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13)
그러나 배영훈은 과감히 생각을 진전시키기로 한다. 여기서 멈추고 ‘없던 일’로 취급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뭔가가 커지는 걸…… 방관하는 꼴이 되겠지.
그때 안세규가 미리안 쪽에 넘겨준 자들은 유지나와 양수영, 즉 감찰국 인사들이 맡아서 처리했다.
배영훈의 권한으로는 감찰국을 탐문할 수 없으니 추적은 거기서 끊기겠지만, 추정은 해볼 수 있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태사의 ‘안세규에 대한 의심’은 거기서 출발할 것이다. 그 의심이 마침내 자신에게 안세규의 뒤를 캐보도록 하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
등줄기에 흐른 식은땀을 차가운 밤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피부에 돋는 소름에 변명거리라도 만들어주려는 듯이.
상대가 ‘철저히 은폐’해서 뭔가 캐낼 순 없지만, 적어도 ‘뭔가를 은폐’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은폐에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내무성 ‘안쪽’을 엿볼 수는 없나.
그렇다면 ‘바깥’을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안세규의 최근 행보는 어떠했는가. 그걸 알아보자.
내무성을 직접 겨냥하진 않으니 ‘그림자’에겐 경고를 잘 알아들은 것처럼 비칠 테지.
배영훈은 어깨를 폈다.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은 쓴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어떤 웃음이든 내비칠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성이 되면 웬만한 일은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위로는 원수 각하들이 계시고, 그 위에는 또 대원수 각하께서 계셨다.
그분들의 뜻 앞에서는 소위처럼 움직여야 했다.
지금처럼 외국으로 나와 있는 상황에선 소장이라는 계급이 더욱 무색해졌다. 외국인들에게 바랄 수 있는 건 그 계급에 어울리는 예의 바른 대접뿐이었고, 그 이상은 없었다.
고려에 있을 땐 의견을 올리면서 대원수 각하께 닿을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지, 여기선 게레센제 카간에게 뭘 어떻게 전할 방법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게레센제가 보낸 이 ‘신원경제자원연구회’라는 자들에게도 말이 통하질 않는다.
“다이온 경제의 중요한 자산이 될 지역을 대원철도주식회사만이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공사장의 모래 먼지 때문에 고태용은 한껏 눈살을 찌푸린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입 안이 텁텁해지는 걸 느끼며 고태용은 반론했다.
“우리는 관세동맹으로 묶여 있고, 엄연히 다이온입니다. 우리가 건설할 자산과 그 경제적 효과는 그대로 다이온의 것이 될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잊으셨는지 모르겠는데, 고려의 법적 지위는 아직 ‘참관국’입니다. 대원철도주식회사가 사명(社名)부터 다이온의 미래를 지향하는 건 압니다만, 엄연히 고려의 회사 아닙니까. 우리는 감정싸움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법리를 따지자는 거죠.”
그들은 카간의 뜻에 따라 다이온 전역, 특히 경제적 요충지의 조사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지역의 인프라를 개발하면 얼마나 많은 인구를 모을지, 지리적으로 더 멀리 교통망을 뻗기에 적합한지, 주변 자원지대와의 거리는 얼마나 되며 이를 바탕으로 어떤 산업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우연인지, 아니면 성격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건지는 몰라도 이 ‘신원연구회’는 원철과 종종 갈등을 빚었다. 활동하는 영역이 겹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원연구회가 조사하겠다고 뛰어드는 곳은 이미 원철에서 조사를 마치고 경제적으로 적합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자리였던 것이다. 누가 봐도 이곳은 최적의 입지였다.
그래, 그렇다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신원연구회도 결국 게레센제 카간이 만들었다. 만들 때 분명 대원철도주식회사를 염두에 두었겠지. 이들이 와서 이렇게 딴지를 걸어대는 것도, 게레센제의 의도가 반영되었을 터.
하지만 대놓고 ‘당신들 이 사업 뜯어다 당신네 카간한테 바치려는 수작이잖아!’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따위 짓을 했다간 몽골 측의 항의가 들어오기도 전에 태사 각하께서 자신을 처리하시리라.
그러니 고태용은 호흡을 가다듬고, 최대한 논리적인 해법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런 논리가 상대방의 고집에 가로막힌다 해도 말이다.
“법리를 따지자면 우리는 키타이 정부에서 승인한 범주 내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키타이 정부는 다이온의 지방 정권일 뿐입니다. 다이온의 중앙 정부는 어디까지나 칸발리크의 쿠릴타이에서 추천하고 카간께서 승인한 정부죠.”
그 말에 고태용은 입을 다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서 옆 사람을 곁눈질한다. 아니나 다를까 중재한답시고 와 있던 키타이 측 사람이 그 말에 발끈한다.
“지방 정권이라니! 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엄연히 키타이에는 키타이의 법이 있어요. 다이온 연방을 존중하는 뜻에서 가만히 들어줬더니 못 하는 말씀이 없으시군요!”
“키타이 칸께선 몽골 중앙 정부의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겸하고 계시죠. 그런 엄연한 사실을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 키타이 칸께서도 결국은 몽골의 법을 따라야 하는 정부 관료이십니다.”
“그거야 다이온의 정세에서 비롯된 특수관계 아닙니까? 당신은 개봉회담에서 선포된 독립 주권 존중의 원칙도 못 들어봤소?”
“그게 참 명연설이긴 합니다만 권장 사항이지 법은 아니죠. 카간께서도, 쿠릴타이에서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은 하나의 ‘제안’이 어떻게 법적 구속력을 지닌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칸발리크의 의향이 왜 우리가 승인한 사업을 뒤엎을 정도의 위력을 갖춰야 하냔 말이에요!”
“지금까지 제 말을 대체 뭘로 들었…….”
논쟁이 끝날 것 같지 않자 이번엔 원철 관계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법리인지 뭔지는 잠시 치워둡시다. 이보쇼, 그…… 연구원님. 법적인 문제 말고, 뭔가 이 사업에 못마땅한 구석이 있으니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원철이 다이온 영토 내에서 벌이는 사업의 법적 절차만 문제 삼고 싶소만.”
“어허, 그러지 좀 맙시다. 아까는 원철의 독점이 문제라면서요? 요컨대 ‘독점이 아닌 상태’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쪽 뜻 아닙니까?”
신원연구회 쪽 사람들은 침묵한다. 침묵은 원래 많은 뜻을 품지만, 이번 침묵은 그중 긍정에 가깝다.
이들이 이토록 격론을 벌이는 주제는 바로, 새로 완성될 철도역 주변의 부속지(附屬地) 문제였다.
철도 사업은 철로를 깔고 역만 지어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려의 철도성 장관 임병욱이 칸발리크-동명 간 철도 사업과 함께 이 두 도시를 잇는 메갈로폴리스를 구상했듯이, 철도역은 사람을 모은다.
기차는 사방에서 자원을 모아 역에 내려둔다. 그 자원을 처리할 공장은 역 주변에 들어서고, 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이 모여든다.
회사는 그들이 머물 주택을 짓는다. 주택은 단순한 숙박의 기능만 하는 곳도 있지만, 회사가 고급 인력을 모으고 싶어 할수록 각종 혜택이 추가된다.
주택뿐이랴. ‘가족’을 데려오고 싶어 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들도 추가된다. 자녀들을 위한 교육 시설이 들어선다. 그러면 교사들도 찾아온다. 노동자 가족이 음식과 옷을 살 시장도 형성된다. 구멍가게에서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사람이 몰린 곳에는 당연히 환자들을 찾는 의사도 찾아온다. 상하수도의 설치와 정비를 위해선 또 다른 산업과 노동자들이 들어와야 한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혜택과 일거리를 교환하며, 도시가 되는 것이다.
철도역 주변의 부속지 사업은 바로 도시 건설 사업인 셈이다. 당연히 대원철도주식회사는 여기서도 막대한 수익을 올릴 계획이었다.
막대한 수익을 거두려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 법. 들인 돈이 있다 보니 대원철도주식회사의 신경은 예민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투자한 고객들에게 배당금을 나눠줘야 한다.
그런데 신원경제자원연구회라는 집단이 이미 벌여놓은 사업을 물리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게, 그쪽 연구회에서 따로 사업을 벌일 역량이 없으면 차라리 우리한테 투자하면 그만 아닙니까? 땅도 다 다져놓고 이제 철도 깔고 도로 깔고 건물 올릴 일만 남았는데, 이제 와서 물러나라 하면 그건 우리 사업을 날로 빼앗아 먹겠다는 게 아니오?”
“빼앗는 게 아니라, 마땅히 다이온에 귀속되어야 할 자원이 돌아가는 겁니다.”
“참 답답하네……. 그럼 뭐 보상금 계획은 있소? 어? 우리도 사업체인데 이렇게 돈을 허공에 날릴 수는 없지. 뭐 돈을 주고 사 가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 멀쩡한 사업을 그냥 내놓으라니.”
“법적 절차만 문제 삼는 겁니다. 그 절차만 해결되는 대로 사업은 재개하면 되는 거죠.”
“아, 이 양반들이 진짜! 그럼 그동안 당신네들 이 땅 그대로 놀려만 둘 거냐고! 당신네들이 여기다 자기네 장사 벌일 거잖아! 사람을 무슨 머저리로 아나…….”
고태용도 슬슬 짜증이 한계까지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신원경제자원연구회 사람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맞질 않는다.
처음에는 원철의 독점 상태를 문제 삼았다. 원철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체, 이를테면 연구회 자신들이나 ‘몽골계’ 기업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다 법적 절차상의 문제로 칸발리크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느니 뭐니 하다가, 또 절차만 마치면 문제가 없을 듯이 상대를 달래려 든다. 이쯤 되면 달래는 게 아니라 우롱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말을 하면 저 말로 도망가고, 저 말을 하면 이 말로 돌린다.
대화 상대방의 ‘짜증을 유발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다.
즉, 시간을 끌면서 이 사업을 ‘방해’하는 것이야말로 신원경제자원연구회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곁눈질하자 원철 사람은 씩씩대며 눈빛으로 뭔가 신호를 보낸다.
그렇다. 원철은 단순한 회사가 아니다.
원철은 고려의 군대, 즉 제국정보사령부와 서부군의 지원을 받는다. 둘 다 직간접적으로 회사에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병력을 파견해 그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돕는다. 정보부는 요인 경호 병력 정도를 보냈지만, 서부군은 철도를 순찰하거나 공사 현장을 지킬 정도의 부대를 보내 회사를 도왔다.
그뿐인가. 태사부에서도 자금을 투입했고, 카라코룸의 류성일도 자금을 투입한 데 이어 행정장관의 직속 병력 일부를 보내왔다.
그들 모두 임시로 회사의 직원으로 등록해 여기까지 따라왔다.
즉, 여차하면 총칼을 들이대서 저 밉살맞은 연구원을 내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원철 직원은 고태용에게 눈짓으로 ‘윽박질러 볼까요’ 하고 묻는다.
고태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 병력을 ‘지금’ 쓸 수는 없다. 태사도 감찰국장도 그렇게 대놓고 소란을 피운다면 좋아하지 않겠지. 물론 고태용의 성미로도 상대를 몰아붙이는 쪽을 선호하긴 하지만…….
감찰국장과의 ‘합작’을 원만하게 이어나가려면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쪽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합작’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