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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50화 (350/541)

입헌혁명(6)

“……글로 정복할 수 있는 세상은 없어, 한재연.”

냉소적으로 쏘아붙인 한 마디. 하지만 재연이 냉정을 되찾게 하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숨을 몰아쉬느라 들썩이던 어깨가, 차츰 가라앉는다.

“……알아.”

“알면 분노하지 마. 이미 각오했던 일이잖아?”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구축한 이론도, 평생을 바친 사상도 다른 누군가에겐 한낱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

“그렇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를 일부러 거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애초에 주견하는 우리 적이었던 사람이야. 내전 초기에 네 앞을 가로막았던 거 기억 안 나?”

전쟁 때 범죄를 저지르고도 고려에 숨어 살던 한족들을 적발해, 처형하려던 그 순간.

주견하는 재연 앞에 나타나 그를 방해했었다.

“그때는 무고한 죽음만큼은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워댔었지.”

그런 주견하의 생각은 지난 3년 동안 변한 줄 알았는데.

변한 게 아니었던 건가?

“내 생각은 달라.”

차갑게 말하며 양수영은 책상 옆으로 다가와 몸을 기댔다. 그녀의 엉덩이 밑에서 서류들이 구겨진다.

“애초부터 우리는 ‘도구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어. 주견하는 그 도구가 필요 없는 순간이 되자 다른 도구를 택했을 뿐이야.”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이기로 했잖아. 받아들여야 해, 한재연.”

재연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뒤면 냉정을 되찾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다시금 고개를 든 재연의 눈동자에는, 수영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빛이 번뜩였다.

“아니, 이대로 물러서진 않아.”

그 눈빛에는 수영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에게 대등한 자치권이라니. 한족도 동군연합의 한 축이라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야.”

“우린 내전에서 졌어, 한재연!”

“지지 않았어. 그러려고 여기로 기어들어 온 거잖아? 이름도 버리고 사상의 아버지마저도 망각할지라도 본질만큼은 살려서 이 제국의 뿌리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려고 말이야.”

집착인가.

아니, 한재연의 두뇌 속에서 집착과 냉철한 계산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 어떤 수단을 써도 한족이 주변 다른 민족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아. 그들이 고유의 이름과 문화를 보존하는 한 그들은 주변을 괴롭히는 악질 민족이야.”

주견하의 생각처럼 그들을 쪼갠다 해도, 어쨌든 민족의 존재를 용인받는 한 그들은 여전히 위험하다.

게다가 키타이 민족과 낭키아스 민족으로 나누는 그 작업이 잘 풀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키타이나 낭키아스가 펼치는 것과 같은 민족정책을 계속 유지해야 해. 발해도의 현 자치체제에는 압박을 넣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한족은 민족 자체가 고려나 몽골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져야 해.”

고려나 몽골 밖에서 별개의 민족으로 어쨌든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재연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태사의 압박이 있었다곤 해도 「대타협 계획」의 초안은 네 손에서 나온 거야. 이제 와서 ‘실은 그건 제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라며 억울하다고 호소할 셈이야?”

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영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재연의 침묵 위로, 수영은 계속 말을 퍼부었다.

재연을 타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과격해지다가 끝내 죽임을 당하는 일만큼은 막기 위해서.

“우리한테 대체 어떤 수단이 있어? 우리에겐 철저하게 통제된 무력뿐이야. 그마저도 감시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지. 우리의 지식, 재능…… 그중 어느 것 하나 태사나 주견하의 뜻에서 벗어난 게 없어.”

그러나 수영의 기대와는 반대로, 재연의 눈에 떠오른 빛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방법은 아직 있어.”

수영은 재연의 눈빛을 보며, 그 말을 들으며 직감했다.

언젠가는 그와 함께 비참하게 죽든지,

아니면 정점에 서게 될 거라고.

***

바이다르가 미리안과 대면해 ‘개입 보장’까지 얻어냈다는 사실은, 금방 낭키아스 궁정을 뒤흔들었다.

바이다르도 리안도, 이 협정을 딱히 비밀로 두려 하진 않았다. 오히려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협정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야 제대로 된 경고가 될 테니까.

‘함부로 바이다르와 낭키아스를 건드려선 안 되겠다’는 경고.

물론 바이다르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것은 아니고, 바이다르를 보좌하며 그를 카간으로 올리려는…… 이른바 ‘충성파’의 계책이었다.

여기에 낭키아스에 정착해 버린 ‘토호파’ 일부가 합류해 그 계책을 지지해주었다. 그들은 때론 자신의 이권을 두고 한족 유력자들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장기적으로는 낭키아스에 눌러살며 공존하는 관계가 되었으니까.

그러니 낭키아스가 ‘독립’을 유지하는 편이 그들에겐 이득이다.

“칸께서 성년이 되실 때까지만이라도 고려 태사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이다르와 리안의 협정을 지지하는 쪽에서 나온 말이었다. 당연히 누군가는 그 말에 곧바로 반발했다.

“다이온 자체의 질서와 카간 폐하의 위엄, 동아시아 협력회의의 권위와 독립 보장 선언이면 충분하지,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글쎄요.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과 ‘그랬으면 하는 것’ 사이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면 안 되지 않을지…….”

“당위는 현실 감각 이전의 문제이지요. 다이온 연방이 탄생하고 연방 내 구성국들이 서로 깊이 의존하는 관계가 된다 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소이다. 고려 태사에게 따로 ‘출병’을 요청한 밀약이라니!”

“그건 정말 이 나라의 자주성을 걱정해서 하는 탄식이오, 아니면 고려 태사가 우리 전하께 한 약조로 인해 마음에 품은 계획이 어그러져서 하는 탄식이오?”

“마음에 품은 계획이라니, 점점 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뭐, 그렇게 시치미라도 떼는 게 아예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요.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서 다행이외다.”

“하핫! 뻔뻔함이라! 그쪽은 가면을 좀 벗어보시는 게 어떻겠소? 그대들이 원하는 게 정말 전하의 안위요, 아니면 전하의 핑계를 댄 자신의 영달이요?”

“우리가 아무리 영달을 누린들 나라를 파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이까?”

“나라를 판다? 누구에게? 이보시오,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 세상 물정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뭘 팔든 파는 사람이 있으려면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하오.”

방금 말을 뱉은 사람 곁에서, 그의 동료가 맞장구친다.

“어쨌든 팔겠다고 내놓으면 누군가는 사겠지, 그런 생각은 공산주의자나 할 법한 미련한 발상 아니오?”

“글쎄. 그게 나라쯤 되는 큼직한 물건이라면 참으로 매력적인 상품일 거요. 그럼 자연히 사겠다는 사람이 있지 않겠소? 값을 얼마나 치르든 말이오.”

고성은 오가지 않는다. 다들 이제는 이런 신경전에 능숙해졌다. 그저 비릿한 웃음만을 입가에 띄운 채, 마치 일상적인 담소라도 나누듯 비난을 주고받을 뿐.

그리고 소년, 바이다르 역시 이 추태를 말리지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그것이 무기력증인지, 아니면 속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어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표면에서 일어나는 말다툼이 잔잔한 것과는 별개로, 수면 아래에선 숨 가쁜 움직임이 미친 물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수면 아래 물살일수록, 물에 발을 담근 자들에겐 더욱 위험한 법이다.

‘토호파’라 통칭하긴 하지만 이들의 실상은 통일된 의견을 지닌 집단이 아니다.

거칠게 나누자면 이들을 다시 세 파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지금 바이다르와 미리안의 협약을 지지하는 파벌. 이들은 그 지지를 통해 낭키아스 내에서의 이권 확대를 노린다.

둘째는 ‘칸발리크 진출파’, 혹은 ‘진출파’와 손잡은 세력. 이들은 게레센제 카간과의 연결을 통해 낭키아스를 그들만의 귀족 사회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셋째가 바로, ‘울제이 지지파’, 혹은 ‘키타이파’와 손잡은 세력이다.

이들이 노리는 바도 앞의 두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통합을 바란다는 점은 큰 차이였다.

몽골과 칸발리크에 대항해,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서 목소리를 낸다.

그것이 혹시 모를 칸발리크 정권의 ‘이익침해’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여기는 자들이었다.

이들 집단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로 각 개인의 면모를 보면 여러 집단의 특성이 섞인 사람이 많았다.

이를테면 울제이가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패권을 쥐고, 거기에 기생하여 자신의 이권을 지키길 바라면서도, 울제이가 끝내 카간이 되는 데에는 반대하는 자도 있다.

어쨌든 울제이에겐 이들의 지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각자가 속에 품은 생각과 관계없이, 울제이는 자신이 걷는 야망의 길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절박한 싸움이기도 했다.

물론 울제이는 그런 절박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개봉까지 쪼르르 달려온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몽골 왕공의 저택들이 그렇듯이, 칸의 궁정도 정주민의 거주 양식과 유목민의 거주 양식이 뒤섞여 있다.

한쪽에는 고려나 한(漢)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몽골 특유의 지붕 형태가 드러나는 건물이 자리했고, 다른 한쪽에는 화려한 대형 게르가 위용을 자랑했다.

울제이는 손님들을 게르로 안내했다.

그것은 자신이 몽골 황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증표이면서, 동시에 손님들을 동포로 맞이한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가 손님들이 한족의 땅에서 ‘몽골인 귀족’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이는 그런 울제이의 메시지에 감격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울제이를 고른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승리감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그런 기분은 지나치게 이른 것이었지만, 울제이는 그들을 계속 만족시킬 수 있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관중 분지에 ‘화하 한족 관리 특구’를 만드는 일을 장해진에게 떠넘기다시피 하고 개봉으로 돌아와 손님맞이 준비를 했던 것이다. 참모들에게 장해진의 감시를 맡기긴 했지만.

“칸이시여, 응천의 궁정은 칸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큰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고려는 태사를 필두로 하여 다이온 전역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사소한 잡음이야 있겠지만, 루우를 다이온 전체의 카간으로 만들겠다는 목표에선 고려 황제와 태사는 같은 편이라 봐야 옳을 것이다.

울제이는 마치 그런 일은 생각도 못 해봤다는 듯, 그것참 큰일이라는 듯한 태도로 짧은 수염을 엄지로 쓸었다.

“내가 키타이의 칸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형님 카간의 봉신에 불과하오. 그 권한은 극히 한정적이오. 아무리 사태가 급박하다 한들 어찌 함부로 조카이자 같은 봉신인 낭키아스 칸의 일에 관여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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