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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54화 (354/541)

입헌혁명(10)

“울제이 숙부가 카간 자리를 향한 야심을 포기할 리 없으니.”

루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중얼거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선 술잔을 들어 입가를 적신다.

오랜만에 네 사람이 다시 가진 술자리였다.

“울제이는 내가 루우의 카간 계승에 앞장선 첨병이라 여길 거야. 그러니 볼로드를 압박하면서도 나를 견제할 수밖에.”

“하지만…… 언니의 요구에 응한 건 협조지 견제가 아니지 않나요?”

효윤의 질문에 리안은 빙긋 웃었다. 자신도 이 역설이 재미있다는 듯.

“협조이면서 동시에 견제지.”

울제이의 결정은 어떤 면에서는 파격적이라 할 만했다. 그는 요청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개혁을 받아들였다.

시위가 제대로 폭발할 틈도 없었다.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키타이 국민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울제이가 그 어떤 반발이나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자, 시위대는 의아한 얼굴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울제이 칸의 용단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나오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개혁이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한 거야.”

리안은 루우를 보며 씩 웃었다. 루우는 잔을 내려놓고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권력을 좀 내려놓는 대신 존경과 권위를 얻는 거지. 생각보다 괜찮은 거래라고?”

“그래, 괜찮은 거래지. 이제 칸발리크 정계에서 슬슬 루우 테무르가 아니라 울제이가 카간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울제이 입장에선 볼로드를 몰아내고 난 후, 그 공백을 이용해 칸발리크로 침투할 고려 세력 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들이밀 틈을 만들 수밖에.

“찬사는 몽골계나 스스로 ‘몽골화’되었다 믿는 한족들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야. 그런 한족들 중에선 정말로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착취하는 무리도 있지만, 오명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을 위한 청원을 내놓는 자들도 있지.”

그들은 칸 앞에서, 칸의 결단을 칭송하면서 조심스레 입헌 개혁의 과실을 평범한 한족 백성들도 받을 수 없는지 물었던 모양이다.

“울제이는 거기서도 지혜롭게 대처했어. 부정하는 말은 일절 입에 담지 않고, ‘한족 출신 의원들은 제헌의회에서 동포들을 위한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든가, ‘그 헌법 위에서 한족들은 자유로이 법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지.”

희망을 준 거야,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그런 희망은 훌륭한 지지 기반이 된다. 봉기가 진압된 직후라 한족들은 의기소침해져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참정권’의 유혹은 정말로 달콤한 냄새를 풍기겠지.

키타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초월한 ‘국민’들의 국가로 거듭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한족들이 당장 몽골 사회 주류만큼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겠지만, 한족까지 포괄하는 개혁의 소문은 동아시아의 모두를 뒤흔들 것이다. 고려에 이어 키타이가 또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셈이다.

키타이를 본받자, 울제이 칸을 본받자.

칸발리크 정계뿐만 아니라 낭키아스를 포함한 동아시아 각지의 지식인들을 설레게 할 것이다. 울제이의 정책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는 자들도 있겠지. 게르만 지식인들이 나폴레옹 1세를 절대정신이라 찬양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지지는 울제이에게 크나큰 힘이 되어 주겠지.”

“교활하다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솔직히 지혜롭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누나가 제시한 「대타협 계획」에도 잘 들어맞고.”

“하지만 울제이의 정책은 지나치게…… 대중에 영합하는 게 아닐까요. 단순히 자신의 카간위를 위해 언니 정책을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면서 경쟁심만 불태우는 게 아닌지.”

“포퓰리즘이 아닌 정책은 존재하지 않아, 효윤아.”

리안은 타이르듯 그렇게 말한다. 눈을 조금 크게 뜨는 효윤을 향해, 리안은 나긋한 어조로 설명했다.

“어떤 정치가가 면밀히 검토해서 신중하게 내놓은 정책은, 뭐, 애국심도 있겠지만 어쨌든 정책이 ‘성과’를 내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유지, 확대하기 위함이야.”

그리고 국민은 ‘지지’를 미끼로 자신들에게 맞는 정책을 유도한다.

그것은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재확인한 민주국가든, 주권이 군주에게 있다고 규정한 군주국이든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다.

신도들이 없는 종교는 종교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가는 그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독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자가 국민을 함부로 마구 죽여도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러길 바라는 ‘지지자’가 있기 때문이다.

“뭐, 당장 볼로드의 ‘황정회’와 척지는 정책이긴 하지. 그쪽 사람들은 개혁을…… 혐오하니까.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로 카간까지 오른다 해도 황정회 세력이 방해물로 작용할 거야.”

그러한 사실은 루우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그녀도 언젠가 카간을 겸하게 되는 날, 황정회 같은 집단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루우는 그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카간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 중에 제거할 것인가.

“어쨌든 울제이는 이 판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 그런 자는 오래 살아남지. 게레센제가 그자의 권력을 완전히 빼앗지 못하는 건 단순히 혈육이어서만은 아닐 거야.”

“그럼, 태사는 그에 대한 책략이 있겠지?”

반쯤은 장난으로, 또 반쯤은 신뢰를 담아 황제는 묻는다. 그런 루우를 보는 리안의 얼굴에서 잠깐 표정이 사라졌다가, 이내 웃음이 돌아왔다.

“이번에 개봉에 다녀오면서 생각해 둔 게 있어.”

기차 안에서 홀로 웅크리고 앉아 무척 깊이 고민했건만, 리안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태사와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겸하고 있지.”

말하자면 행정부 수장이 입법부의 수장도 겸한 상태. 바람직한 형태의 권력 구조라 보긴 어렵다. 게다가,

“업무량도 너무 많고 말이야. 그래서, 내년 총선거에서 승리하면 태사직만 맡으려고 해. 아, 제국입헌당 당수 자리도 내놓을 거고.”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루우와 효윤의 곁눈질은 빠르게 견하의 얼굴을 훑었다.

리안을 알게 된 이래, 그녀의 권력 확대에만 몰두해 온 남자다. 그런 그가 이런 ‘권력 분립’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꽤 격하게 반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견하는 동의를 표했다.

“그게 누나가 울제이한테 던지는 ‘반격’이군요. 개혁 앞에 더 큰 개혁을 던져서 의미를 퇴색시킨다…….”

연인의 이해에 만족스럽다는 듯 리안은 웃었다.

“맞아. 입헌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실제로 완성된 ‘헌법’의 형태가 어떨지는 아무도 몰라. 헌법이라는 형태만 취하고 실상은 ‘칸은 키타이에서 무제한의 권력을 누린다’고 규정하면 의미가 없지.”

바로 그 부분에서 울제이의 발을 건다.

“키타이, 낭키아스, 몽골. 이 세 나라뿐만 아니라 역외사국에 이르기까지, 겉으로는 입헌군주정이라 내세우면서 정작 제대로 된 성문헌법을 갖추지 않은 나라들이야. 권력은 편중되어 있고 견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을 안 하지.”

여기에는 루우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 시레문도 그러지 않았던가. 세계대전 이래 그는 몽골군의 최고사령관이었으며, 각종 정책에서도 행정과 입법 모두를 그의 뜻대로 처리했다.

“우리 고려가 먼저 입법부와 행정부를 분리한다고 하면, 주변국들에겐 꽤 큰 자극이 될 거야. 입헌 개혁 요구도 훨씬 구체적으로 변하겠지. 고려처럼 ‘권력 분립’을 반드시 헌법에 넣어야만 한다고 말이야.”

권력 분립 요구는 볼로드의 따귀를 세게 때릴 것이다.

형 시레문처럼 카간의 권한을 누리려는 게레센제도 멈칫하겠지.

“하지만 그 두 사람보다도 울제이에게 미칠 타격은 더욱 크겠죠. 울제이가 키타이에서 누릴 권력뿐만 아니라, 몽골에서 누리는 권력도 일정 부분 내려놓아야 할 테니.”

카간 자리를 두고 게레센제와 울제이의 대립이 무력 분쟁으로까지 격화되던 때.

먼저 카간의 어좌에 앉은 게레센제는 울제이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키타이 칸의 자리에 더해, 몽골에서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겸하라는 제안.

울제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카간 자리를 둘러싼 형제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다이온 연방이 수립되고 몽골이 그 수장 국가가 되면서 울제이는 자연스레 다이온의 내무장관과 전쟁장관도 겸하게 되었다.

행정부의 수장과 입법부의 수장을 겸하는 리안과는 양상이 다르지만, 울제이가 그 한 몸에 두른 권력도 어마어마하긴 마찬가지다.

리안의 선언을 통해, 그 권력은 새삼 사람들의 눈길을 끌 것이다. 사람들은 울제이의 권력이 말도 안 되게 거대하다는 걸 알게 되겠지.

필연적으로 입헌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울제이가 누리는 권력의 해체를 요구하리라. 내무성의 권력은 내무성으로, 전쟁성의 권력은 전쟁성으로, 키타이의 권력은 키타이로.

“울제이가 누나의 이 공세를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지경이네요.”

“견뎌도 좋고, 못 견뎌도 좋지. 부드럽게 받아넘기든 완고하게 버티든 타격은 갈 테고, 끝내 무너진다면 루우의 경쟁자 하나가 저절로 제거하는 셈이고.”

그리고 다이온의 불안 요소가 하나 줄어드는 것이기도 하다. 울제이의 존재는 다이온의 다른 모든 구성원과 충돌할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커다란 불안 요소다.

리안의 미소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변했다.

“뭐 여기엔 얄미운 일본을 향한 야유도 들어가 있어. 그쪽 사람들, 은근히 ‘고려의 민주공화는 가짜’라는 식으로 신경을 건드리거든.”

“일본이 꽤 까탈스러운 외교 상대라는 건 외무장관한테 듣긴 했어요.”

“그래. 하지만 우리는 다이온 일로도 바쁜 데다, 아즈텍 대륙의 복잡한 정세에서 지켜줄 방파제가 필요하지.”

그러니 일본공화국과의 우호는 달갑진 않아도 유지하는 편이 좋다.

당장 주권선, 이익선 문제가 튀어나와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있고.

그렇게 효윤이나 루우의 우려와는 달리, 견하는 리안의 선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

무엇보다도 견하는 리안의 ‘권력 분립’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알고 있었다.

고려국민당을 비롯한 야당의 영향권에 있는 대학생 조직들이 요즘 무엇을 토론하는지, 귀를 기울여 두었던 덕분이다.

왜 태사는 제국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놓지 않는가.

적어도 다음 총선 이후로는 두 자리에 한 사람이 앉지는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분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을 갖춘 진정한 공화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나.

그런 불만이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리안 쪽에서 먼저 ‘약속’을 한다.

이는 안세규가 제시한 ‘전 아시아 개혁론’의 메시지와 겹쳐지면, 대학생들 사이에서 정말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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