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11)
고려가 무슨 자격으로 동아시아의 공화와 민주를 지도하는가? 그저 침략의 다른 이름 아닌가? 이 질문에 태사가 직접 ‘그렇다면 나는 내 권력의 절반을 내려놓겠다’고 답변하는 것이다.
누가 이 가장 큰 증거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리안의, 루우의, 견하의 정책은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층의 지지를 받으며 추진력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여당, 제국입헌당 산하 대학생 조직에 호기심을 품는 이들도 늘어나겠지. 그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일까. 고려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놓을까.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안세규와의 약속은 지키면서, 태사 미리안의 언행을 통해 조직은 저절로 확대되는 셈이다.
물론 그 생각은 견하 혼자 가슴 속에 묻어뒀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듯,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처신할 것이다.
당연히 루우도 그런 견하의 생각은 모른다.
그녀가 견하를 따로 불러서 물은 건 다른 문제였다.
“안세규와 류성일 사이의 결속은 어떤 것 같아?”
“속내는 쉽게 안 드러내던데.”
“여기서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인간이 어디 있어.”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 루우를 보며, 견하도 그건 그러네, 라며 마주 웃었다.
“파악까진 아니더라도 짐작 가는 게 있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며 루우는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책상다리를 한다. 복사뼈 위에 양손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견하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한다.
흥미 가득한 눈동자.
자세 때문에 치켜 올라간 어깨, 장난스레 까딱이는 무릎뼈가 그리는 선이 예쁘다.
그런 그녀에게 ‘적절히 걸러낸’ 이야기만을 들려준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견하의 혀를 막지는 못했다.
“류성일이 자신이 쫓겨난 이유로 안세규를 지목했다는 사실을 들이밀어도, 안세규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어.”
“동요하지 않는 게 수상하다는 거야?”
“그런 식으로 의심하는 건 좀 억지지. 마찬가지 논리로 안세규가 동요하는 반응을 보였다면 ‘왜 동요하지. 도둑이 제 발 저린 건가’하면서 의심할 수 있으니까.”
전혀 합리적인 의심이라 할 수 없다. 좀 더 세심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추리가 필요하다.
“정황을 보고 가능한 모든 방향의 추정을 열어두는 수밖에.”
리안도 견하도, 루우에게 들어서 안세규와 류성일 사이의 제휴에 대해선 알고 있다.
문제는 지금도 그 제휴가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류성일의 입에서 ‘안세규’ 석 자가 튀어나왔다면 두 사람의 동맹은 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루우의 추정은 타당하다. 하지만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뱉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걸로 나를, 우리를 안심시키면서 뒤로는 계속 안세규와 손잡은 채일 수도 있어.”
당장 안세규의 이름이 나왔어도, 그 이상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증거도 없거니와, 그래서 안세규가 도대체 뭘 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를 써먹기 좋은 말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느낌은 지난번 칸발리크 테러 때, 아직 법무장관이던 류성일이 순순히 견하의 요구에 응했던 때부터 받아왔다.
카라코룸에서도 그랬다. 어떻게 보자면 공개적으로 꺼내긴 ‘부적절한’ 말을, 하필이면 주견하 앞에서 꺼냈다.
뒤통수를 잡아당겨 돌아보게 만드는 꺼림칙함.
이는 안세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둘 다, 서로를 이용 대상으로 보면서 동시에 주견하 또한 이용 대상으로 보고 있다.
“나와 상대방을 저울질하고 있을지도 몰라. 언제든 내 뒤에 붙어서 서로를 제거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아니면 반대로, 서로가 힘을 합쳐 나를 제거할 속셈이든지.”
3년 전이었다면 견하는 그런 생각을 피해망상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이용당한다는 감각을.
그 자신이 누군가를 이용하기 때문에, 아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주견하 너를?”
루우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 선에서 끝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견하가 리안의 측근이고, 루우의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음을 두 사람이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안세규나 류성일이 누나나 너까지 거스를 각오를 했다곤 생각되지 않아. 훗날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일차적으로 나를 없애는 게 그들에겐 좋겠지만…… 당장은 너나 누나의 정책에 순응할걸.”
그 근거로 둘 다 원철에 자금을 투입하는 등 일단 겉으로는 협조하고 있다.
“두 장관이 너만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미련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밖에.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태사가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내가……”
루우는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아주 살짝 망설였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몰랐으니까.
“……단순히 여러 신하 중 한 사람으로만 여긴다고 착각하는 걸까.”
루우는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도 죽어. 정략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감정적인 이유로.”
견하는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한 채, 루우의 그 말에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네.”
미소 짓는 그 옆모습을 보다, 루우는 조금 답답한 마음에 덧붙였다.
“황제도 태사도 지지하니까,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지킬 가장 효과적인 방책을 생각해두라는 거야.”
“그거야 늘 생각해두고 있지.”
견하는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옆의 이 소녀는, 견하가 ‘자신이 없어도 작동할 시스템’을 우선해서 만들어뒀다는 건 생각하지 못하겠지.
그는 루우가 뭔가 알아차리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그저 말을 돌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알아둬야 하는 것이었고, 그가 궁금해하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 카간이 될 마음이 선 거야, 황제?”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루우는 흔쾌히 답했다.
견하는 그런 그녀를 기억 속의 소녀와 대조해본다. 칸발리크 하늘을 뒤덮은 혁세주에게 아버지 카간을 막 잃은 직후의 루우 테무르를.
그때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견하에게 호소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이런 식으로 카간이 되는 건 생각 못 했어.
그건 태사 미리안을 정점으로 한 고려 정부도 마찬가지였기에, 견하는 징검다리로서 게레센제를 골랐었다.
“무엇이 우리 폐하께서 결심을 세우게끔 했는지 궁금하군.”
“글쎄. 슬슬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루우는 다시 한번 견하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오래전의 따스한 사랑이라는 형태로 기억에 남았다. 돌아오지 않을 사랑이지만 그런 사랑은 유일한 사랑이었기에 루우의 마음에 아릿한 위로로 새겨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시레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상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길은 막혔다. 시레문은 영원히 루우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루우는 풀지 못할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능력 바깥의 문제에도 최선을 다하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을 풀어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미련한 인간은 아니다.
물론 풀지 못한 문제는 평생 그녀의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겠지.
그러나 루우는 또한, 응어리를 안고 살아갈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그렇게 성장했다.
대신 그녀는 확실한 것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투글룩이 몽골 정부가 아니라 고려로 망명한 것. 그가 시레문은 형제들이 아니라 딸을 후계자로 골랐으리라 말한 것. 볼로드가 그녀를 지지하는 것. 이렇게 친구들이 있는 것.
고려에서 만난, 친구들.
그중에서도 견하는 어쩌면, 루우가 계속 생각해왔으며 늘 부족하다고 느꼈던 아버지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루우는 그 감정을 명확히 말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견하는 ‘아버지가 해줬으면 하는 일들’을 해주었다. 그녀의 마음이 기댈 기둥이 되어 주었다. 물론 아버지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부족함마저도 루우에겐 이상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가져본 적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이라는 모순된 감정.
어쩌면 루우는 견하를 자신의 ‘큰오빠’ 같은 존재라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혹은 큰오빠를 넘어선 누군가로.
딱 거기까지 생각하고, 루우는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어쨌든,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아. 나는 몽골의 카간이 되어, 고려와 몽골 두 나라의 동군연합을 이룰 거야. 더 미루진 않겠어. 앞으로는 일직선이야.”
다시금 루우의 눈이 똑바로 견하의 눈으로 향한다. 미소 없이,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만든다.
“그러니 충신이여, 짐의 야망을 이루어 주겠는가?”
견하는 반쯤 장난으로, 그러나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대로.”
***
재빠르다.
배영훈은 ‘그림자’와 대면하자마자 직감했다. 이 사내와의 대결로 죽을 수도 있겠다.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해 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명성은 익히 들었다. 반국가단체 고려민국 임시정부에는 ‘그림자’라 불리는 인간, 혹은 집단이 있어서 요인을 암살하곤 한다고.
물론 ‘그림자’의 명성을 들을 당시 배영훈은 수도 근처 사단의 소대장, 중대장이었기에 그것을 직접 접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고 봐도 좋다.
그가 ‘그림자’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건, 그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태사의 측근이 되고부터다.
얼떨결에 태사부로 편입되어 태사의 측근으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주견하 및 나제홍이 이끄는 정치경찰실과 교류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제국정보사령부에서도 몇 차례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다. 태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도 있다.
전역을 할 수는 없으니 운명을 한탄하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권력 핵심의 여러 경험을 쌓아나갈 수밖에.
배영훈을 따라오는 ‘그림자’는 무서울 정도로 그를 따라붙지만, 일정 이상 다가오진 않는다.
-역시, 나를 죽이기엔 부담이 너무 큰가.
하지만 이젠 미행이 아니다. 상대에겐 몰래 따라올 생각이 전혀 없다. 대놓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구 드러낸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압박감이 배영훈의 오금을 찔러댔다.
-이것은 경고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뒤를 캔다는 걸 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자비는 여기까지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선을 넘어선다면 우리도 당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른다.
지난번 미행 때는 상대방을 골목으로 유인한 뒤 반격할 계획을 꾸며봤지만, 이 상대는 그럴 여지도 주지 않는다. 무시무시하다.
무력이라는 수단에 의존할 수 없다면,
이건 어떨까.
배영훈은 홱 돌아섰다. 미행을 감추려 들지도 않는 ‘그림자’는 그의 뒤, 인파 속에 똑바로 서서 노려보고 있다.
배영훈이 뚜벅뚜벅 다가오는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마침내 주먹을 휘두르면 닿을 거리까지 와서야 배영훈은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그림자’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이쯤 합시다. 우리 둘 다 높으신 분들 일 처리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나 나누죠. 밥은 드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