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선과 이익선(9)
제헌의회 소집 압박, 총선거 압박.
당장 볼로드를 실각시키기엔 두 방법 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 볼로드에게 부담을 주긴 해도 치명적이진 않다.
무엇보다도 볼로드가 개혁을 받아들이면 타격은 줄어든다.
“물론 그때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볼로드의 부담으로 작용하겠지만요.”
“개혁에 끝까지 반대하며 고집을 부리면 그건 그것대로 볼로드를 압박할 테고, 개혁을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기반을 약화하게끔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볼로드는 실각한다.
이웃 나라, 사실상 몽골의 종주국이 되어가는 고려의 최고 권력자가 ‘볼로드의 실각을 원한다’고 말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차파르는 설레발 치지 않는다.
내일 당장 볼로드와 그 밉살맞은 추종자들이 일소되진 않을 것이다. 내일모레 제국입헌당이 집권당이 되어 카간이 씁쓸한 표정으로 새로운 타이시를 임명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차파르의 입꼬리는 실룩이지만, 그는 그런 기대를 내리눌렀다.
몽골 제국입헌당 내에서 적합한 사람을 고르겠지만 그게 차파르는 아닐 것이다.
차파르가 당의 중역인 건 사실이지만, 당수는 아니다. 그는 ‘무당 동무’로 불리던 시절처럼 그림자 속에서 더 많은 일을 했다.
말하자면 지금 몽골 제국입헌당 당수는 간판에 불과하다. 당의 주도권은 차파르를 비롯한 배후의 ‘실세’들에게 있다.
게레센제는 당연히 제국입헌당에서 태사를 고를 때 여러모로 머리를 굴릴 것이다. 모처럼 볼로드라는 거북한 권력자를 몰아냈으니, 다시 강력한 태사를 두고 싶진 않겠지.
그러므로 간판에 불과한 현 당수를 태사로 고를 것이다. 실세들 등쌀에 자신의 당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자이기에, 태사가 된다 해도 정국을 주도하진 못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미리안 역시 볼로드를 몰아낸 후이니 자기 뜻에 맞는 새 태사를 세우고 싶어 하겠지. 몽골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니까 아마도 제국입헌당 내에서 사람을 고르겠지만, 동시에 ‘리안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현 당수인가.
차파르는 지금 여기서 미리안 및 고려의 지원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지 협상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고려와의 협력에서 활약하면서 당내 영향력을 늘려나가야겠지.
그러므로 사고를 전환한다.
눈앞의 일, 볼로드의 실각을 논의하는 문제로.
미리안은 볼로드가 없는 틈을 타 칸발리크에서 와서 방법을 제시했지만, ‘기습’을 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즉, 미리안은 볼로드를 당장 실각시키진 않을 심산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정하지 못한 건가? 볼로드에게 경고와 동시에 기회를 주려는 건가?
아니, 그렇진 않겠지. 볼로드의 실각을 논의하겠다고 여기서 분명히 밝혔으니, 마음은 정했을 것이다.
-시간, 인가.
볼로드가 실각해야만 할 적절한 시간을 조율할 속셈이다.
“당장 압박에 나서겠습니다.”
은근슬쩍, 지금 당장이라도 볼로드를 향한 맹공을 시작하겠다는 듯이 말을 꺼내 본다. 물론 이는 미리안의 의향을 떠보기 위함이다.
“지나친 정국의 혼란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다이온 외부의 정세도, 내부의 정세도 혼란스러우니까요. 적당히 다른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부드러운 압박’을 해나갔으면 좋겠군요.”
출혈을 최소화한 수술을 하듯이 말이에요, 라고 미리안은 덧붙였다.
역시. 일을 시작은 하되, 때가 될 때까진 볼로드를 써먹겠다는 건가.
그때는 대체 언제일까.
미리안의 지시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녀가 생각하는 ‘때’를 가늠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 확보한 정보만으로는 이 자리에서 그녀의 의향을 읽어낼 수 없다.
잘 알아들었다는 듯, 책임지고 일을 수행하겠다고 다짐하듯 차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끄덕임은 차파르와 동지들이 헤쳐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다.
***
황성방위군의 일은 단순히 수도 동명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동명의 방위 전략은 본토 전체의 방위 전략을 결정했다.
그렇기에 황성방위군 사령부의 김천열 대장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부관과 참모들이 분주히 오가며 보고를 올리고 명령을 받는다. 군의 각 조직과 모든 면에서 ‘연계’해야 했기에 뭔가 하나 바꿀 때마다 수없이 많은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런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 중에는 김천열을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 껄끄러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전을 전후해서 김천열과는 다른 파벌로 갈린 사람들, 김천열의 빠른 진급을 시기하는 사람들…… 등.
‘비협조적’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의 업무 조율은 한결 더 피곤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피로뿐이었다면 견딜만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산더미 같은 종이를 상대해야 했다.
“요택 일대 해안 요새 강화, 삼한반도 동남 해안 요새화 사업…….”
전자는 동명 방위에 직접 관련된 일이기에 김천열 본인이 관여해야 한다. 후자는 간접적인 관련만 있다. 산과 강을 거쳐 차례로 방어선이 무너져 동명에까지 적이 이르렀을 때,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적의 상륙을 허용한 경우엔……”
요하와 그 지류가 복잡하게 얽힌 수백 킬로미터는, 곳곳에 요새화하기 좋은 지형이 있었다. 그런 곳들을 전부 요새화한다면 적은 설령 상륙에 성공한다 해도 동명까지 진격하는 도중에 저지되거나,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동명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요새화된 도시를 맞닥뜨리게 될 테고.
문제는 그곳에 많은 인구와 산업이 밀집되어 있다는 것.
“적의 진격 과정에서 벌어질 파괴는, 국가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겠지.”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만 전쟁 발발 직후에는 시간이 있을 테니, 주민들이나 산업시설을 내륙으로 ‘이전’하는 방안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김천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은 아니고, 이미 여러 군사 전략가들 사이에서도 나온 이야기다.
“장교들 중에는 군사 잡지에 투고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으니까.”
독특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자신의 이론이 상관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밖에서’ 동조자를 구하고 싶을 테니까. 그러다 보면 잡지에 실린 이론을 눈여겨 본 선배 장교들이 기고자를 자기 부관이나 참모로 데려가는 일도 종종 있다.
“하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취미를 가질 수가 없단 말이지.”
김천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천열 자신이 뭔가 특출나게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도 아니긴 했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김천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눈에 띄지 않게끔 처신하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시기 질투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김천열은 그때를 기다렸다.
게다가 요즘엔 ‘선출제 장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 않나. 그들과 대립하면 필연적으로 그 정책을 밀어붙인 태사부의 미움을 살 수도 있다. 군 내부에서의 입지도 넓지 않은데 태사부의 끈마저 끊길 순 없다.
어쨌든, 적지 않은 장교들이 슬슬 ‘주권선과 이익선’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요즘 들어 이렇게 많은 ‘황성방위’에 관한 의견이 튀어나올 리가 없다.
“일본이 고려를 적대하거나, 혹은 고려를 적대하는 세력이 일본 열도를 장악했을 때의 상황. 그걸 생각했기에 이런 의견이 나오는 거겠지.”
지난 내전의 교훈만을 생각한다면 육상에서의 방어만을 논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엔, 적의 요택 상륙, 혹은 요동 반도 남단 상륙 후 진격을 상정한 논의가 활발하다.
“정세의 변화가 장교의 전략적 사고에도 영향을 끼치는 건가.”
이런 일들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글쎄. 김천열 본인도 정치 상황의 격변으로 덕을 본 사람인지라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확언할 순 없었다. 하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만병통치약 같은 전략은 없는 법이니까.”
국가가 어떤 적을 고르든, 군인은 명령대로 맞서 싸운다. 이상적인 군인이라면 그렇게 사고한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정말 몇 번을 꺼내야 하는 걸까.
이를테면 바라트를 상대하는 전략과, 중앙아시아의 알티샤흐르나 카자흐를 상대하는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만병통치약을 만들 수 없으니, 불가피하게 장교들은 ‘국가가 이런 적을 고를 것이다’라고 스스로 ‘정세를 추측’해서 전략을 짠다.
물론 아예 근거가 없는 적을 설정하진 않는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얻어듣고 짜는 거라, 나름 국가의 정책과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김천열은 자칫 군인들이 정책에 군사 전략을 맞추는 게 아니라, 군사 전략에 정책을 맞추려 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군인들 사이에서 “왜 내가 세운 전략에 맞는 정책을 펼치지 않는 거냐”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된다.
물론 내전, 숙군, 쿠데타 진압을 통해 태사가 군을 충분히 ‘길들인’ 현 상황에서 그런 불만을 함부로 터트릴 사람은 없겠지만…… 자꾸만 주변이 군인들을 자극한다면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른다.
미리안 정권의 안위 이전에, 아니 당연히 태사는 그런 시도를 박살 낼 테니까, 재능은 있지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군인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단속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속하려면 일이 지금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했고.
오늘 외무성의 조유관 장관과 만나기로 한 것은 그래서다.
“오셨습니까.”
조용한 고급 식당.
김천열은 어쨌든 연하이며 후배인 데다, 민간 정부의 장관이기도 한 사람을 맞이하는 자리이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려 했고, 조유관은 의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나는 군 통수권자가 아닙니다, 장군.”
“하지만 군에 몸담고 계셨고……”
“민간인 신분으로 군인 티를 내면 좋지 않아요. 그 경례는 태사 각하께서 받으신 걸로 하겠습니다.”
더는 군인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서부군에 남은 후배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면 그 말을 어디까지 곧이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조유관은 김천열을 경계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겉으로나마 민간인으로서 군인의 자문에 성실히 응해주겠다는 듯,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민 자세로 앉는다.
조용한 식사가 시작된다.
술잔을 주고받는다. 이것은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