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선과 이익선(8)
“낭키아스도 정치 개혁이 필요하긴 했으니까, 내친김에 하자고.”
“게레센제 카간이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히 있진 못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볼로드를 써서 가로막으면 돼.”
마음에는 안 들지만 꽤 유용한 늙은이야, 라고 리안은 덧붙였다.
“뭐 어쨌든 이런 식으로 한 번 정리해주고, 다이온 내부의 그 누구도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기강도 확실히 잡을 거야.”
리안의 구상은 견하의 구상을 이용하되, 그 종착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고려의 압도적인 힘을 다이온 전역에 보여줄 심산이었다. 그리하여 ‘엉뚱한 생각을 하는 놈들’을 처리하거나, 엉뚱한 생각 자체를 포기하게끔 하리라.
“뭐 어쨌든 이것도 전부 낭키아스에서 ‘급변 사태’가 일어났을 때의 일이지. 동요가 저절로 가라앉는다면 내가 나설 것까지도 없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뒤, 리안은 안세규에게서 온 전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효윤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주권선과 이익선 문제…… 이건 아예 한동안 함구령을 내려놓자. 괜히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들 순 없으니까.”
리안이 탄 열차는 칸발리크에 도착했다.
지금 칸발리크에는 볼로드가 없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아즈텍 대륙을 향한 바라트의 지원이, 다이온의 영토를 통과해도 좋다는 협정.
아마 바라트에서 요청했다기보다는 볼로드가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바라트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제안에 얼씨구나 좋다고 응했고.
볼로드의 속셈은 뻔하다.
그는 다이온의 ‘상대적’ 국력이 성장하길 바란다. 내전으로 상처 입은 몽골의 국력을 단기간에 회복할 수는 없으니, 다른 나라의 역량을 깎아내는 방식으로 ‘상대적’ 국력 상승을 노리는 것이다.
즉, 볼로드는 아즈텍 내전의 장기화를 노린다. 물론 그 경제적 파장이야 다이온에도 미치겠지만, 다이온은 관세 동맹을 통해 다져 온 안전망이 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일단 써먹을 수밖에.
‘주권선과 이익선’, 그 아이디어가 구체화한 다이온의 정책이 마찰 없이 세계 각국과 조율을 마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대륙 사람들의 피와 살로 그 시간을 버는 셈이지만.
그 발상의 부도덕함과 조잡함에 속이 뒤집어진다.
그렇기에 리안은 칸발리크에 도착하자 열차에서 내려, 볼로드 실각 준비에 착수했다.
그녀는 몽골 제국입헌당 당사를 찾았다.
***
우흥섭은 개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과 장해진을 불러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남기던 태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우흥섭이지만, 그 얼굴을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리안은 이제 마냥 귀여운 아가씨가 아니라, 정말로 숙군을 실행한 경험이 있는 대원수니까.
웃는 얼굴 위, 눈은 끝없이 자신들을 의심하고 트집 잡고 계산을 굴려대고 있었다.
-역시 보신책이 최선인가.
이 토벌전이 지겹긴 해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잦아들었다.
토벌전과 더불어 형초 특구, 파촉 특구의 설립이라는 행정 업무까지 늘어났지만, 차라리 여기서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이렇게 변방에 나와 있어도 대원수 각하께선 혹여 자신이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염려하시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살벌한 정세가 기다리고 있을지.
듣자 하니 이미 본국에선 조유관 파벌의 서부군, 제국정보사령부, 김천열을 중심으로 한 황성방위군 간의 견제가 치열하다 들었다. 태사 각하의 눈치를 보느라 수면 위로 올라오진 못하지만.
어쨌든 본국에 돌아가서 그 수라장에 말려드는 것보다는, 여기서 태사 각하의 당부 말씀이나 잘 듣고 있는 게 낫다.
-황제 폐하께선 이미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또래 국민들과 허물없이 교제할 정도로 소탈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두 분 장군께도 폐하께서 사적으로 그 ‘노고를 치하’하시며 여러 사정을 ‘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거기서, 미리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혹시라도 그 뜻을 ‘과대해석’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내린 밀칙의 존재까진 모르겠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그와 비슷한 수단으로 당신의 뜻을 직접 전하려 하신다 해도, 태사 미리안이 모르는 일이 진행되어선 안 된다는 경고다.
특히 태사의 정책에 반대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 밖에도 미리안은 정치경찰실, 철도성 또는 제국정보사령부와의 ‘개별 협력’에도 제한을 두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야전 사령관의 재량권을 어떻게든 축소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모든 명령 체계를 태사 자신에게 ‘일원화’할 것을 강조했다. 군 통수권자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흘끔 본 장해진 대장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우흥섭은 아마 자신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다.
-기도하는 수밖에 없나.
막연히 어떤 신이든 들어주소서, 하는 기분으로 우흥섭은 소망했다.
제발, 자신이 이 임무를 마칠 때까지 다이온에서, 동아시아에서, 세계에서 아무런 격변도 일어나지 않기를.
***
한때는 ‘무당 동무’라 불렸던 남자는, 이제는 ‘차파르’라는 이름으로 리안 앞에 앉았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안이 격도 맞지 않고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인사를 건네는 건 어디까지나 이 몽골 제국입헌당이 고려 제국입헌당과는 별개의 정당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함이다.
그래서 차파르도 리안의 연기에 어울려주었다.
“아닙니다. 고려의 타이시께서 찾아주시니 저희 쪽에서 오히려 영광이지요.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지만, 리안은 마주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을 뿐 쉽게 본론을 꺼내지 않는다.
“몽골의 개혁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신다 들었습니다.”
“내전으로 큰 상처를 입은 나라니까요.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는 상처 입지 않도록 ‘예방적 개혁’을 하려면, 잠을 아무리 아껴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바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태사와의 면담에 임할 만큼, 그 중요성은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빨리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그런 신호를 애써 무시하듯 리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개혁책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비인간적으로 긴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든가, 최저임금의 보장, 각종 산업 재해에서의 보상, 아동과 청소년의 노동 금지 같은 것들이 있겠습니다.”
다른 정당의 정치인이 들었다면 ‘사회주의적’이라며 경멸의 시선을 보냈을 법한 개혁안들. 하지만 인민을 쥐어짜서 국력을 성장시켜도 결국 사회가 폭발해버린다면 소용없다는 걸, 지난 내전이 모두에게 가르쳐주었다.
리안은 그런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아마 그녀 자신이 고려 제국에서 진행하는 개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 점은 차파르의 마음에 들었다.
“……쿠릴타이에 상정되었나요?”
“예, 일단은……”
“쉽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기업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요.”
이전의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이었다면 이런 의회정치 따위는 무시해버렸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의회 내에서 여러 세력과 타협하면서, 개혁안을 물렸다가 다시 들이미는 과정을 끈질기게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중에서도 ‘특히’ 개혁에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미묘한 어조의 변화.
고려의 타이시는 슬슬 본론을 꺼낼 모양이다.
“글쎄요…….”
이번에는 차파르 쪽에서 뜸을 들였다.
“‘헌법’이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가장 걸리는 부분이 아닐지.”
몽골의 ‘관습’은 카간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 ‘위에서 아래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 것은 윗사람 개개인의 미덕이지 아랫사람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다.
성문 헌법에서 ‘행복추구권’ 등을 규정하는 다른 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즉 ‘반드시 개혁을 추진해야 할 의무’가 쿠릴타이의 의원들에겐 없는 것이다. 개혁을 추진해 국민의 삶을 보호하자고 해도 그것은 군주나 귀족이 백성에게 베푸는 아량이지, 국민 앞에 쿠릴타이가 마땅히 헌신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다.
네스토리우스파나 불가의 가르침이 희미하게나마 그런 의무감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말 그대로 ‘희미하다’. 희미함으로는 개혁에 힘을 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제헌 쿠릴타이’를 소집하는 게 먼저겠군요. 고려의 제국최고회의에서도 같은 과정을 거쳤답니다.”
“예, 그래서 저희도 그런 제안을 몽골의 타이시께 드렸습니다만……”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차파르는 말을 멈췄다.
의도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볼로드 타이시가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인가요?”
“타이시……! 지금 무슨 이야기를 꺼내시려는 건지 분명히 해주시지 않으면, 저희도 위험 부담을 질 순 없습니다.”
“나는 ‘볼로드 타이시의 실각’에 대해 이야기하러 온 겁니다.”
미리안이 뱉은 말 자체의 충격.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안도감과 어지러움.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혼란.
이 일을 통해 ‘중요한 위치’로 올라서게 되리라는 기대감. 그래. 이를테면, 몽골 제국입헌당에서 자신을 새로운 ‘타이시’로 추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파르는 리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되물었다.
“볼로드를, 실각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볼로드가 있는 한 몽골의 헌법 제정도, 몽골의 개혁도 차일피일 미뤄지기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대체 어떤 방식으로…… 볼로드의 권력은 강대합니다.”
물론 당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무력이다. 고려의 군사력이 칸발리크를 기습, 볼로드를 단숨에 몰아낼 수는 있겠지.
문제는 그런 방법으로는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당장 고려는 침략자가 되고, 몽골 제국입헌당은 그런 침략자들의 앞잡이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그러니 무력 개입은 논할 가치도 없다.
“헌법 제정을 밀어붙이면서, 그 헌법에 반대하는 볼로드를 탄핵할 수 있겠죠. 우리 고려 제국입헌당에서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몽골 제국입헌당에서는 ‘잊혀진 옛 동지들’까지 발굴해서 인적자원을 확대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면, 이라며 리안은 말을 이었다.
“압박의 방향을 다양하게 하는 거죠. 당장 제헌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면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말입니다. 몽골 국민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이 헌법 제정에 있다면 더는 외면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압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압박은 압박입니다. 압박만으로 볼로드를 물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은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좀 ‘장기적’으로, 천천히 일을 진행하고 싶어서요.”
그간 오랜 핍박의 세월도 견뎠는데, 그 정도도 못 견디겠어요? 라고 물으며, 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미소가 말할 수 없이 위험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