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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37화 (337/541)

주권선과 이익선(6)

세규는 루우의 말을 곱씹어본다.

류성일의 죄악, 이라 말하고 있지만…… 죄는 누군가가 ‘알아야’ 비로소 약점으로 작용한다.

즉 황제가 지금 계속 빙빙 돌리는 말과 달리, 이미 태사와 그 주변에선 류성일과 자신을 견제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태사의 주변…… 류성일의 죄악…….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세규는 눈을 부릅떴다.

소름이, 발목 언저리에서 어깨까지 타고 올라온다.

설마, 주견하가…….

“그대가 버팀으로써 모두를 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야. 그대가 버티면 피비린내가 온 동명을 뒤덮을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태사와의 담판을 시도할 것인가?

류성일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자신이 제거되나 다른 누군가가 제거되나 제국의 안정이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라면, 아예 ‘판을 뒤엎을’ 준비를 해야 하나?

동요하는 안세규 앞에, 황제가 먼저 ‘제안’을 던졌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세규는 그저 눈에 의문을 담아 황제를 바라봤다.

“짐이 유예 기간을 벌어주지. 대신 그대는……”

루우의 눈이 금빛으로 빛난다. 세규는 오랜만에 보는 빛이다.

“겉으로만 짐의 카간 즉위와 다이온 연방의 수립을 찬성하지 말고, ‘진심으로’ 동조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여론에 밀려 못 이기는 척 찬성했던 다이온 연방의 수립.

안세규는 내무장관으로서뿐만 아니라, 고려국민당의 총수로서도 다이온 연방에 대한 지지를 표해야 한다.

당연히 그가 이끄는 내무성의 정책도, 고려국민당의 당론도 다이온 연방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쪽으로 움직여야겠지.

게다가 루우의 카간 즉위.

그녀는 이제 거리낌 없이 자신이 카간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 말한다.

게레센제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다는 듯.

그 어떤 망설임도 남지 않았다는 듯.

세규가 여기에 끄덕이면, 고려 내부에서 그녀의 뜻을 가로막을 자는 사실상 없어진다. 이제 고려의 다이온 정책은 루우의 카간 즉위까지 일직선으로 질주할 것이다.

민주나 공화보다도 ‘제국’이 우선하는 시대가 찾아오겠지. 그 시대는 꽤 오래 갈 테고.

제국을 어떻게 통합할지,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이 어떻게 공존할지, 그런 화두가 가장 주목을 받고, 민주와 공화는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다.

물론 민족 간 공존 문제의 해법으로 민주와 공화를 제시하여 돌파해나가는 방법도 있다. 범좌익이 민족 문제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풀어나가려 하듯 말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기엔 너무 어렵다. 민주적, 공화적 원칙과 민족의 이익이 충돌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럴 때 민족의 이익이라는 파도는 모든 논리를 휩쓸어버리곤 한다.

모든 정치인은 그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다.

너희는 너희의 그 잘난 이상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이상을 접어둘 것인가.

전자를 택한 정당이 살아남을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적당히 대중의 뜻과 타협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겠지.

루우라는 단일한 군주가 다스리는 다이온은 몇 번이고 그 길마저도 가로막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돌아가는 길이라도 길은 길.

“……신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여론부터. 내무장관의 정책에 동조하는 자들이든, 고려국민당을 지지하는 자들이든 모두가 짐의 카간 즉위는 ‘기본적’으로 바라는 상태를 만들어야겠지.”

찬반이고 갑론을박이고 없이, 그저 고려 국민이라면 당연히 루우의 몽골 카간 즉위를 바라게 한다.

온 고려를 동원해 다이온에 부딪칠 생각이다, 황제는.

세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

안도의 한숨이 루우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하늘을 향해 뻗는 듯한 그 목선을 누군가 본다면 감탄을 터트렸겠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다.

“유예, 라…….”

유예는 안세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루우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했다. 리안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고.

안세규와 류성일 사이에 대체 어떤 거래가 오간 것인지, 루우는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저 정황상 안세규와 류성일 모두 고려가 내전에 이르도록 공작을 벌였다 짐작할 뿐이다.

특히 류성일은 미승휴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것 같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그렇기에 미리안이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을 면할 방법은 없겠지.

“구체적. 구체적…… 그게 중요한데.”

어떤 거래가 오갔으며, 어떤 음모가 있었고, 있을 예정인지, 우리는 어떻게 그 음모에서 살아남았는지 아니면 여전히 그들의 손아귀 위에서 춤추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모조리 파악해야만 했다.

“태사는 정보가 확보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인 것 같지만…….”

루우가 보기엔 위험한 방식이다. 아직 류성일과 안세규 모두 숨이 붙어 있어야 한다. 제국의 유지에 필요하니까. 그들은 ‘어느샌가’ 밀려나 오래된 추억으로 사라져야 한다.

그때가 되면 류성일이 어딘가에서 급사한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

정보는 정보대로 확보해서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추가적으로 그들을 서서히 밀어낼 장치가 필요하다.

루우는 이미 그 장치를 구상해뒀다.

“카라코룸 천도, 「화림 계획」…….”

주견하와 한재연, AN연구소의 작품인데, 매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게레센제 카간이 다이온 연방의 상징적 지도자를 맡고, 각국은 주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얼마 전 막을 내린 ‘개봉회담’에서 각종 의제를 조율한다.

그러나 루우 자신이 고려의 황제와 몽골의 카간을 겸하게 되면, 이 체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태사 미리안의 구상대로 다이온 각국의 주권을 유지한다 해도, 연방 통합 기구, 이를테면 ‘연방 의회’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테니까.

상원 혹은 하원, 참의원 또는 민의원, 어떤 이름이든, 쿠릴타이와 제국최고회의는 하나가 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몽골계 정파를 연방의 중앙 정계에 받아들이겠지.

몽골 정치인들을 받아들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고려국민당이나 제국입헌당 내 류성일 파벌의 비중을 낮춰 나간다.

“카라코룸 천도는 거기에 쐐기를 꽂는다.”

견하는 그 도시를 미리안의 도시로 삼을 생각이라 했다.

약간 섭섭한 마음에 루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섭섭할까. 그런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고 그녀는 카라코룸 천도 계획 그 자체에 다시 집중했다.

완전히 미리안의 색으로 칠해진 도시라면, 고려국민당을 비롯해 미리안과 대립할 수 있는 모든 정파의 뿌리가 뻗지 못한다. 뻗으려 해도 동명의 뿌리를 캐내서 조심스레 옮겨 심어야겠지.

다시 예전처럼 뿌리내리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고.

루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래 계획은 거기까지다. 이제 당장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리안은 배영훈 중령을 통해 안세규의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모아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다. 그녀의 선택지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주견하, 한재연, 유지나를 비롯한 감찰국.

그러고 보니 견하는 전에 류성일과 한 번 접촉했다고 했었지.

견하를 통해 안세규의 뒤를 캐보자.

일처리 면에서는 믿을만하기도 하고, 설령 성과가 크지 않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얻는 게 있을 테니까.

***

허탈감과 막막함 속에 내무성으로 돌아온 안세규를, 일련의 보고서들이 맞이했다.

내무성 장관에게 통상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는 아니었다. 다른 경로로 올라온 그 보고서들은, 최근 외무성 쪽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주권선 및 이익선?’ ……이거였나!”

놀라움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경악과 분노가 세규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그래. 예측은 했지.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고. 하지만……”

상대는 ‘단계를 밟아나가지 않는다’.

루우가 카간위 계승의 야망을 드러낼 때부터 이미, 어디까지를 다이온의 영향권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세규의 눈에 제국은 이미 폭주의 첫머리를 드러냈다. 아니 폭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막을 수나 있을 것인가.

수단을 강구해라.

선택지는 별로 없다. 외무성에서 막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를 사방에 퍼트리며 여론전을 펼칠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을 통해 저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대의명분이 필요한 싸움은 적이 분명히 드러날 때까지 시작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늘 늦는 감이 있지만.

게다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오히려, 퍼트릴수록 더욱 힘을 얻는다.

이 아이디어를 낸 자들은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를 국가 정책으로 밀어붙이려 들 것이다. 외국에 흘러 들어가면 다소 곤란해지겠지만…… 저들은 타국의 경계나 적개심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려 들겠지.

국민들은 어떨까.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이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해도 그 수는 얼마나 될까. 소리 높여 반대를 표명할 만큼 세력을 모을 수 있을까.

모두 부정적이다.

상황은 나쁘게만 돌아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루우 혼자 멋대로 행동하는 걸 막지 못했을 때부터인가? 몽골의 제정을 끝내고 공화국을 지원하려 했을 때부터?

아니, 아니지.

세규는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자신의 뺨을 쳤다.

“비관할 필요는 없다.”

근래 3년이 아니라, 10년 단위로 보면 고려국민당과 구 민국정부 세력은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다. 지금 받는 압박은 미승휴 시대의 탄압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그때는 이렇게 합법적인 정당으로 의회정치에 참여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지 않았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 누가 힘을 빌려줄 수 있고 그럴 의사도 있는지 찾아보자. 차분하게, 다시금 이 정계의 세력 구도를 살피자.

“역시, 다시금 태사에게 말을 건네보는 수밖에 없나.”

태사에겐 힘도 있고, 주권선이니 이익선이니 하는 이 침략적 아이디어를 꺼릴 이유도 충분하다. 한때는 세규와 리안 모두 루우의 권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제휴했었으니까.

최근엔 태사가 주견하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태사의 활동에 발맞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지금까지 주견하의 주된 활동이었는데, 지금은 동명에 가만히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태사는 그저 자신의 빈 자리를 지키라고 말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주견하와 대면했던 제국정보사령부의 고태용은 신나게 움직인다는 점은 뭔가 이상하다.

“주견하…….”

이름을 되뇐다.

출신과 나이를 생각했을 때 평생 걸려도 올라올 수 있을까 말까 한 자리까지, 그 청년은 올라왔다.

여기가 그의 한계일까,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혹은, 한계를 맞이하게끔 해야 할까.

“류성일과 주견하를 저울질하는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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