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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33화 (333/541)

주권선과 이익선(2)

방문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랜 세월 공화국을 이끌어 온 지혜로운 선생님. 일본이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영광을 거머쥐게 하고, 아시아 제일이라 자부하는 민주공화국을 지켜 온 사람도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이제 아즈텍이나 다이온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 세력권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누가 그러라던가?”

선생은 혀를 찬다. 이렇게까지 심지가 약해서야.

“힘의 차이를 인정하되, 끝까지 맞서겠다는 각오를 보여야지 어쩌겠는가.”

아즈텍에 굽히고 들어가면? 애초에 아즈텍 대륙의 새로운 세력이 일본을 굴복시키고 싶어 한다면, 결코 거기서 멈출 리가 없다.

그들은 또 다른 대륙으로 건너갈 교두보로서 일본을 노린 것이니까.

“다이온, 이를테면 고려에 굽히고 들어간다면 어떨까? 이보게, 다이온 다이온 하고 몽골어로 떠드니 다들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어떤 식으로 부르든 원나라는 원나라일세.”

세 번에 걸친 원정 끝에 일본의 옛 왕조를 끝장낸 최초이자 마지막 외세.

일본의 군주와 그 일족은, 몽골식 귀인 처형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지만…… 말발굽에 으스러진 그들의 육신에 대한 기억은 일본인들에겐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동쪽의 바다에서 군사적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느니, 동아시아가 뭉쳐야 한다느니, 그래서 아즈텍에 저항해야 한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며 결국 우리를 합병하려 들 걸세.”

그러니 끝까지 저항하는 수밖에. 선생은 그 말을 반복했다.

“우리를 치면 결국 우리가 지고 당신들이 이 땅을 합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와 전쟁을 하면 당신들 또한 다시는 전쟁 전 국력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기세로 대들어야 하네.”

그것이 독립이고, 중립이고, 완충지대의 진정한 의미라고, 선생은 말했다.

“두 강대국의 타협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그걸 깨뜨리면 정말로 ‘멸망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야.”

방문객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각오를 굳혔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선생은 뭔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방문객의 팔을 잡고 굳이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옆에 앉혀두고,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지만, 지금 정부에 ‘둘 중 한 세력에 의존해서라도 독립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있습니다.”

“적진 않겠지. 자네가 그렇게 어두운 표정인 걸 보면.”

방문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의 표정에서 농부의 얼굴이 사라진다.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노인은 쇠 긁는 소리를 내듯 말했다.

“죽이게.”

“선생님……? 우리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미승휴 시대의 고려가 아닙니다.”

“그들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펼친 주장일 테니 존중해줘야 한다고? 착각하지 말게. 정치가는 아무리 고결한 마음으로 정책을 내놓아도 그게 결국 나라를 망칠 계책이라면 죽어야 하네.”

아마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그게 일본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다. 웃기지 말라고 하게. 노인은 노한 듯 몸을 떨며 말을 쏟아냈다.

“현실에는 타개책이 있을 뿐이지 순응책은 없네. 죽이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죽일 자들을 살려두면 민주공화국이 죽네.”

둘 중 누군가에게 기대려 들면,

기껏해야 둘 사이에서 분할될 뿐이다.

“외교와 굴복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외교에 대해 더 떠들게 놔두어선 안 되네.”

하지만 방문객은 선생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하고, 따르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들여다보면 노인은 혀를 차고 일어났다.

“돌아가게. 자네가 그들을 죽이지 못하면 자네 역시 일본을 망칠 인간일세. 죽이고 나서는 언제든 돌아와도 좋지만, 그러지 못하고 타협이니 뭐니 하면서 시간만 끌 거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게.”

어차피 그걸로 일본은 끝장일 테니.

노인은 등으로 그 말을 흘리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객의 하직 인사에도 끝끝내 답하지 않았다.

***

‘선생’의 걱정은 아주 정확했다.

“편의상의 합의에 ‘명분’이라는 옷을 입혀야 해.”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를 전후해 바라트와 맺었던 합의.

바라트는 동쪽으로 버마까지, 다이온은 서쪽으로 대예와 보우슈엥까지 세력권에 넣는다. 그런 세력 분할안을 내용으로 담았다.

베트남과 라타나코신은 중립국으로 남겨 두어, 두 세력의 완충지대로 삼는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완충지대를 차지하면 ‘접촉한 국경’이 넓어질 뿐만 아니라, 바다를 둘러싼 세력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다이온이 그 지역을 차지할 경우, 남쪽 바다를 돌아 인도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바라트가 그 지역을 차지하면, 동쪽 바다를 돌아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피차 신경 날카로워질 일은 피하자는 데에 양쪽 모두 동의한 결과였다.

물론 이러한 합의에 당사국인 대예, 보우슈엥, 버마가 동의했을 리 없다.

버마야 이제 세력을 잡을 ‘혁명 세력’이 동의하겠지만, 보우슈엥과 대예는 아니다.

그러니 ‘명분 치장’이 필요하다.

“뒤에서는 이미 분할을 합의했으면서, 겉으로는 ‘바라트, 당신들이 더 동쪽으로 나와서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위협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며 연극을 하는 거지.”

견하의 말에, 재연이 싱긋 웃는다. 이 두 사람이 완벽한 의견의 일치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이다.

“하지만 단순한 ‘선의’는 설득력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 AN연구소에서 그럴싸한 이론을 또 만들어 냈잖아.”

“대예와 보우슈엥의 주권 수호는 다이온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훨씬 더 설득력 있으니까.”

그래서 나온 개념이 바로 ‘이익선’이다.

다이온이, 고려가 선의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대예와 보우슈엥을 보호한다. 두 나라 입장에선 차라리 이쪽이 더 믿음직하다.

대예와 보우슈엥의 군사 지리적 이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이온과 고려는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절대로 대예와 보우슈엥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의존해오기 마련이지.”

“안 그래도 이미 개봉회담에서는 그런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는 것 같네.”

잠자코 있던 이 자리의 주인, 조유관 외무장관이 두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 결론이 몰고 올 파장일세.”

대예나 보우슈엥은 그렇다 치고,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바라트는 이미 세력권 분할을 합의했고, 로마의 경우 견하가 황자 벨리사리오스와 담판을 지었다.

유럽의 다른 강국들도 아시아 문제보다는 아즈텍 내전에 더 주의를 기울일 터.

언젠가 7차 콘스탄티누폴리 평화회의에서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더라도, 1935년이나 되어야 한다.

비판은 할 수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동남아시아 문제는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 간섭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소거법으로 따져보자면,

“……일본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군요.”

“음.”

짧게 신음 같은 동의를 흘린 뒤, 조유관은 탁자에 놓인 서류들을 슬며시 견하 쪽으로 밀었다.

내용은 견하와 재연도 이미 알고 있다. 조유관의 행동은 ‘이 점을 생각해달라’는 요청일 뿐.

서류들은 이미 철도장관과 재무장관의 손을 한 번씩 거친 것이었다.

철도성에서는 원철을 통해 키타이와 낭키아스, 한족 관리 특구 및 보우슈엥과 대예까지 철도사업을 확장하는 방안을 승인.

재무성에서도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검토 결과를 올려왔다.

“우리는 고려의 ‘주권선’을 넘어서 ‘이익선’으로 다이온까지 영역을 확장했네. 그리고 다이온의 ‘주권선’을 넘어서서 보우슈엥과 대예를 ‘이익선’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두 번에 걸쳐 반복된 일.

“세 번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말해도, 어떤 나라가 믿어주겠나.”

견하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이미 몽골에서 고려의 확장에 반발하던 사람들을 보았다.

지금은 아즈텍 문제에 집중하느라 한 걸음 물러서긴 했지만, 일본은 한족 반란군 토벌전에 관전무관을 보내는 등 은근히 ‘다이온’을 견제해오고 있었다.

주권선과 이익선은 다이온의 ‘확실한 영역경계’를 만든다. 그래서 오히려 다이온이 그 이상 폭주하는 걸 방지한다.

이런 목적을 아무리 호소해도, 누가 믿어줄까.

애초에 믿어달라는 호소가 아니라 일방적 통보에 더 가깝다.

“일본에서, 뭔가 말이라도 나온 겁니까?”

일단은 질문을 던져본다. 외무장관이 파악하고 있는 바를 들어야 했기에.

“‘다이온’이라는 국호를 걸고 넘어지더군.”

견하와 재연 모두 의아하다는 얼굴이 된다.

“국호 말입니까?”

“왜 하필이면 ‘원나라’라는 이름인가, 하고 말이지. 원나라가 일본을 침략했던 역사를 떠올리고 일본의 감정을 배려했다면 그런 이름을 골랐겠는가…… 하는 식으로 약한 수준의 항의가 들어왔네.”

“그건 억지가 심하군요. 애초에 몽골이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포기한 적이 없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재발굴해냈을 뿐인데…….”

말을 하다 견하는 멈췄다.

이 문제는 논리 다툼이 아니다. 누구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올바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이 다이온 연방의 성립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 그걸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군요.”

“대놓고 ‘연방이 탄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조유관은 한숨을 내쉰다.

“일본 외교의 안 좋은 버릇일세. 자기네가 원하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빙 돌려서 표현하는 거지.”

“저는 싫어하는 방식이군요.”

태사 미리안도 싫어하는 방식의 외교다.

“그게 좀 더 품격이 있다거나, 상대를 배려하는 거라 믿고 그런다면 이해해볼 만하겠네만…… 정작 ‘솔직한 대화’를 시도하려 들면 시치미를 뚝 떼니 일본의 외교는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네.”

고려 쪽에서 ‘다이온 연방의 성립이 일본을 불안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면, 함께 논의해서 해결해보자’고 손을 내미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러면 일본은 ‘우리가 원나라라는 이름을 불편해했지 언제 다이온 연방 성립 자체를 문제 삼았나!’라고 항변해온다.

그래서 정작 원나라라는 이름의 문제를 논의하자고 나서면, 그때는 또 ‘다이온 연방의 성립 자체’를 논의해주지 않는 것을 섭섭해하는 것이다. 입은 꾹 다문 채로.

그 외에도 ‘비공식적 합의’를 맺은 경우, 상대국이 그 합의를 이행하고 나면 일본 쪽에서는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다며 합의 이행을 아예 거부해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고려인들 입장에서는 외교관들이 단체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아즈텍 내전 직후에는 그런 버릇을 좀 고치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병이 도진 모양이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불편한지는 말하길 꺼리면서, 고려 쪽에서 알아서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우리로서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원나라라는 이름을 왜 다시 꺼낼 수밖에 없는지 정도만 통보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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