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선과 이익선(5)
세규는 황제가 알현을 거부할지도 모르니, 몇 번이고 청할 것을 각오했었다. 그러나 루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긴 복도를 지난다. 화려함과 정갈함이 뒤섞여, 이 건물은 정원과 집무실이 뒤섞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윽고 황제의 앞에 도착하자, 근대 국가 고위 관료의 몸은 전통 시대의 예법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황제에게 올리는 말이라기엔 조금 불손하다. 그러나 루우는 그 점을 따지고 들진 않았다.
제3제국의 입헌군주정 체제가 유지되는 데에는 안세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단순히 루우를 고려로 데려온 데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고려국민당 내에서 미리안 정권과의 제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을 억누른다.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이 ‘제정’을 부정하려 들 때, 그들을 어떻게든 제국 체제에 묶어둔 사람도 안세규였다.
지금은 견하도 ‘개혁’을 미끼로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 함께 일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안세규 덕분에 가능했다.
즉, 안세규는 존재 자체로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둥 중 하나다.
미리안이든 루우든 다른 누구든, 안세규를 쉽사리 제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리안이 갑작스레 실각할 경우의 충격보다는 덜하겠지만, 안세규도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한다면 제국에는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균형은 붕괴되고, 루우와 리안은 자신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의 파도에 허덕이겠지. 권력의 공백, 기둥이 사라져 천장이 무너진 자리에는 자기가 기둥이 되려는 막대기들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능을 상실한 잉여 인간들만 넘쳐날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렇게 답했다.
“실로 그러하군.”
딱 그렇게만 말하고,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오늘 알현에서 용무가 급한 쪽은 안세규이지 루우가 아니었으니까.
“폐하, 저는 최근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짐은 그대의 주변에 뭔가를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게다가 짐은 황제다. 신하인 그대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요구하는 자이지, 공작을 꾸미는 자가 아니다.”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신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은……”
세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단어 하나하나를 공중에 새기는 것처럼 말했다.
“……태사 미리안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어좌 위의 루우에게선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감정을 감추는 데에는 또래보다 능숙하기도 했지만, 즉위 이래 3년 동안 더 성숙한 듯하다.
혹은, 더 능청스러워졌든지.
“내각의 일은 태사와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옳지 않은가?”
“태사는 지금 멀리 나가 있습니다.”
“내무장관은 그 정도 시간도 못 기다리는 자인가?”
“태사가 돌아온다 한들 신의 물음에 대답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짐이 그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혹은 폐하께서 태사에게 조칙을 내려주실 수도 있겠지요.”
여기까지 대화가 오가고서야 세규는 느꼈다. 황제는 태사와 세규 사이에 얽힌 일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면 세규에게 도움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든가.
루우는 다리를 꼬았다. 황제가 침묵하자 세규는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신의 주변을 탐문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태사가 보낸 자입니다.”
“내각의 수장이 장관을 감찰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의무라고 할 수 있지. 그것이 불쾌한가? 불쾌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야……”
“짐이 먼저 말해보지. 둘 중 하나일 터. 첫째는 내무장관씩이나 되어서 그런 감찰을 받아야 하나, 싶은 쓸데없는 권위 의식일 것이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세규는 황제의 말을 끊지 못했다. 기세도 기세거니와, 그 정도 불손을 저지르는 것이 망설여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는 탐문을 통해 드러나선 안 되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폐하…….”
“어느 쪽인가, 그대는.”
어느 쪽이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세규가 침묵을 지킨다.
“태사는 고려 국민이 선출한 제국최고회의가 추천하고, 짐이 승인한 자다. 그런 자 앞에서 내무장관이 권위를 세우려 든다면 그보다 참람한 일은 없겠지.”
어좌 위의 얼굴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다.
“탐문으로 드러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든지, 추잡해지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을 터.”
“……폐하.”
세규는 잠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안세규쯤 되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황제 앞에 이런 분노를 들이밀 수 있으랴.
“신이 폐하를 처음 몽골에서 모시고 나올 때를 기억하십니까.”
“짐은 그대가 그때 보여주었던 충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짐의 권력을 헌법적으로 제한하기 위해서 애썼던 것도 알고 기억하고, 짐이 몽골의 카간 자리를 잇는 걸 방해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도 기억하지.”
“신은 이런 고려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거래가 그런 조건으로 맺어졌던가? 그대가 어떤 생각을 품었든, 그걸 설명한 적도 없고 동의를 구한 적도 없지. 잊어버려서일까? 아니지.”
루우가 아주 살짝, 상체를 세규 쪽으로 숙인 것 같았다.
“짐에게 맡길 역할은 어차피 꼭두각시였으니 그런 거래 조건을 추가할 필요는 없었겠지.”
그러니 루우는 다른 거래 대상을 찾았다.
리안을 찾아가 정체를 밝히고, 그녀에게 협력.
제3제국 체제의 불완전한 부분을 메워주었다.
“폐하께선 신의 영향력을 지울 생각이십니까.”
“짐이? 짐에겐 그런 권력이 없지. 그건 짐의 권력에 제한을 둔 내무장관이 가장 잘 알 텐데.”
“예. 하지만 폐하께선 태사에게 뜻을 전할 수 있으시죠.”
“태사가 짐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이던가.”
“폐하, 신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직 황위계승권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있던 시절.
안세규의 최측근 ‘무력’으로서 몇 가지 일에 관여했었다.
“짐을 협박하는가.”
루우의 물음에는 불쾌감보다는 오히려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신도 결국 파멸을 향할 길을 걸어가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가며 추잡한 폭로나 일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루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들어 한 번 가볍게 휘저었다. 세규는 말을 이었다.
“신이 원하는 것은, 폐하의 권위 아래 태사와의 중재입니다.”
“어떤 중재를 원하나. 지금까지 그대가 여기서 말한 것은 정체가 불분명한 갈등이었다. 그대도 설명할 수 없고 짐도 알지 못하는 것을 중재해달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먼저, 전 법무장관이자 현 카라코룸 행정장관인 류성일에 대한 핍박을 중단할 수 있도록, 태사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흥미롭다는 듯, 루우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대의 ‘주변’이 류성일 장관이었나?”
류성일과의 제휴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건가.
의외로 대담한 승부수를 띄웠다고, 루우는 생각했다.
“그러합니다. 선대 태사의 혈통을 잇는 태사, 구 제국 정부의 원로를 상장하는 류 장관, 민국 정부의 대표인 제가 이 제국의 세 기둥으로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저도 무너지고, 나머지도 무너지겠죠.”
그렇게 나오시겠다.
교묘한 화법이다. 은근슬쩍 류성일과의 오래된 동맹은 감추고, ‘지금’ 제국의 안정성을 우려하는 듯 군다.
재미있는 점은 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거다.
여러모로 계산된 말.
그래서 루우는 조금 안세규를 놀래주고 싶었다.
“류성일이 카라코룸에 가게 된 건 짐의 뜻이다.”
“예……?”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 안세규의 흔들리는 눈. 그 너머에서 오가는 계산을 본다. 상황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렇게 당황하면서도 다음 대책을 생각해내는 눈.
“폐하께서…… 어째서입니까.”
“류성일은 정계에서 제거되어야 하니까.”
침을 삼킨다. 각오해야만 하는가, 싶겠지.
“숙청입니까.”
“아니, 짐도 그렇고 태사도 선대 미승휴의 일을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도 짐도 보다…… 세련된 방식을 원하지. 류성일은 한직을 돌다가 조용히 잊힌다. 그게 그에게 주어진 결말이다.”
리안도 루우도 젊다. 류성일이 아무리 장수해도 재기는 불가능하겠지.
버려야 하나, 순간적으로 세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제거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굳이 설명해야 하나.”
“폐하께서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저 또한 아는 이유라는 뜻입니까.”
“둘 다다.”
“신은 신과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류성일을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태사와 대립하겠다고?”
“태사가 고려국민당과의 제휴를 포기하면서까지 저와 맞서려 하겠습니까?”
뼈아픈 지적이다.
제국최고회의의 현 권력 구도와 내각, 즉 제3제국의 체제는 고려국민당과의 연립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안세규가 단숨에 적으로 돌아서겠다면 그 세력의 열세는 확실하겠지만, 리안의 권위와 권력, 제국의 안정도 마찬가지로 무너진다.
“폐하의 권력을 제한하기로 한 건 태사도 동의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미리안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황제의 뜻을 받들어주리라는 기대는 접어두라는 말이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뜻을 받들어주는 자가 있어야 권위가 선다. 그래야 그자의 충심을 추켜세우고, 나머지의 불충을 타박할 수 있다.
허나 모두가 외면한다면?
“류성일의 제거는 그대의 안위에도 좋을 텐데.”
“잠시 간의 안위일 것입니다. 그 뒤에는 저의 제거가 예정되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미련하진 않습니다.”
하하핫, 하고 루우의 웃음이 어좌 위, 궁의 높은 천장에 가 닿았다.
그녀가 이렇게 큰 웃음을 터트리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격한 감정의 표현이다.
재미있었을 수도 있고, 노했을 수도 있겠지.
“이제는 목숨 구걸인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신들 상관없습니다. 신은 모두를 구할 길을 아뢸 뿐입니다.”
“모두를 구하기엔 너무 멀리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
멀리 나왔다, 라.
류성일과의 연대를 유지하고, 고려국민당과 자신의 입지를 보전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나.
식은땀이 흐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길만 있을 뿐이다.
세규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루우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여기서 ‘멀리 나왔다’는 건 짐이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야.”
“……?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짐에겐 권력이 없다. 짐이 노한들 그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겠지.”
“하지만 류성일 장관은 동명에서 내쫓지 않으셨습니까.”
“짐이 한 일은 그저 이미 위태롭게 쌓아 올린 류성일의 죄악 위에 손가락을 살짝 얹은 것뿐. 류성일 스스로 죄악을 쌓지 않았다면 짐이 무슨 수로 그를 변방에 보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