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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49화 (349/541)

입헌혁명(5)

삶은 고민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람은 그 고민을 덜어낼 공간을 바란다.

아직 눈이 미처 다 녹지 못한 정원의 한구석에, 견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뇌를 쉬게 한다.

다소 우중충한 하늘과, 아직 푸른 생기를 되찾지 못한 풀이며 잎사귀에 무의미한 시선을 던진다.

그런다 해서 어떤 해결책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리는 할 수 있다.

해결책을 찾아야 할 고민과, 때를 기다리며 묵혀둬야 할 고민으로.

그러면 쓸데없는 고민을 마음 저편으로 치워버리고 한결 편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딘가에 집중하길 포기하고 주변 풍경을 완전히 마음에 담았기에, 견하는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누군가가 옆에 털썩 주저앉고서야 견하는 눈을 돌려 바라봤다.

효윤이었다.

마음이 꽤 느슨하게 풀려 있었기에, 견하는 그녀를 보고 정말 오랜만에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물론 효윤도 가슴 한구석의 아릿함을 내리누르고 웃음을 지어 보일 줄 아는 나이가 됐다.

두 사람 모두 곧 있으면 스무 살이 된다.

“이렇게 둘이서 앉아 있는 건 오랜만이야.”

차가운 허공에 내뱉는 입김처럼, 견하는 소감을 말했다. 그의 말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렇게 단둘이 나란히 앉아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그러게.”

“혹시 우리가 처음 같이 앉아서 했던 이야기 기억나?”

키득대는 걸 보니 농담으로 던진 말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무심한 말이었기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효윤은 금세 함께 키득이며 그런 기분을 털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따스한 기억이다.

그날,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는 가스등 불빛 아래, 잠들지 못한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기억.

그때 자신은 맨다리를 소년의 배 위에 올려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계속 이렇게 도망칠 수 있을까.

이 소년과 그의 가족은 믿을만한 사람들일까.

가족…… 소년과 단둘이 나눈 첫 대화의 간지러운 기억은, 그 후 몇 시간 뒤에 일어난 참사의 악몽으로 뒤덮여버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막을 수도 없었다지만 그 일은 효윤의 가슴 속에 뼈가 시릴 정도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견하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저게 그날의 슬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인지,

아니면 루우가 말하던 어떤 이상 증세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금은, 견하의 말을 받아주자고 생각한다.

소년은 청년이 되었지만, 그가 어디가 어떻게 뒤틀린 채로 자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저 마음으로라도 감싸줄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효윤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견하가 쾌활한 만큼, 그녀도 쾌활함을 가장하면서.

“언니를, 태사 각하를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고 부탁했었지.”

“그래, 맞아. ……어때? 지금 최효윤 네가 보기엔? 나는 최선을 다해 온 것 같아?”

견하의 얼굴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어린 소년처럼 보여서, 효윤은 자기도 모르게 ‘누나’가 된 듯한 기분에 젖어 미소 지었다.

“뭐, 나름은.”

“흠…… 꽤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름’인가.”

견하는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내려 땅바닥을 바라보다, 다시 들고 쑥스러운 듯 말했다.

“효윤이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아.”

여전히 걱정스럽겠지, 라고 덧붙였다.

효윤은 살짝 놀랐다. 물론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견하는 효윤이 비밀스럽게 품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는 건…… 전부터 효윤이 경고하듯 던져온 말.

“이게 다 내 욕심 아닌가 하는 거.”

효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견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만 있기로 했다.

견하는 양 손바닥을 비비더니, 손끝을 입에 대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음……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말이야, 누나는 이미 다 알고 있더라고.”

견하의 의도도, 그가 어디까지 나갈지도.

설령 모르고 있었더라도 보고를 듣는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순식간에 떠올린다.

그럴 수밖에.

견하도 분명 천재라 할 만한 사람이지만, 리안은…… 그 이상이니까.

견하는 자기 자리에서 의외의 활약을 하는 사람이고, 리안은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했던 제국의 국정을 3년째 이끌어 가고 있다.

대공황과 내전, 주변국의 변란으로 요동치는 난세에 기적적으로 고려를 유지해냈다.

견하의 활약도 따지고 보면 리안이 마련해 준 무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견하가 주어진 운명을 헤쳐나가는 자라면,

리안은 운명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운명을 자아내기까지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

리안 본인은 운명이라는 말에 코웃음부터 치겠지만.

“내가 아무리 잘나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있어도, 누나는 그걸 ‘용인해줬던’ 거지. 내가 누나의 예측을 뛰어넘었던 건 아니야.”

“그래도 네가 한 일들이 분명 도움은 됐어.”

리안의 권력에, 고려 제3 제국에.

견하가 활약해 준 덕분에 다이온 연방이 고려를 중심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루우를 수장으로 하는 거대한 동군연합 체제도, 동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킴으로써 고려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한다는 리안의 목표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단순히 연인이어서 봐주는 게 아니라, 실제로 유용한 계획이기에 채택하고 유능한 참모이기에 기용하는 것이다.

견하는 효윤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그렇게 평해줘서 고맙다는 듯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 누나의 「대타협 계획」을 들으면서, 나도 한발 물러서야 하지 않을까 싶어졌어.”

“갑자기?”

자기 주관이 확실한 애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다고 하니 효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응. 지금껏 누나만 양보해왔으니까 나도 뭔가 배려를 보여줄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대타협 계획」은 몇 가지 보완만 한다면 내가 떠올린 것들보다 훨씬 괜찮게 느껴지거든.”

리안이 효윤 앞에서 대놓고 말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요즘 견하의 행보를 걱정한 건 사실이다.

견하가 목표로 삼은 지점이…… 천손민족협회나 허동주가 꿈꾸던 지점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새어 나온다. 효윤의 그 표정을 보고 견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씩 웃었다.

“아예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건 아니야. 감찰국 일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누나의 「대타협 계획」에 따라서 나도 나름 해보고 싶은 일들이 있거든.”

아직은 루우에게만 말한 것이지만, 한족을 키타이 민족과 낭키아스 민족으로 분열시킨다든가 하는 방안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타협 계획」의 그늘에서 진행하는 일인 만큼, 좀 더 원활한 추진이 가능하겠지.

나뉘어서 하나가 된다는 리안의 구상.

견하는 일방적으로 리안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리안의 구상이 자신의 계획과 그에 반대하는 의견들 사이에 절충안이 되어 주리라는 기대. 그리고 그 절충안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리라는 기대.

그 기대감이 견하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이온을 구성하는 각국이 주권을 존중받는다, 각 민족이 자치를 누린다, 그러면서도 다이온 전체가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인다…… 그리하여 다이온 전체가 원만하게 성장해간다. 해볼 만한 일 아니겠어?”

이번엔 효윤이 끄덕였다. 그래. 견하가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안심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견하를 찾아와서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나는 한동안 동명을 떠나 있으려고.”

“뭐? 왜? 무슨 일로?”

“당장은 아니고,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다들 신경은 잘 안 쓰지만, 나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잖아.”

대령은 그게 어쨌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대원수 각하를 보좌하기 위해 격을 맞춘 거라곤 하지만, 진짜 중장다운 자격을 갖춰 보고 싶어서.”

리안도 고려 내전과 몽골 내전에서 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고, 견하도 소규모 전투는 지휘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효윤은 부대를 지휘해서 싸우기보다는 본인의 전투력에 의존해서 싸워왔다.

부대 단위 작전을 펼쳐도 지휘권은 다른 장교에게 넘기고, 자신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식으로.

칸발리크 사태 당시에도 그랬다.

리안에게 더 큰 도움이 되려면, 단순 경호나 보좌 임무에서 벗어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 군사 전략적 안목까지 갖추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얼마 전부터 계속해왔다.

“서부군 쪽에서 교육을 받을 거야. 조유관 장관이 추천해줬고, 그쪽의 태주갑 중령이라고, 칸발리크 사태 때 손발 맞춰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도와주기로 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기에 견하의 눈은 커졌다.

곧이어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에 몰려온다. 동명에서 자주 함께 있진 못했지만, 루우와 리안까지 네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견하에겐 무척 소중했으니까.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을 나와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기까지 지난 3년, 그 추억들도 견하가 자신을 지탱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아쉽다는 이유로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효윤은 정말 오래 생각해 온 것 같았으니까.

“그 왜, 선출제 장교들 ‘재교육’하는 제도 있잖아. 나도 그 교육과정에 들어갈 것 같아. 사단까지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소대나 중대는 지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진짜 장교로 거듭나고 싶다는 게 효윤의 생각이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긴 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교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는 것.

그리고…… 한동안은 견하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

그것은 효윤의 마음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효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헤매는 견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윽고 피식 웃은 그녀는, 손을 뻗어 견하의 머리에 얹었다.

한껏 흐트러트린다.

“기대하고 있으라고.”

***

한재연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터트린 감정은, ‘격분’이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을……!”

그는 방금, 감찰국장실에서 주견하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왔다. 유지나와 이익서도 있던 자리이기에 간신히 참았지, 독대였다면 견하에게 욕을 해댔을 것이다. 견하의 진노를 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 정도로 견하는 재연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대타협 계획」을 받아들인다.

-다만 한족의 인구와 역량을 생각해, 그 토지를 분할하고 민족을 해체한다. 일단은 키타이 민족과 낭키아스 민족으로 나뉠 것이다.

부러질 듯 쥔 펜대를 책상 위에 팽개치려다 말고, 그는 미친 듯이 책과 논문을 꺼내기 시작했다.

꺼낸다기보다는 끌어당겨 무너뜨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책상 위에 정신없이 늘어뜨려 놓은 그 글들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읽고 어딘가에 메모를 하다, 끝내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르며 던져버렸다.

그 모든 과정을, 양수영은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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