국’인데, 몽골 정부 아래 있는 사람들이 허가받지도 않은 활동을 하고 돌아다니면 안 되지 않겠소?”
신원연구회 사람은 고태용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다.
“그, 그건…….”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라고 하진 않겠지. 신원연구회는 직원끼리 서로 손발도 안 맞는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 고려는 어차피 참관국 단계를 거쳐 앞으로 다이온의 일원이 될 테니, 우리가 다이온의 예비 자원을 확인하는 게 큰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기껏 생각해서 꺼낸 변명이 저따위인가. 똑똑한 인간을 보낸 게 아니라 그냥 앞에서 뻗댈 수 있는 인간을 보낸 모양이다.
“그래, ‘어차피’ 다이온의 일원이 될 거 아니오. 그러면 우리 고려인도 ‘다이온인’이 될 거고, 다이온인이 운영하는 다이온 기업이 다이온 국토에서 사업을 하는 게 대체 뭐가 그렇게 법리적으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군.”
“그 일과 이, 이 일은 다릅니다!”
“다르지 않을 텐데.”
“아무튼 다릅니다! 우리는 고려에서 우리 뜻대로 자유로이 조사해도 됩니다! 당신들은 어쨌든 안 됩니다! 당장 그만두세요!”
뻔뻔함이 극에 달한 인간을 보는 건 불쾌한 경험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에게서 극단적인 뻔뻔함을 끌어내는 일은 묘하게 유쾌하기도 하다.
그래서 고태용은 기묘하게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키타이 쪽 사람은 비웃음을 날렸고, 원철 직원은 키득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표정을 보자 신원연구회에서 왔다는 사람은 이 언쟁에서 패배했음을 느꼈다. 슬슬 엉덩이를 뒤로 뺀다.
“여하튼 우리는 통보했습니다! 책임은 이제 그쪽에들 있어요! 알아서들 처신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간신히 마지막 예의는 챙겨서 허둥지둥 도망친다. 그 꼴을 보다 고태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공사 현장 경비를 좀 강화합시다. 설마 그렇게까지 야비한 수단을 쓸 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원철 직원도 고태용의 말에 동의하고 끄덕였다.
지금이야 한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지만, 언젠간 대원철도주식회사가 건설한 모든 철도, 투자한 모든 사업에까지 이따위 훼방을 일삼을 것이다.
그런 예감을 강하게 느끼며 고태용은 생각했다.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
다소, 거친 수단이 되더라도 말이지.
***
세규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전에 태사에게 ‘주권선과 이익선’ 문제로 의견을 올렸었는데, 태사는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독대를 바랐지만 태사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녀는 각료회의에서 ‘아즈텍 및 태평양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타국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을 상하 모두가 삼가야 할 것’이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별수 없이 각료회의 이후 대학생들의 토론회 자리로 걸음을 옮겼는데, 도착하고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는 정도였다.
막 도착하는 바람에 토론의 맥락을 몰라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나오는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에 우리는 고려국민당도 서둘러 개혁의 흐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고려국민당 당수로서 듣기에 당혹스러운 발언이었다. 혹시 지금 발언한 학생은 제국입헌당, 특히 감찰국의 영향을 받는 학생 조직에서 온 사람인가? 주견하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거나 아직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건가?
하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다. 그렇다면 매수된 걸까? 변절한 걸까? 그러나 그런 의혹이 추론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학생들의 분위기가 안세규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간 우리는 고려가 정말 민주와 공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토론해왔습니다. 태사가 제국최고회의 의장에서 제국입헌당 당수까지 겸하고 있는 상황은 그런 흐름에 역행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방금…… 태사가 직접 제국입헌당 당수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듯이…….”
세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좌관 하나를 객석에 남겨두어 토론을 마저 듣게 했다. 그러곤 곧바로 토론장을 빠져나와 다른 보좌관들과 함께 내무성으로 향했다.
“태사가 라디오 방송으로 제국입헌당 당수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답니다.”
이렇게 소식이 늦을 수가! 아니, 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보좌관들의 보고가 늦었던 걸까? 그렇게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세규는 보좌관의 다음 보고를 재촉했다.
“일단 지금 뉴스 보도를 직접 들어보시는 게…….”
어떤 라디오 방송국을 듣더라도 비슷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태사부와 제국입헌당의 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그럼 이 소식을 우리 국민들이, 또 정치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태사의 이번 대국민 담화는 행정부와 당을 분리하겠다, 즉 행정부의 고위 관료가 정당까지 아우르는 독재정의 형태에서 벗어나겠다, 일단은 이런 뜻이죠. 그런데 이 정당의 정치라는 것이 결국은 제국최고회의에서 이루어지는 일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대국민 담화는 내년 총선거 이후, 태사가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에서도 물러나 행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분리하겠다, 그런 의미로 여겨집니다.]
[총선거를 겨냥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지금 태사의 백부, 선대 미승휴 태사의 시대가 지나고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죠. 내전 이후에는 한층 더 그렇고요. 그런 개혁에 대한 바람을 태사가 분명히 읽고, 내년 총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지지도를 확보하겠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죠.]
[하지만 아직 총선거까지 1년 넘게 남은 시점에, 그러니까 2대 최고회의 의원들을 선출하는 총선은 내년 6월의 일입니다만, 태사의 이번 담화는 너무 이른 게 아닐까요?]
[그렇게도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신감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죠.]
[총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군요.]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 고려가, 비상시국의 독재정 형태가 아니라 진정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입헌군주정,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원칙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 정도로 안정을 회복했다, 그런 자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입헌군주정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이런…… 생각도 떠오르는데, 지난번에 태사께서 다이온 각국을 향해 ‘입헌’을 촉구하셨었죠. 그 연설과도 관련이 있을지?]
[해석에 이견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충분히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각국에 입헌 개혁을 촉구하는 고려가 여전히 실질적으로는 독재정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즉 자유세계의 헌법 체계에 비해 뒤떨어진 헌법을 유지한다면 아무래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죠. 따라서 태사부는 이번 담화로 다이온 각국에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안세규는 손을 내저었다. 보좌관은 라디오를 꺼버렸다.
각료회의가 끝나고 나서 아주 잠깐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세규는 책상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미승휴 사후 3년, 즉 미리안 정권 3년. 이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어설픈 걸음마를 뗐던 정치평론은 어느새 꽤 성숙해 있었다. 과연, 그렇지. 그런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지.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바라던 형태로 국가는 나아간다. 그렇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태사의 저런 발표가 정치, 특히 국내 정치에 끼칠 영향은 냉정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비상에서 정상으로. 그것이 왜 고려국민당이 아닌 제국입헌당에서 행한 일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