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9)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갑자기 바꾸고 싶진 않았네. 내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갑자기 변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흠.”
짧게 콧소리를 내곤, 견하는 자세를 좀 더 공손하게 고쳐 앉았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해 줄 셈인 듯했다.
“장관님께선 이 협조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으신 듯하군요.”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진다고 그대로 맞고만 있을 순 없지. 급하면 피해야 하지 않겠나.”
“저는 그저 감찰국장에 지나지 않으니 그리 큰 우산을 내어드릴 순 없습니다만…… 우산을 내어드릴 분들과 다리를 놓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세규는 바로 얼마 전에 태사와 황제 모두에게서 완고한 벽을 느꼈다. 그런 그녀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그만한 이득이 또 없을 터.
그러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한탄이 목구멍 안쪽을 쓰리게 한다.
분명 내각의 장관인데, 황제는 그의 상주를 물리치고 태사는 각료회의에서 나누는 이야기 외에는 대화하려 들질 않는다.
정치경찰실장도 아니고 그 밑의 감찰국장에게 의탁해야 하는 처지라니.
그런 한탄을 아는지 모르는지, 견하는 뭔가를 잠깐 생각한다. 그러더니 아까 시치미를 뗄 때와는 다르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에 카라코룸을 찾았을 때 류성일 장관도 비슷한 부탁을 하더군요.”
“……그랬었나.”
짐작이 사실로 변해가는 순간, 상반된 감각이 가슴에 동시에 차오른다.
그러한 사실을 예측해 낸 자신의 통찰에 대한 자부심과,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났음을 확인한 섬뜩함.
견하는 세규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핀다.
류성일에 대해 별말을 늘어놓지 않는 걸 보면, 안세규는 류성일과의 동맹 연장 또는 파기에 있어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의 동맹 문제는 생존 문제이기도 하다. 안세규는 섣불리 류성일을 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더 강대한 자에게 잡아먹히는 일을 막으려 한다.
확실히 그 정도로 미련한 인간은 아니지만…… 흔들어는 볼까.
“류성일은 동명 정계에 복귀하고 싶어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안 장관님과 같은 비슷한 부탁을 제게 하셨죠.”
“비슷한 부탁이었다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초조한 속내를 비치는 행위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규에겐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를 얻고 대처 방안을 강구하려면 상대에게도 내 정보 일부를 내어줄 수밖에.
“카라코룸 행정장관으로서 원철의 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동명 정계에 복귀할 수 있도록 ‘태사 각하의 오해’를 풀어달라고 하더군요.”
“각하의 오해라. 류 장관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견하가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예. 자신이 받은 오해가 다름 아닌 내무장관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거기서 흠칫 놀라며 감정을 드러냈겠지만, 안세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견하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류 장관이 동명에서 쫓겨난 건 태사 각하의 뜻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뜻일 텐데. 류 장관이야말로 괴상한 오해를 하고 있군.”
견하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는다.
-안 흔들리나? 아니면 역시 안세규는 보통이 아닌 건가?
-1929년 4월의 일에 류성일이 뭔가 수작을 부렸는지, 아니면 류성일 말대로 안세규가 뭔가 꾸민 건지 당장 알아낼 수는 없나.
그렇게 짧게 가늠해 본 후, 견하는 동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슬슬 은퇴를 생각하실 때가 됐죠.”
“폐하의 뜻이 류 장관의 은퇴에 있다면야……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좋지 않겠군.”
계속 태연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세규의 속은 이미 뒤집혀 있었다.
-내게 모두 뒤집어씌울 속셈이었나, 류성일!
-주견하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혹 자신의 부모가 죽임을 당한 게 내 탓이라고 믿는다면…….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가 주견하의 유도로 나온 게 아닐까? 나는 류성일과 주견하를 저울질하러 여기에 왔는데, 주견하 쪽에서도 나와 류성일을 저울질하고 있다면?
-놀아나고만 있을 순 없지…….
여기서는 ‘발상조차 떠올리지 못한다’는 듯이 태연함을 계속 가장하며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류성일이 나름 위험을 각오하고 이야기를 꺼냈다면, 자신이라고 위험을 각오하지 못하랴.
안세규의 태도에서 뭔갈 느꼈는지, 주견하도 한 걸음 물러나는 눈치다.
흔들기는 여기까지.
화제는 앞서 안세규가 말했던 ‘전 아시아 개혁론’으로 옮겨갔다.
“역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할 생각이시죠?”
“이런 종류의 이론은 사회인들보다도 한창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대학생들에게 더욱 매혹적일 테니까.”
세규의 말대로, 처음으로 ‘세상을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열정은 절대 우습게 볼 게 아니다. 그들은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고 불사른다.
견하도 그 열정을 이해했다. 그에게는 조금 더 일찍 찾아온 열정이었으니까.
아마 한재연에게도 그러했을 터.
그리고 그런 청년들에겐 자신들의 열정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는 설명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열정은 솟아오르고 정신의 벼락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으면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론’은 그 답답함을 해소해준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받은 지식과도 다르다. 그 지식이 ‘답’을 직접 가리킨다면, 대학에서 접하는 이론은 길을 제시한 뒤 이렇게 말한다. “자, 이제 직접 걸어가 봐.”
첫걸음을 뗄 때는 누구나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리라 각오한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지 않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끝까지 도달하는 인간은 무척 드물다.
어떤 이는 이론과 열정의 유치함을 비웃으며, 길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여러 변명들을 조합해 ‘현실주의’라는 것을 만든다.
어떤 이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면서 길을 벗어나지 않았노라고, 고집만 단단히 굳힌 채로 큰소리쳐댄다.
어떤 이는 그나마 죽어서 깨끗한 이름을 남긴다.
뭐, 그들이 어떤 길을 걸어가든…… 세규가 제시한 이론은 당장 마음의 이정표가 되어 주겠지.
“고려국민당의 영향 아래 있는 대학생 조직들은 황제나 다이온 같은 문제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민주나 공화 같은 주제를 중시하지.”
“그렇겠죠. 고려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이어져 오는 정신이니까요.”
“그렇다 보니 당장 다이온 연방을 지지하라, 우리 황제 폐하야말로 몽골의 적법한 카간이시다, 이런 구호에 마음이 끌리진 않을 걸세. 오히려 모순을 느끼겠지.”
“하지만 공화정과 민주주의의 전파라면 느낌이 달라지죠.”
“자긍심과 의무감은 겹치는 영역이 많지. 사람들은 고려에 대한 자긍심과, 그 나라가 주변국에 해야 할 의무를 굳이 구분하려 들진 않을 걸세.”
물론 자긍심을 걷어내고 그 이론이 기만에 지나지 않음을 눈치채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고려국민당 산하 대학생 조직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준다면, 우리 쪽 조직들도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군요.”
드디어 이 이야기가 나왔다.
견하와 안세규,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우리의 조직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주류’가 되는 데에는 경계심이 들 법도 하네. 그건 이해하지.”
성장하는 청년 세대는 언젠가 사회인이 된다. 고려국민당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차츰 사회의 주류가 된다면,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제국입헌당의 집권에 위협이 된다.
이에 대한 대비로 견하는 제국입헌당,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영향을 받는 학생 조직들을 건설해 왔다.
이 두 계통의 학생 조직들은 무엇이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인지 생각하는 것부터, 크고 작은 정책의 찬반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너무도 다르다. 당연히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 대립이 차츰 격화되어 간다는 건 세규도, 견하도 느꼈다.
충돌을 꺼리는 건 세규 쪽이고, 견하는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면 오히려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두 수장은 합의를 봐야 한다.
“서로의 활동에 대한 비방이나, 조직원 회유 등을 금지하도록 하죠.”
“그러다 보면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질 텐데, 괜찮겠나?”
아무리 감찰국의 지원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해도, 여전히 고려국민당계 조직들에 비하면 열세다. 지금처럼 공격적인 활동을 중단한다면 충돌이야 피하겠지만……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동안 고려국민당계 학생 조직들이 놀고 있진 않을 테니 격차는 더욱 벌어질 테고.
학생 조직은 정당 입장에선 ‘미래’라 할 수 있다. 학생 조직의 세력 관계는 미래의 정치 구도를 어느정도 암시한다.
“감수해야죠.”
견하는 짧게 대답했다.
훗날 학생 조직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때 고생을 한다 해도, 당장 다이온 정책에서 추진력을 얻는 게 더 중요하다고 계산한 걸까.
아니, 주견하라면 나중에 다시 시작해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보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계산했든, 세규는 내놓을 건 내놓고 받을 건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벌었으니 손해를 본 건 아니다.
그 시간 동안 만회할 기회를 잡으면 된다.
이렇게 견하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도 하나의 ‘보험’이다.
류성일이 끝내 안세규와 동맹을 복구하길 거부한다면 주견하를 이용해서 류성일을 제거하는…… 방안도 생각해봐야 하니까.
그랬기에 세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주견하는 정중한 태도로 그 손을 맞잡았다.
***
세규의 예측은 빗나갔다.
견하는 자신의 선에서 학생 조직 간 다툼을 방지하겠다 약속했을 뿐이다.
‘자신보다 윗선’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선 책임이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사가 직접 자신의 정책으로 대학생들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런 계산은 세규는 미처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안의 본래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견하는 리안의 모든 의도를 읽어낸 건 아니었지만, 주변 상황을 바탕으로 해 볼 만한 도박이라 생각하고 승부수를 띄웠을 따름이다.
“울제이가? 입헌 요구를 수용했다?”
고개를 갸웃하며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리안과 울제이 두 사람의 최종 목적지는 다를지라도 거기까지 가는 길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다이온 전역을 향한 리안의 개혁 요청에 순순히 응하는 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볼로드를 압박한다는 면에서는 꽤 반가운 소식이지.”
이번 입헌 개혁 요구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겠지만 특히 볼로드를 겨냥한 것이다.
“다만 울제이가 볼로드만 겨냥한 건 아니라고 봐야 할 거야.”
창밖을 내다보던 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평상복을 입은 황제와 효윤, 그리고 정치경찰 제복을 걸친 견하가 있었다.
“나 역시도 겨냥했다고 봐야겠지. 그 너머의 루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