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혁명(8)
“그런 일도 있었나 보군요.”
여전히,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한다.
주견하는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세규는 호통을 쳐 주견하의 태도를 나무라볼까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소용없는 일이다.
주견하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훨씬 나이 많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주견하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겠지.
아니 오히려 안세규가 분노를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무장관이 감찰국장을 멸시했다!’
그런 소문이 점점 퍼지다 부풀려져 ‘정치경찰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일반경찰과 정치경찰 사이의 다툼이 되면 결국 내무성과 태사부 간의 알력이 된다.
정치권에서는 뭔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게 되면 태사가 내무장관을 경질해야겠지. 태사를 내칠 수는 없으니까.
그러한 조치는 정권 내부에서의 인사 교체로 그치지 않는다. 안세규는 제국입헌당의 당원이 아니라 고려국민당의 당수니까.
그가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려난다면, 그건 두 당의 연합정권이 끝난다는 이야기다.
미리안이야 신중한 사람이니 그런 사태를 바라진 않겠지. 하지만 눈앞의 이 주견하라는 인간은…….
“…….”
미소를 지우고, 슬며시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안세규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올려다만 본다.
주견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괜히 주견하의 허세에 눌려서 판단을 그르치고 있진 않은가?
아니다.
저 눈 너머의 뇌는 내무성을 정치경찰이 급습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행보가 증명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아예 그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주견하의 각오도, 준비도 다 끝난 상황임을 말해준다.
1929년 4월의 일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라 해도, 그도 황제와 태사가 자신의 뒤를 캐고 있음은 알겠지.
태사와 황제는 자신을 ‘부드럽게’ 제거할 속셈이라 해도, 주견하는 아니다.
주견하는 이 기회에 자신의 목을 물어뜯을 심산이다. ……그럴 것이다.
이리의 아가리에 일부러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다.
“그때 나는 폐하께서 몽골과의 동군연합을 이루시는 일과 제국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네만, 지금은 모든 일이 ‘생각 이상으로’ 잘 풀린 것 같군. 그러니 새롭게 변화한 정세에 발맞춰 주 국장과 ‘건설적인 논의’를 다시 해 보고 싶다네.”
주견하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한껏 부드러움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은 명백한 비웃음이다.
세규도 말을 이리저리 돌리긴 했지만, 결국 동군연합과 다이온 연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굽히고 황제의 뜻에, 주견하의 정책에 동조하겠다는 뜻이다.
굴복.
그렇다, 굴복이다.
말하자면 지금 세규가 여기 와서 주견하에게 하고 있는 일은 항복 선언이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순간인가.
“주 국장 자네의 입장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이 말은 세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다. 겉으로는 자신을 안심시키는 듯하면서 속으로는 일을 여기까지 추진할 셈이지 않았는가. 그런 비난을 넌지시 던진다.
다행스럽게도 주견하는 더는 세규의 속을 긁지 않았다.
“그랬던 것 같군요.”
일부나마 인정하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으로 안세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준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잠깐 침묵이 흐른 뒤, 견하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고려국민당에선 이미 다이온 연방의 설립에…… 그게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찬동을 표했었습니다. 최소한 그보다는 앞서 나간 조치가 필요할 겁니다.”
“그래, 이번에는 ‘진심’을 표현해야겠지.”
“말뿐인 진심은 거짓보다 못합니다. 진심에는 그만한 물적 증거가 따라야 하는 법이죠.”
‘진심으로 폐하의 다이온 카간 즉위를 지지하겠다’는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은 항복이 아니다.
견하는 가혹한 조건을 들이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항복 협상이 체결되길 바랐다.
“이제 사세는 다이온 연방의 성립에 찬성하는가 , 혹은 폐하의 동군연합에 찬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벗어났네. ‘어떻게 폐하를 몽골 카간 자리에 올릴 것인가’ 하는 단계지. 내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게 맞나?”
견하는 다시 한번 끄덕였다. 안세규의 상황을 읽는 눈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제시할 ‘진심의 증표’는, 폐하의 카간 즉위를 도울 방안이지.”
세규는 한숨을 내쉬며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거만하다기보단 결국 해야 할 말을 해서 긴장이 풀린 듯한 태도였다.
“고려 바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네. 협조하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 능력 부족을 인정하는 것일세.”
고려국민당이나 내무성의 힘으로는, 외무성이나 철도성이 진행 중인 사업에 간접적인 영향력밖에 행사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원철의 사업에 예산 일부를 대는 방식으로 지원한다든가 말일세.”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는 곤란하다는 태도였다.
“서부군이나 정보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한 성의 표현이 되었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내무성이든 고려국민당이든…… 단기간에 신뢰를 얻기엔 많이 부족합니다.”
대놓고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다.
안세규는 황제의 카간 계승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안세규는 고려의 영토 확대에 반대한다.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도 그 속내는 단정 지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이 정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고려국민당에 비하면 미약하다.
안세규와 고려국민당이 강했기에, 미리안과 제국입헌당은 연합정권의 파트너로 그들을 선택했다.
즉, 연합정권의 파트너로 삼아야 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 제국의 주요 정책에 반대한다면 그것만큼 경계해야 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안세규를 조여오는 압박의 밑바닥에는 그런 경계심도 깔려 있었다.
대원철도주식회사에 대한 투자는, 그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엔 안세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네. 부족하겠지. 그래서 다른 선물도 좀 들고 왔네.”
그러고선 잠깐 말을 그친다.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하다.
“방금 전에도 이야기했네만, 나는 내무성 장관일세. 요컨대, 제국 ‘외부’의 문제에 관해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 하지만 ‘내부’의 문제라면 어떨까.”
제국 내의 문제라면 내무성이나 고려국민당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특히 이 두 조직이 같은 수장을 공유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두 조직은 안세규가 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해주는 기관이었고, 동시에 안세규 덕분에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내부의 문제라면 어떤……?”
“일단 찬성 여론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겠지.”
“그건 이미 강화될 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옳은 지적이었다.
고려군의 개입을 통한 몽골 내전에서 칸발리크 정부의 승리. 미리안의 카라코룸 공략. 관세동맹의 경제적 성과와 콘스탄티누폴리, 개봉에서 증명된 외교적 성과. 다이온 연방의 수립과 한족 반란의 성공적 진압.
이 모든 것들이 고려인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다.
언젠가는 우리가 동아시아 전체를 선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아니, 이미 우리는 그러고 있지않냐고.
“그렇지. 하지만 그건 막연한 기대감에 지나지 않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수준의 기대감인 것이다.
“고려가 동아시아를 선도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모르지. 허동주와 천손민족협회가 그랬던 것처럼 ‘고려민족이 가장 우수하고 또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니까’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말일세.”
“그런 답은 기분 좋게 들리긴 하겠지만, 기분 좋다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죠.”
기분 좋은 말에 마냥 끄덕이지 못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1929년 이전이라면 모를까.
허동주와 천손민족협회의 이상을 무력으로 짓밟아버린 지금은.
“내가 내놓을 답은 이렇네. 어떻게 보면 천손민족협회의 구호와 비슷하지만, 훨씬 부드럽게 들리는 데다 ‘도덕적 만족감’까지 안겨줄 방안이지.”
“도덕적 만족감……?”
“우리 고려 민족만을 위한다는 ‘이기적’인 어구는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악하지만, 또 생각보다 선하기도 하다. 그 미묘한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성공적인 정책 수립의 돌파구일 것이다.
“요약하자면, ‘전 아시아 개혁론’이라 할 수 있겠네.”
이번에는 견하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온몸을 맡긴다.
“지난번 개봉회담 때 태사께서 다이온과 역외사국 각국에 요청했던 사안과 관련이 있나요?”
“그렇지. 고려국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영토 확장과 국력 신장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네. 뭐 느끼긴 하는데 다른 국민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일세. 어쨌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고려의 여론 전체가 폐하와 각하의 정책을 지지하게 할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네만.”
“즉, 우리는 단순히 고려의 영토 야욕만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가장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적 원칙을 발전시킨 나라로서 동아시아 각국을 지도한다?”
“좀 더 일찍 공화국으로서 발전해 온 일본보다야 못하겠지만, 일본과 달리 우리는 다이온을 통해 동아시아 대부분 지역에 새로운 원칙을 관철할 ‘힘’이 있지.”
견하는 소리 없이 냉소했다.
무엇이 ‘전 아시아 개혁론’이란 말인가.
공산주의를 전파하든 파시즘을 전파하든 민주주의를 전파하든, 침략은 침략이다.
세부적인 측면에서 과격함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견하는 자신이, 리안이, 루우가, 한재연이 하려는 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이 침략 행위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거기서 눈 돌리지 않는다.
그러니 안세규가 들이민 저 ‘전 아시아 개혁론’이라는 것도,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유용하겠군요. 죄책감을 마비시켜준다는 측면에서는.”
“그래, 말장난으로서는 무척 유용하지.”
어떤가, 쓰겠는가? 라고 세규는 물었다.
견하는 끄덕이다가, 불쑥 질문을 던진다.
“그보다…… 저는 장관님께서 이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세규는 다시 한번 지그시 이를 악문다. 이미 다 알면서도 능청스레 질문을 던지는 저 태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견하는 안세규의 기분이 나쁘건 말건 그의 육성으로 확인을 받고 싶었다. 그래야 이 ‘항복 절차’는 마무리된다.
얼마나 오래 갈 항복일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간 보복을 해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더더욱, 이 순간에 제대로 항복을 받아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