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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51화 (351/541)

입헌혁명(7)

이 대답에는 세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일부러 신중한 대답을 하여 자신이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도덕적 군주’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가식으로 보인다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는 낭키아스의 일에 함부로 관여하지 않으려 했고, 어디까지나 고려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형식’을 지켰다. 그것만으로도 울제이를 조여오는 사슬들이 느슨해진다.

둘째는 탄원인들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게레센제가 카간으로 즉위한 직후 울제이는 ‘회수대치’라는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때의 일로 적대감을 품은 자는 없는지, 자신이 그때 드러낸 야심을 어찌 여기는지 직접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칸발리크의 형님 카간께선 이 일을 알고 계시오? 조칙을 내리지 않으셨소?”

“외람되오나 칸이시여, 칸발리크의 정세도 그리 밝지만은 않습니다. 카간께는 이렇게 탄원하러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카간께서 이 일을 아신다 한들 하실 수 있는 일에 제한이 많지요.”

“무슨……”

“타이시 볼로드 때문입니다. 그자와 그자의 ‘황정회’라는 조직이 카간 폐하의 밝으신 지혜가 세상을 비추는 걸 가로막고 있습니다.”

……칸발리크 정권에 대해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생각해 보면 낭키아스의 어떤 정파든지 간에 칸발리크 정권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응천에서 칸발리크로 게레센제가 데리고 올라간 자들을 제외하고 남겨진 자들은, 기존 칸발리크 정권이 더 많은 양보를 하지 않아서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입으로는 게레센제가 마치 간신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자신들을 버린 카간에 대한 원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다이온 연방의 수립 이후 점차 강해져만 가는 칸발리크의 ‘간섭’은 낭키아스 내에서 그들이 유지해 온 이권의 목을 조여 왔다.

“볼로드 뿐이겠습니까. 고려의 루우 테무르 폐하와 미리안 태사도 칸발리크 정부를 제 입맛대로 좌우하려고 온갖 압박을 가합니다. 볼로드와 루우 테무르 폐하 사이에 이미 밀약이 맺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칸발리크 정부의 도움은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도 볼로드와 리안 사이에 제휴가 있다고 보는가. 게레센제의 카간 즉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거래가 이루어졌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빈틈도 있을 것이다. 그 빈틈이 어디쯤인지 포착하는 건 어렵겠지만.

마치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울제이는 침묵했다.

낭키아스에서 온 탄원인들도 울제이를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인내심 깊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울제이가 부디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며.

“알겠소. 내겐 종실을 지켜야 할 의무뿐만 아니라, 다이온과 그 대의를 수호해야 할 의무, 또 사사롭게는 숙부로서 마땅히 조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소. 그 의무를 망각하지는 않겠소.”

탄원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서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다들 지혜를 모아주길 바라오.”

***

울제이가 ‘입헌 개혁 요구’를 수용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작용했다.

한편으로는 울제이의 급작스러운 입헌 개혁 방침이 볼로드를 압박할 것이다.

키타이에서의 입헌을 보며 몽골 본토의 시민들은 ‘왜 우리는 식민지보다도 정치적으로 뒤떨어져야 하는가’하고 탄식하겠지. 그리고 그 탄식은 다시 볼로드에 대한 반감에 장작 하나를 더 올려놓을 것이다.

울제이가 몽골에서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겸하고 있다는 점도 더욱 그 반감을 자극하리라.

적절한 시점에 ‘각료회의에서 울제이 칸이 몽골의 입헌 개혁을 제안했으나, 볼로드 타이시가 거부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면 아주 볼만 하겠지.

다른 한편으로 이는 게레센제와 루우 테무르에 대한 압박으로도 작용한다.

아직 입헌에 대한 뚜렷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게레센제보다도, 개혁에 적극적인 울제이가 ‘차기 카간’에 더욱 적합하지 않으냐는 목소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큰형 시레문이 남긴 산업 분야에서의 업적, 조카 루우 테무르가 칸발리크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펼친 활약. 두 분야 모두 울제이가 단기간에 따라잡을 순 없다.

그러니 그는, ‘민중의 요구에 귀기울이는 성군’의 이미지를 내세우기로 했다.

울제이의 선언은 단순히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키타이 내 모든 몽골인 성인 남녀가 키타이에서 치를 총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몽골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몽골인으로 규정하는 모든 성인 한족에게도 즉각 키타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들도 총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간 아주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겨우 몽골인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한족들에게, 이는 파격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통치자인 몽골인들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책이 통보되는 게 아니라, 자신들도 그 통치 집단에 올라가 민중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매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한족 반란도 진압되어, 쓸데없이 의회로 올라와 ‘한족 독립’을 운운하는 무리도 없을 터. 울제이 입장에서는 개혁의 부담이 훨씬 덜했다.

“어떠한가, 미리안.”

그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며 울제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는 다이온 입헌 촉구가 고려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의 정세를 뒤흔들 것을 기대했겠지. 하지만 나는 정면으로 받아내겠다. 내가 먼저 나서서 키타이의, 더 나아가 다이온의 입헌 개혁을 주도하지.”

과연 네가 그 주도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이 내가 너의 그 오만함을 오래가지 못하게 해주지.

울제이는 리안의 구상을 앞지르기 위해, 쉬지도 않고 다음 행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안세규가 비밀리에 보낸 편지가 류성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였다.

고려 국내의 온갖 검열과 감시를 피해, 사람의 손으로 전달된 편지였다.

류성일은 그 편지의 전달자에게 미소를 건넸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머리만 꾸벅 숙이곤 다시 떠나버렸다.

-담소를 나눌 상황이 아니라는 거겠지.

류성일과 안세규를 둘러싼 위기 상황도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도저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편지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아주 단도직입적이었다.

-나는 당신이 주견하 감찰국장의 부모를 죽인 것을 안다.

‘사고’라고 변명할 수도 없다. 그게 사고라 해도 현 태사를 암살하려다 벌어진 사고였으니까.

이게 알려지면 류성일에겐 죽음만이 기다린다.

물론 그 경우 허동주와의 내전이 지닌 의미, 그 내전에서 얻은 승자의 지위가 빛바래겠지만, 어디 리안이 그런 손해를 두려워할 사람이던가.

아니 리안이 손을 쓰기 전에 주견하가 행정장관의 관저를 불태우러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류성일도 그런 협박에 꿈쩍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동명의 정계에 뛰어드는 건 매일같이 이런 삶을 살아가리라는 뜻이었으니까.

편지를 마저 읽는다.

아까 읽은 부분 아래에는 권유가 적혀 있다.

-류 장관은 나를 배신하고 함께 몰락할 텐가?

-아니면 나와의 동맹을 복구할 텐가.

“동맹의 복구, 라.”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류성일이 주견하를 통해 동명으로 복귀하려 함을 안세규가 눈치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세규는 그 과정에서 류성일이 자신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것까지 알아차렸다.

“하긴 이 정도 눈치도 없다면 진즉에 쓸려나갔겠지.”

고려민국 임시정부라는 집단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이의 동맹을 복구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이런 협박이나 받는 것이 동맹이라면, 류성일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동맹을 파기할 것이다. 차라리 다른 길을 찾아내는 편이 낫다.

이를테면 자신의 모든 행적을 안세규에게 덮어씌운다든지 하는 공작을 펼쳐서라도 말이다.

-태사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

“호오, 제법 큰 미끼를 던질 줄 알잖는가.”

-지금 태사의 권력이 강고한 이상 당신이 태사가 될 날은 오지 않는다.

류성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픈 부분이다.

황제는 분명 자신보다 미리안을 더 지지한다. 게다가 미리안은 지난 3년간 다이온 연방 수립을 비롯해 굵직굵직한 업적들을 잔뜩 세우지 않았나.

미리안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다음 선거에서는 미리안과 제국입헌당에 표를 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지금은 대공황 등으로 세계정세가 어지러운 상황. 국민들은 입증되지 않은 신정권을 창출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안 이상의 업적을 세우거나, 미리안이 결정적 실책을 저지르고 물러나지 않는 이상, 류성일이 ‘새로운 태사’가 되긴 불가능에 가깝다.

류성일은 늙어가지만, 미리안은 30대가 되고 40대가 될수록 더욱 원숙해질 테니까.

-그러니 함께 주견하를 견제하자.

가장 직접적인 위협 요소가 될 인간을 배제하자. 주견하가 정계에 끼칠 영향력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류성일이 과거에 주견하에게 어떤 원한을 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황제와 태사를 견제하자.

황제가 미리안을 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리안을 약하게 만든다. 미리안이 실책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지금은 강력한 요새나 다를 바 없는 왕서라와 미리안 동맹을 견제하려면, 당장은 당신과 내가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

“……주견하를 통한 동명 복귀, 혹은 안세규와의 동맹 유지.”

어느 한쪽을 택해야만 하는가.

혹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적절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때’라고 한다면, 왕서라-루우 테무르의 동군연합 수립과 카라코룸 천도일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기회는 오지 않을까.

류성일은 편지의 내용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 태워버렸다.

고민은 밤을 넘어 새벽까지 깊어져만 갔다.

***

“내가 전에 주 국장을 찾아왔을 때 부탁했던 걸 기억하나?”

“글쎄요.”

도발하듯 웃으며 견하는 시치미를 뗐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황제의 권한에 어떤 제한을 둘까, 하는 논의가 한창이던 때, 자신을 찾아와 ‘루우의 권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때는 그러마, 하고 돌려보냈지만, 그 결과는 보는 바와 같다.

주견하는 그 누구보다도 황제의 동군연합 수립에 앞장서고 있으며, 고려의 확장은 이제 철도를 타고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중이다.

앞장서는 정도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황제보다도 오히려 주견하가 있다.

그 점에, 안세규는 다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폐하의 권위와 권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걸 막아달라 부탁했었지.”

어금니를 꾹 물었다가, 안세규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견하는 조금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안세규는 짐작도 못 하겠지만, 주견하는 이미 언젠가 안세규를 제거하고 자신이 내무장관에 올라갈 마음을 굳혔다. 그렇기에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안세규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오면, 힘껏 목덜미를 물어뜯을 생각이다.

다들 안세규라는 기둥이 사라진 뒤의 혼란상을 염려하지만,

주견하는 자신이 그 기둥이 되면 그만이라고 판단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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