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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48화 (348/541)

입헌혁명(4)

물론 게레센제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계집이군.”

어떻게 보면 그 고려 태사 미리안이라는 여자는 루우 테무르와 많이 닮았다. 외모가 아니라 성품이, 마치 자매처럼.

이른바 헌법 제정에 관해서는 게레센제도 고려의 입헌 모델을 살펴본 적이 있다. 때문에 그 과정과 결과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카간의 권력은 제한된다.”

고려의 입헌 과정에서 미리안과 류성일이 루우 테무르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얼마나 머리를 싸맸던가. 그들은 결국 카간의 거부권에 제한을 둔다는 방식으로 타협을 봤다.

이것만 생각한다면 게레센제는 입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꺼릴 수밖에 없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권력을 내놓는 대신, 권위를 확보한다.”

카간으로서의 권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게레센제에게 절박한 것은 권력보다도 오히려 권위였다.

동생인 울제이와 조카 루우 테무르 사이에서, 그가 시레문의 자리를 이어야만 하는 권위.

아들인 바이다르를 홍타이지로 만들고 언젠가 카간위를 물려줄 권위.

“입헌을 비롯한 개혁을 받아들이면 그 권위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은가.”

국민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개혁적 카간이라는 칭송과 함께 말이다.

그간 고려에서 벌인 여론전의 여파로, 칸발리크에서는 게레센제보다는 루우 테무르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다.

이 상황을 역전할 기회가 아닐까.

시위대는 ‘재발 방지’를 요구한다고 들었다. 알타이 자유 공화국의 반란 같은 사건, 혹은 칸발리크를 뒤덮었던 그……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던 참사를,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게레센제는 그 요청을 외면할 수 없다. 루우 테무르라면 그녀 자신의 공에서 비롯된 권위로 시위대의 요구를 물리칠 수 있겠지만, 게레센제는 그럴 수 없다.

외면할 수 없다면, 정면에서 받아들이는 쪽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시민들의 열망을 받아들임으로써, 게레센제는 권위를 확보한다.

게다가 여기엔 뜻하지 않은 이익을 거둘 희망도 있었다.

게레센제가 입헌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당장 개혁을 막아내지 못한 볼로드 타이시의 권위는 크게 손상된다.

‘카간께서도 찬성하신 개혁에 반대한’ 황정회가 향후 선거에서 참패라도 하면, 권력도 잃게 될 테지.

볼로드가 신원경제자원연구회의 활동에 소극적으로 협조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뒤에서 몰래 대원철도주식회사와 제휴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게레센제의 마음은 완전히 떠나버렸다.

정권에서 제거해버려도 전혀 아까울 게 없는 인간이 된 것이다.

어쨌든 입헌과 개혁을 받아들이며 확보한 민심,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권위를 통해 루우 테무르의 야망으로부터 자신의 카간위를 방어한다.

여러모로 이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게레센제는, 몽골 제국입헌당의 당수를 황궁으로 불렀다.

시반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겉보기엔 참으로 그럴싸하다. 멀끔한 외모, 좋은 목청, 유려한 말솜씨를 지녔다.

“카간께서 하명하신 대로, 저희 제국입헌당은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존중하며 민의를 반영하는 헌법을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의 실권자는 아니다. 가벼운 식사와 함께 정국을 논하는 자리에서 게레센제는 그렇게 느꼈다.

시반의 말 자체는 크게 트집을 잡을만한 구석은 없다. 그러나 묘하게, ‘자신에겐 결정권이 없다, 당의 지도부와 함께 의논해보겠다’는 식의 말로 들렸다.

그 감각은, 아마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배후에는 고려의 제국입헌당이 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겠지. 저들 자신이 바라는 바도 있겠지만, 칸발리크 정계에 진출하는 데 빚이 있는 만큼 고려 측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루우 테무르를 카간 자리에 올리기 위해 이번 분란을 활용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게레센제 카간의 권위가 확보되는 일은 반갑지 않겠지.

쉽지 않군.

게레센제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자애로운 미소로 제국입헌당 당수를 마주 보았다.

허나 입헌은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냥감이다.

무엇보다도 몽골의 입헌, 그 너머 연방헌법의 제정까지 가게 되면…… 지금처럼 그저 ‘몽골의 카간이 곧 다이온의 카간’이라는 식의 애매한 관습으로 유지되는 지위가 확고해진다.

연방헌법에서 확실하게 자신을 다이온의 수장으로 규정해준다면…… 고려 입장에선 자신을 함부로 흔들기가 무척 부담스러워진다.

모든 체제는 안정적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요컨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리하여 카간은 게레센제라는 인식이 확산할수록 점점 더 건들기 어려워진다.

루우 테무르든 미리안이든 그 전에 승부를 보려 하겠지.

하지만 자신도 그리 호락호락 당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보란 듯이 카간 자리를 지켜주마.

그리고 게레센제의 황조가 만세토록 이어지게 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듯 황실도 카간도 바뀌어야 하오. 다소 전통과 관습이 손상되는 듯해도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짐은 충분한 논의만 거친다면 다소 급진적인 개혁안이라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소.”

***

“……그렇게 되었나.”

게레센제 카간이 몽골 제국입헌당의 당수 시반을 만났다, 는 보고가 볼로드의 태사부로 들어왔다.

그 만남이 지닌 의미도 작지 않았지만, 타이시인 볼로드를 제외하고 만났다는 사실이 볼로드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했다.

“외통수인가.”

게레센제는 아마 볼로드를 몰아내고 칸발리크의 권력 구조를 개편, 동시에 자신의 권위도 확보할 생각이겠지만…… 볼로드는 그게 너무 위험한 책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몽골이 관습과 야삭에서 벗어나 근대적 성문헌법을 만든다 해도, 그것을 몽골인의 마음대로, 그 실정에 맞게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다음 동아시아 협력회의에서 성과를 이야기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분명 고려에서 미리안이 한 제안의 내용은 그러했다.

“그게 ‘고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헌법 조항은 수정을 요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면 무엇이지.”

다이온을 구성하는 각국은 언젠가 탄생할 연방헌법을 의식하며 헌법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구성국 각국의 헌법이 연방헌법과 충돌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되니까.

설령 연방헌법, 그러니까 ‘미리안이 구상한’ 다이온 체제를 무시하고 그와 어긋나는 헌법, 혹은 그 이하의 법을 만들기라도 한다면…… 분명 고려는 이를 억압하려 들 것이다.

아마 미리안이라는 인간의 치밀한 성격상 그런 일을 방지할 재판소에 관한 아이디어를 세워두지 않았을까. 재판소에서는 이렇게 판결하겠지. “연방헌법에 위배된다!”

“폐하, 폐하께서 신을 내치고 칸발리크에 우뚝 서신다 해도, 홀로 고려인의 파도를 막아내실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려본다. 카간 앞에서는 감히 하지 못할 말이다.

그렇기에 볼로드는 카간을 알현하고 이 입헌 문제의 중대함을 다시 한번 아뢰기 위해 한참을 고민하며 상소를 다듬어 나갔다.

그러나 미처 초안이 완성되기도 전에, 모든 이의 예상을 앞질러 행동한 이가 있었다.

키타이의 울제이 칸이 전면적으로 민중의 입헌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

물론 동명의 태사부에 들어앉았다고 해서, 리안이 서쪽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지금 그 모든 움직임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볼로드와 게레센제의 의도마저도 계산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렇겠지. 게레센제는 개혁을 받아들이고 권위를 확보, 루우의 황위 계승을 막으려 들 거야.”

다시금 오랜만에, 권력의 가장 깊은 중추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리안의 예측은 불길한 것이었지만 다른 세 사람은 질문을 던지거나 우려를 표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게레센제, 까맣게 잊고 있는 모양인데 산동에서 벌어진 신수덕 토벌전 때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사냥은 완료되지 않았다.

미리안은 완료되지 못한 사냥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굴로 숨어 들어갔던 토끼는, 머리를 내민 순간 늑대의 아가리에 물리고 말 것이다.

“대원철도주식회사와 제국정보사령부를 통해, 산동 총독부가 있던 치청에서 낭키아스 각 지역, 보우슈엥 국경과 마카오에 이르는 모든 경로를 조사하고 있어.”

신수덕은 어떤 경로를 통해 해외로 도망쳤을까.

모두가 궁금하게 여기는 바다.

“정말로 게레센제 숙부가 신수덕을 몰래 탈출시켰을까?”

루우의 입장에선 오히려 게레센제의 약점을 쥘만한 기회이건만, 그녀는 마치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는 듯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수덕과 협력했다는 것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의 관계도 깨끗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칸발리크 테러, 아버지 시레문의 죽음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니까.

“그렇게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신수덕을 비롯한 천손민족협회가 여러 단체에 손을 뻗고 있었을 뿐, 낭키아스와 알타이 자유 공화국 사이의 직접적 제휴는 없었을 수도 있지.”

효윤이 그렇게 말한다. 마치 그녀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그렇다고 해서 신수덕의 도주를 도왔다는 죄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야.”

견하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이제는 망설임을 떨쳐내고, 몽골 카간 자리를 향해 마음을 굳힐 때가 왔다고 재촉하듯.

“현직 카간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로 친다고 해도 말이지.”

“죄를 물을 순 없다 해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지울 순 있어.”

리안이 심판을 내리듯 말한다. 그녀는 어쨌든, 이라며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게레센제가 볼로드를 물리쳤다며 한숨 돌릴 때 우리는 그간 조사했던 게레센제의 어두운 면을 그 얼굴에 들이대며 퇴위를 요구한다.”

퇴위를, 요구.

견하는 심장 박동이 가파르게 솟아오름을 걸 느낀다.

“개망신을 당하면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카간 자리를 루우에게 내놓으라고 말이야.”

뭐, 단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루우를 단 몇 시간만이라도 홍타이지(皇太子)로 봉하고, 그 후 양위가 이어지는 식의…… 절차가 기다리지 않을까?

일시적이라곤 해도 고려 황제가 몽골 카간의 아래가 된다는 형식이 부담이라면, 카간이 황제에게 통치권을 위임한다는 형식으로 자리를 넘긴다. 그러고 나면 게레센제를 왕으로 격하해 영지 없는 군주로서 평생 궁에 갇혀 살게 해야겠지.

어떤 식이든, 드디어, 동군연합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견하는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리안의 계획을 마저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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