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선과 이익선(7)
위태로운 공존은 오래가지 못한다. 류성일은 주견하의 부모가 죽은 데 대해 책임이 있다. 언젠가는…… 류성일이 주견하를 죽이든, 주견하가 류성일을 죽이든 결판이 나겠지.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오고 류성일도 은퇴를 압박당하는 상황에서, 비밀이 영원히 지켜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세규 자신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그러나 류성일이 저지른 것은……황제가 분명 ‘죄악’이라고 언급했듯이 드러나고야 말 것 같다.
“류성일이 혼자 죽지 못해 나까지 끌어안고 죽으려 든다면, 그를 버리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류성일을 계속 감싸다 결국 주견하와 맞서게 되는 상황도 달갑지만은 않다.
“맞서야 한다면, 더 크기 전에 짓밟아야 하는가.”
아직 감찰국장일 때,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넓은 지지를 확보하기 전에.
세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 한구석을 노려본 채, 그만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주권선과 이익선이라……. 그래, 이런 아이디어는 왜 안 나오나 했지.”
막 키타이 국경을 벗어난 리안 앞에 도착한 전보.
내무성에서 보낸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내적으로 이론 강화를 하고 있을 사람이니까.”
“……그렇죠.”
리안의 평에 효윤도 동의를 표했다. 그래도 지금 견하가 보이는 행보는 얌전한 편이다. 동명 밖으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이걸 ‘내무성’에서 보낸 이유를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리안은 왼손 중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안 장관이야 원래 루우의 카간 자리에 대한 야심도, 다이온의 수립과 확대도 꺼려 하던 사람이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경계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다만,”
왜 ‘이 시점에서’가 문제다.
“배영훈 중령에게 미행이 붙었다는 보고가 있었지.”
“네.”
“그렇다면 안세규는…… 내가 그를 경계한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언니가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안 장관도 알고 있겠죠?”
“정보력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사실 자체는 파악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동명 정계 일각의 ‘확장주의적 행보’를 경계해주십사, 라.”
개봉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쳤나 싶었는데, 귀국하면 할 일이 귀국도 하기 전에 들어온다.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지 한숨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일의 순서가 차례로 떠오를 뿐.
“귀국하면 일단 외무성 쪽부터 들러봐야겠어. 조 장관과 이번 개봉회담의 성과를 논하는 한편으로,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봐야지.”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하는 것이다. 안세규의 말에 모두 동의하진 않더라도, ‘다이온의 폭주’는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주권선과 이익선 이야기가 ‘침략 논리’로 쓰이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니까.
“그래도, 몇 가지 우려되는 점을 제외하면 유용할 것 같지 않아?”
루우는 다이온 연방과 몽골 황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는 다이온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급변 사태에 고려가 개입할 명분을 주었다.
이번 회담에서 리안은 독립 보장 선언을 통해 각국의 ‘주권 수호’를 돕는다는 명분을 강화했다. 리안이 원하는 대로, 한동안은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세력 균형이 유지될 것이다.
원철의 사업 확대는 그 자체로 고려의 영향력을 높이는 동시에, ‘고려인의 재산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고려군이 개입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논리를 도입한다.
당연히 다이온 연방의 현 구성국이야 ‘주권선’ 내부이니 고려군을 비롯한 ‘다이온군’이 문제 상황 발생 시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 참관국으로 받아들인 대예나 보우슈엥은 ‘이익선’ 논리, 즉 이들 문제는 다이온의 중대한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는 논리로 ‘보호’할 수 있다.
몇 겹으로 이루어진, 리안의 구상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들. 이런 장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일의 진행은 신중할수록 좋듯이.
“하지만 타국이 알게 됐을 때는,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특히 일본공화국의 반발이 심하겠지.”
“네. 게다가 제 생각엔…… 이거, 우리만 쓸 수 있는 논리는 아니지 않나요? 그게 가장 걱정되는데.”
“음…….”
효윤의 지적은 날카롭다. 그렇다. 주변국의 반발이 반발에서만 그치면 다행이다.
너도나도 자신들의 주권선 너머에 ‘이익선’을 설정하고, 그러다 이익선들끼리 충돌하기 시작한다면?
“예를 들어 일본이 하와이를 자신들의 이익선으로 설정하고, 아즈텍 대륙의 신정권이 일본 코앞의…… 이오섬 같은 곳을 이익선으로 본다면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갈등하겠군.”
“네. 전쟁으로까지 번져나갈지도 몰라요.”
로마 제국이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를 이익선으로 설정한다면 어떨까. 브리튼이 다시금 에이레를 자기네 ‘이익선’ 안에 넣는다면?
고려와 바라트는 어떻지? 리안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엔 두 나라 사이에 맺은 세력권 분할을 파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바라트 측에서 라타나코신이나 베트남 지도 위에 이익선을 긋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 쪽을 예로 들어서 상상해도 끔찍한 결말만 나온다.
“유용하다고 받아들이기엔 문제가 많지 않을까요. ‘낭키아스의 일’만으로도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은데, 여기다 주권선이니 이익선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동요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리안은 끄덕였다.
소년, 바이다르에겐 낭키아스의 독립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고려군이 그를 보호해주기로 했다.
일차적으로 우흥섭 대장이 긴급히 바이다르를 보호하러 응천에 진입하고, 이후 고려 태사가 직접 지휘하는 지원군이 바다를 건너기로.
단순히 선의만으로 맺은 약속은 아니다.
리안 나름의 계산이 깔린 약속이다.
그녀가 바이다르에게 그런 보장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그 ‘약속의 내용이 흘러나가리라’는 계산.
“낭키아스에는 다양한 파벌이 있지.”
20년 가까이 뿌리내린 낭키아스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
게레센제가 즉위할 때 따라가지 못했어도, 칸발리크 정계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
이와 유사한 무리로, 바이다르를 보좌하며 그가 카간 자리를 잇는 날 새 카간의 중신이 되어 칸발리크로 나아가려는 자들.
울제이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가 낭키아스를 차지하여 세력을 확대하길 원하는 자들.
“내가 바이다르 칸에게 한 약조는 이 모든 파벌을 동요케 하겠지.”
파벌들의 목적과 행동은 딱 잘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목적이 불일치할지라도 과정의 일부가 겹친다면 힘을 합친다.
방법에 이견이 있어도 목적이 같다면 힘을 합친다.
반대로 목적이 같기 때문에, 즉 결과물을 양보할 수 없기에 반목하는 경우도 있다. 길이 너무 좁아 서로가 방해된다면 밀어내느라 바빠진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낭키아스 정계는 나름의 균형을 찾아간다.
“내가 뱉은 말은 그 균형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겠지.”
파벌들뿐만 아니라, 바이다르 칸도.
“바이다르 칸, 그 아이도 자기 나름의 계산을 할 거야. 그러지도 못할 멍청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나를 찾아와 도움을 구할 생각도 못 했겠지.”
하지만 바이다르는 굳이 ‘외부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즉, 그 아이도 자기 나름의 친위혁명을 계산에 넣고 있어.”
“설마…… 이제 열서너 살쯤 되었잖아요?”
“내가 벨리사리오스 황자와 동맹을 약속한 게 열일고여덟 살쯤의 일이 아니었던가?”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늙어서도 유아적 발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소년의 몸으로 이미 성인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인간도 있다.
“바이다르가 전적으로 그런 천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보르지긴 황실의 교육은 믿을 만해. 또래에 비해선 확실히 성숙한 아이야. 그리고,”
어쩌면 리안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던 친위혁명을 자신의 모델로 삼고자 할지도 모른다.
“바이다르 칸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야. 낭키아스의 독립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도 거짓은 없어.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방해물이 너무 많아.”
바이다르는 고려군의 힘을 빌려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자기만의 세력을 확보하려 한다. 엉뚱한 꿈을 품은 파벌을 제거하거나 억누르고, 오직 자신에게 충성하게끔 한다.
“바이다르의 그런 생각은 금방 읽힐 거야. 그럼 다들 고민하겠지. 울제이를 은근히 지지하던 쪽은 어떨까? 나는 그자들이 겁에 질려서 일단 사태를 지켜보거나, 바이다르 앞에 납작 엎드리리라 보는데.”
“동요한 나머지 정신이 나가서 울제이를 부를 가능성을 완전히 접어둘 순 없어요.”
“맞아. 하지만 그때는 장해진을 움직일 거야.”
키타이 파견군이 즉시 개봉으로 진입한다.
울제이도 그 정도 계산이 선다면 가벼이 움직이진 않겠지.
“낭키아스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일종의 토호화된 무리는 대세에 따라 흔들리는 자들이야. 일단은 바이다르에게 복종하는 쪽이 이익이라고 판단할 테고, 어쩌면 몇몇은 고려에 접촉해 좀 더 짭짤한 이익을 거두려 할지도 몰라.”
“그럼 그들은 어떻게 활용할 생각이세요?”
“딴생각 말고 주군에게 돌아가 보좌나 잘하라고 따끔하게 일러줘야지. 다이온 4개국 중에서 가장 불안정한 낭키아스의 정세를 어떻게든 안정시켜야 하니까.”
바이다르를 카간으로 세우고자 하는 무리는 고려의 개입에 다소 불만을 품을 것이다. 고려군을 통한 영향력 확대는 루우 테무르가 카간 자리에 더 가까이 간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은 바이다르의 권위와 권력이 확보되는 일이니까 가만히 있을 거야. 우리도 그런 자들이 있어 주는 편이 ‘균형’에 좋으니까 일단은 내버려 둘 거고.”
오히려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이는 쪽은, 칸발리크 정계로의 진출을 꿈꾸는 자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에겐 게레센제 카간과의 연결, 그에게 보일 충성 증명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런데 낭키아스가 고려의 영향권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 같다? 도저히 참고만 있을 순 없을걸.”
아무리 리안이 독립 보장 선언을 했고, 또 리안 본인은 바이다르의 권력이 안정되는 대로 낭키아스에서 물러날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그걸 남들도 알아주진 않을 것이다.
“당장 카간에게 쪼르르 달려가 개입과 고려에 대한 규탄을 요청하겠지. 그 자체로도 귀찮지만 속내는 더 괘씸해. 그들이 바이다르의 권위가 확립되길 바랄까?”
아니겠지, 라며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자들은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바이다르가 꼬마로 남아있어 주길 바랄걸. 그래서 자기네들이 마치 섭정이라도 된 양 낭키아스를 나눠 먹고 칸발리크마저 농락하려 들겠지.”
그러니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 고려군이 낭키아스의 정세에 개입할 때에는, 가장 먼저 이 ‘칸발리크 진출파’를 제거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