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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56화 (356/541)

입헌혁명(12)

조금만 엇나갔다면 서로 죽이려 들었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봄기운이 슬금슬금 올라온다곤 하지만 저녁은 여전히 쌀쌀하다. 그렇기에 서로의 앞에 앉은 사람은 달갑지 않을지 몰라도, 김이 피어오르는 수육 국밥 두 그릇은 반갑다.

넣을 반찬과 밥을 다 넣고 숟가락으로 찍듯이 섞은 후, 잘 정리되지도 않은 밥과 야채와 고기와 국물을 한껏 떠서 입에다 일단 넣고 본다. 입천장이 까지도록 뜨겁다.

국물이 입가로 흐르지만 손가락으로 스윽 닦아내면 그뿐. 배영훈은 입 안에 든 밥알을 씹어대며 ‘그림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림자 사내는 배영훈보다 조금 전에 먹기를 멈추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태사…….”

배영훈이 황급히 손을 들어 그림자 사내의 말을 막았다.

“아, 우리는 그냥 어쩌다 국밥집에서 합석했지, 서로 ‘모시는 분들’을 위해 일한다는 건 모르는 걸로 합시다.”

정치권에서 ‘누구나 아는 견제’와는 상관없이, 태사와 내무장관 사이의 대립은 ‘없는 일’이어야 한다.

여기서 어느 쪽이든 실명이나 직위를 언급한다면 싸움은 ‘실제로 있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지금의 이 충돌은 수면 아래의 일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언젠가 두 집단이 ‘휴전’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를 죽일지도 모를 함정을 파면서, 혹시 모를 휴전에 대비한다는 건 우습긴 하지만.

그림자 사내가 이죽댄다.

“그쪽이 모시는 분께선 그렇게 소란을 싫어하시는데, 어째서 그쪽을 보내서 여기저기 들쑤시시는지 모르겠군.”

“그건 내가 할 말이오. 당신이 모시는 분은 왜 이쪽을 불편하게 해서 굳이 이런 사태에 이르게 하는지.”

“비밀은 힘이지.”

그림자 사내의 그 말에 배영훈은 손만 움직여 국밥을 입으로 옮긴다. 눈은 그대로 그림자 사내를 쏘아본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그 비밀이 구린지 그렇지 않은지, 혹은 정말 그럴싸한 비밀을 안고 있는지 아니면 비밀이 있다고 허세를 부리는 건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비밀이 있는 것 같다’는 그 인상이다……, 그런 말이군.”

“똑똑하구만.”

“멍청하면 이 일 어떻게 해 먹겠소.”

“그래, 멍청하지 않다니까 하는 말인데, ‘비밀을 지켜주면서’ 이번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어떨지.”

“손 안 떼면 어떻게 되는데?”

“불행한 일을 당하겠지.”

배영훈은 수저를 놓고, 배가 부르다는 듯 상체를 죽 뒤로 물렸다.

얼굴에는 못마땅함을 가득 담아.

그러다 피식 웃는다.

“당신 이런 식으로 일 처리 안 하잖아, 원래.”

이번엔 그림자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하려거든 단박에 내 목을 찔렀지, 이렇게 해라 말아라 하는 건 당신 방식이 아니지. 당신, ‘그림자’라고 불리긴 하는데 별명하곤 다르게 너무 오래 양지에 나와 있었어.”

그림자 속에서 일하는 자라 해도, 그가 남긴 흔적은 햇빛 아래 드러나기 마련이다. 햇빛이 비치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해도 그 흔적은 반드시 누적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하는 점에서 이미 당신은 나한테 그럴 수가 없는 거야.”

“…….”

그림자는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찔러주마, 하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추태야말로 그의 자존심을 긁는 일이었다. 배영훈은 만용을 부리다 죽는 꼴이지만, 자신도 배영훈의 도발에 넘어가 모든 일을 그르친 꼴이 될 테니까.

“인정하지. 이쪽이 곤란한 상황인 건 맞아.”

“……그럼 국밥이나 마저 들자고.”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숟가락을 든다. 뚝배기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날 무렵에 그림자 사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당신, 꽤 대담한 사람이군.”

“그 유명한 ‘그림자’에게서 칭찬을 받다니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주인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말이야. 꼭 회사원처럼 생겨서.”

“그렇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긴 하는데, 그러니까 그쪽은, 내가 여차하면 도망칠 인간으로 보였다는 건가?”

“충성할 만큼은 해보고, 정 안 되겠으면 그럴 사람처럼 보였지.”

핫, 하고 배영훈은 웃었다. 어쩌면 그 자신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영훈은 자신이 ‘도망쳐야 할 때’를 구분할 안목은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게 이기기 위해서 잠시 물러서는 건지, 아니면 몰락의 징조인지 뭔지 전혀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전 이후에 아직 위관에 불과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때보단 시야가 넓어진 것 같지만.

게다가 그림자 사내의 말처럼 목숨 걸고 충성을 관철할 정도로 대담하진 않았는데, 때가 왔을 때 배신하고 도망칠 정도로 대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배영훈은 태사 휘하에 눌러앉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3년이 지나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신이 날 죽이진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 점은 그쪽도 이해하지 않나?”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이유가 없으면 없을수록 내버려 둘 수가 없지. 없다는 걸 들켜선 안 될 테니.”

아주 그냥 구렁이처럼 넘어가는구만. 배영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림자 사내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야 그쪽 한 번 푹 찌르고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리면 그뿐이야. 제국정보사령부라 해도 나를 잡을 방법은 없어. 그런데 피해는 그쪽만 목숨 잃는 걸로 끝나지 않아.”

“맞아. 나도 별로 죽고 싶진 않지만, 죽는다면 우리 쪽에선 그걸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지. 그쪽에선 그 부담 때문에 더더욱 나를 죽일 수 없고.”

“이해를 못 하는 것 같군. 그러니 스스로를 죽을 상황으로 몰아넣지 말라는 이야기다.”

“죽을 상황 자체가 오지 않는다니까.”

“상황은 좋을 대로 예측하는 게 아니야. 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그림자 사내의 말을 듣고, 배영훈은 뭔가 걸린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그게 그쪽과 이쪽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해도 말인가?”

“도망칠 구멍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면 별수 있나?”

“그런 태도는 오히려 이쪽에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데.”

“그쪽이 그렇게 받아들여도 우리 쪽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전쟁 한판 벌이는 게 나을 상황이라면?”

선택을 강요당한다는 건 그런 거다, 라고 그림자는 덧붙였다.

“설마 그 정도까지 극단으로 치달을까?”

“치닫지 않으리라는 근거는 있나?”

“치달으리라는 근거도 없잖아.”

그림자 사내는 국밥을 다 먹어 치운 후, 트림 한 번 하고는 대답했다.

“고려의 내전, 빨리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래,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몽골 내전도 한쪽을 끝까지 몰아붙여 섬멸시켜야 끝났고, 아즈텍 내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야. 그에 비하면 고려 내전은 이례적일 정도로 짧게 끝났어.”

“그게 어쨌다는 건가. 우리 고려가 운이 좋았다는 걸 기뻐하면 그만 아닌가.”

운 좋게 허동주라는 머리를 잘라낼 수 있었다. 머리가 잘린 반란군은 빠르게 무너져 내려갔다. 신수덕이 산동에서 난리를 피우고, 삼한반도의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가 날뛰긴 했지만, 그것도 금방 제압되었다.

“아니지, 아니지. 정말 답답한 양반이군. 그 후에 동명역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지 않았나.”

“그것도 무사히 진압했지.”

“요점은 이거야. 왜 그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가, 혹은, 자네 쪽에서는 왜 그걸 진압해야만 했나.”

“반역이 일어나면 진압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했지만 배영훈도 이 그림자 사내의 말을 서서히 이해해가고 있었다.

“지난 내전은 완전히 불타오르지 못했어.”

“아직 불탈 게 남았는데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 남은 불씨가 타오른 게 쿠데타 시도였다?”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가 보군.”

“당신 말대로라면 아직도 불탈 게 남았고, 그게 그쪽 사람들의…… 뜻인가? 수틀리면 내전 한 번 더 일으키겠다는 게?”

“내전을 일으키겠다는 뜻이 있는 게 아니야.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만이 있는 거다. 대체 몇 번이나 설명을 반복하게 할 셈이지.”

“내겐 두 말이 같아. 나머지는 말장난이지.”

그림자 사내는 일어섰다.

“밥값은 그쪽이 내는 걸로 알겠어. 이야기 값은 해야겠지? 나는 충분히 경고했다고.”

***

국밥집을 나서는 배영훈의 머릿속에는 ‘제2차 고려 내전’이라는 개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그건 저쪽도 동의하긴 한다. 그러나 저쪽은 일이 터지면 대결을 마다하진 않겠다는 태도다.

그게 허세일지, 진심일지는 정말로 그런 상황이 되어 봐야 알겠지.

그러면 어쩐다.

-어차피 안세규의 뒤를 더 캐보긴 어렵다.

돌파구가 없을까 주변을 맴돌았을 뿐, 저 ‘그림자’가 오늘 경고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안세규를 직접 파고드는 일은 그만뒀을 것이다.

상대는 은폐에 아주 능하다. 배영훈 혼자만의 능력으론 이 이상은 어렵다.

그렇다고 이대로 별 성과 없이 태사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저들이 감춘 ‘비밀’이 생각보다 거대한 건 확실하다.

비밀이 별것 아니거나, 애초에 비밀이 없다면 그저 ‘체면 문제’로 끝날 일이다. 체면 손상을 감수하는 쪽이 내전…… 에 준하는 어떤 사태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낫다.

허나 그림자 사내는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저 남자가 저렇게 나올 정도면 안세규와 구 민국정부를 둘러싼 비밀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야 할 무언가일 터.

느낌은 확신이 되어간다.

그리고…… 배영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내전, 친위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총성. 그때 처음 죽였던 장교. 주견하는 그를 조사해보라고 했었지.

그때 그 소령은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인간으로 추정했었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일부 좌익 파벌이 허동주와 미리안 사이에서 뭔가 책략을 꾸몄고, 그 결과 내전이 터져 나왔다면?

그런 추측은 내전 당시에도 있었지만, 친위혁명의 당위성을 확보해야 했던 미리안 정권은 모른 척해버렸다.

그래도 안세규는 가만히 있긴 뭣 했는지 고려민국 임시정부 내의 ‘황제와 태사에 반대하는’ 인간들을 숙청 겸해서 미리안에게 넘겨주었다.

그걸로 미리안이 넘어가 주는 데 대한 ‘성의’ 표시는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안세규가 단순히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 외에, 다른 것이 더 있다면?

-그게 눈속임에 불과했다면? 더 큰 비밀이 감춰져 있다면?

뭐가 걸리기라도 한 듯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안 돌아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 그 이상 생각하길 거부하고 있다.

좋지 않은 예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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