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선과 이익선(1)
조유관은 전역해서 민간인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 구 극북방위군은 이제 ‘신 서부군’으로 군 내에 남아 있다.
조유관의 영향력은 아직도 상당하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조유관이 수장으로 있는 외무성에서, 요즘 타국과의 관계를 두고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두 요소를 따로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겠지.”
조유관이라는 한 사람을 공통분모로 엮인 두 가지 일. 분리해서 생각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강태훈의 씁쓸한 말에, 김천열이 조심스레 질문을 덧붙였다.
“조 장관이 자신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뭔가 꾸미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어쩌면. 주변의 경계를 샀을 때 나나 자네처럼 ‘한동안 엎드려 있어야겠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이 엎드려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조유관은 후자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유관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제국 군인들’ 앞에서 굽신거릴 수가 없다.
“조 장관 입장에서는 ‘그간 선후배는커녕 전우조차 아니었던 것들이, 우리 실력으로 쌓은 전공을 갖고 왜들 간섭이냐’는 심정일 테니까.”
세계대전 직후, 미승휴와 허동주, 고려민국 임시정부 이렇게 3개의 정부로 갈라져 있던 시절.
미승휴의 교활한 속임수와 가혹한 탄압이 남긴 상처는, 지금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그래도 외무성의 입에서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솔직히 저는 ‘국가 전략’ 단위의 일을 머리에 담기엔 미숙합니다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천열의 느릿한 말에 강태훈은 주억거렸다.
“걱정은 당연한 걸세. 군인은 일단 전쟁이 나면 최선을 다해 싸워야겠지만, 전쟁이 나기 전까진 ‘내 나라가 왜, 어떤 나라와 전쟁에 들어가는가’를 걱정할 수밖에 없어.”
군인이기 이전에, 국민이기 때문이다.
“……조 장관 개인의 야심 때문이겠습니까?”
더욱 목소리를 낮춘 질문이다.
“그 양반 속내를 모르니 확답은 힘들겠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보면 야심이야 있겠지.”
조유관의 야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문민 관료로서의 출세? 그렇다면 언젠가 의원으로 출마해 태사로 선출되기를 노리는 걸까? 그의 옛 부하들은 지지층이 되어 주겠지.
혹은 ‘고려 제국의 군사적 위기’를 통해 새로운 미승휴 또는 허동주가 되려는 걸까? 그가 아무리 옛 고려민국 임시정부와 가까웠고, 그 이상에 동조한다고 해도 실제로 권력을 쥐는 문제에서는 다를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혁명을 배반하고 독재자가 되었던가.
신성 제국의 보나파르트가 그러했고, 바라트의 아슬란이 그러했다.
조유관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김천열은 강태훈의 말이 이어지자 잠겨 있던 상상에서 고개를 빼 들었다.
“조 장관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혹은 조 장관이 거느린 추종자들만의 문제였다면 일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을 걸세.”
전쟁장관인 내가 중재를 하든지 해서 군 내 다른 파벌들과 입장을 조율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강태훈은 그렇게 말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의 의미를 되짚어보다, 김천열은 어떤 사실을 깨닫곤 눈을 부릅떴다.
“‘규모가 더 큰 일’이 뒤에 있는 겁니까?”
“……이건 그냥 자네 가슴에만 담아두게. 자네가 갑자기 카라코룸 행정장관에서 물러나 황성방위군으로 오게 된 것도 관련이 있으니까 해주는 이야기일세.”
김천열은 정치 문제가 나오면 슬쩍 발을 빼고 싶어 하지만, 마냥 물러서기만 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애초에 그가 태사의 편이 되어 내전에 참여한 것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었던가.
납작 엎드려 있더라도, 대체 위에서 뭐가 오가는지는 알아야 한다. 웅크리고 있으면 총알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포탄까지 봐주진 않는다.
“조 장관의 전역에는 안세규 장관의 뜻이 반영되었던 것 같네.”
“내무장관이…… 말입니까?”
“고려국민당 내부에서 대립한 모양이야. 그 왜, 신수덕 토벌 중에 일이 하나 있지 않았나.”
“황제 폐하께 반대하던 사람들을 숙청한 것 말이죠.”
“덕분에 안 장관은 고려국민당을 틀어쥐고, 고려국민당 내에서도 괜히 입헌군주제를 거부하는 급진적 목소리가 줄어들어 부담도 덜었지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든 듯하네.”
조유관 밑으로.
안세규의 독주에 저항하고, 진정으로 고려국민당의 이상을 이룰 힘을 지닌 사람에게로.
“조 장관 개인도 안 장관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고.”
“좋을 수는 없겠죠…….”
안세규가 아무리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고 해도, 그는 ‘젊은 세대’에 속했다.
함부로 ‘옛 세대’ 동지들을 숙청한 그가, 조유관의 마음에 들 리 없다.
게다가 안세규가 주석의 자리에 오른 것도 권력투쟁을 통해서였음을 생각해보면, 그 전부터 불만은 계속 쌓여 왔을 것이다.
“안 장관은 조 장관, 당시에는 서부군 사령관이었지. 어쨌든 그의 경질을 태사께 건의했던 것 같아. 하지만 태사께선 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을 그렇게 내칠 수는 없었지. 결국 ‘체면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안 장관이 내무장관으로 옮겨가고 조 장군이 외무장관이 되었는데……”
강태훈은 거기서 조금 망설였다. 김천열은 의아해했지만, 곧 강태훈이 당시 있었던 소름 끼치는 음모를 입에 담기 꺼렸다는 걸 깨달았다.
“조 장군을 열차 사고나 그 밖의 다른 수단으로 제거하려 했던 것 같아.”
“안 장관이 말입니까?”
“안 장관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모르지. 하지만 안 장관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고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러워.”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조유관을 감싸고 나선 세력이 있었다.
“그게 지금 감찰국장 주견하…….”
강태훈의 입에서 나온 소년…… 아니 청년의 이름은 김천열에게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주견하는 태사를 보호하려다 부상을 입어 의식불명이 된 소년이었다.
그 후로는 이단이 되어 산동 전선이나 삼한반도 게릴라 토벌전에서 활약.
어느새 태사의 연인이 되어, 감찰국장으로서 정계에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거물이 되었다.
그 이름은 사람들의 감탄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낸다.
불과 2년 만에.
주견하가 그저 소년에 불과했던 ‘짧은 마지막’을 기억하는 김천열에게, 이 모든 일들은 ‘변화무쌍’이라는 한 마디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조 장관과 감찰국 사이에 제휴가 있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 배후에는 태사부까지…….”
“그것까진 알 수 없네. 뭐, 태사 각하께선 그 후로 조 장관을 감싸기로 하신 건지 ‘안 장관을 견제’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계시지.”
자네가 여기로 돌아오고 대신 류성일 장관이 거기로 가지 않았나, 라고 강태훈은 덧붙였다.
“류 장관께서 카라코룸으로 가신 게 그럼……?”
“두 장관이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니까. 태사 각하께선 안 장관의 날개 하나를 꺾을 심산이셨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하면서 강태훈은 말을 돌렸다. 김천열이 그 일에 대해 뭔가 더 생각하지 못하도록.
“주권선, 이익선 운운의 배경에는 외무성만 있는 게 아닐세. 주견하 국장의 감찰국에서 뭔가를 하고 있어. 그 청년의 손은 지금 카라코룸에서 개봉과 응천까지 뻗치지 않은 곳이 없지.”
***
일본공화국에는 ‘선생’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정계에서는 오래전에 은퇴한 사람이다.
실질적으로 뭔가를 움직일 힘은 없는 노인.
그저 오늘처럼 이렇게, 텃밭을 돌보는 중에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을 맞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서로는 다이온, 동으로는 아즈텍.”
노인은 구부렸던 허리를 편다. 한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방문객을 보고 씩 웃는다.
“작은 텃밭도 이와 같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끊이질 않아.”
그러나 노인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한가한 마을 늙은이들도 아니고,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유지도 아니다.
중앙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자나 의원들이 와서 ‘선생’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다.
그 행위는 일종의 통과의례이기도 하고, 우국으로 마음으로 절실히 지혜를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선생님께서는 세계를 휩쓰는 불길이 이대로 잠잠해지실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아 잠잠해지고말고. 불도 태울 거 다 태우고 나면 잠잠해지지.”
“다 태우기 전에…… 이를테면 소방수가 와서 불을 끄는 건 어떻겠습니까?”
“왜, 일본이 그 소방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나?”
당나라의 백제 침략을 우리 일본이 물리쳤던가? 선생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묻곤 실실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지난 세계대전에서는 훌륭히 소방수의 역할을 해내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고려나 몽골, 아즈텍 같은 동맹들과 함께했기에 가능했지.”
그런데, 지금 우리의 동맹은 어떤가? 하고 선생은 되물었다.
“해상방위동맹이 있습니다.”
“류큐, 아이누, 다리다와 함께하는 동맹 말인가?”
껄껄, 선생은 웃었다.
“그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빌려줄 뿐, 군인은 다 우리 공화국에서 나오지 않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동맹국도 군인들을 내놓고는 있다. 모두 자국을 사랑하고 훈련도 잘되어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부족하다.
동맹으로서의 의지를 보인다는 것 말고는 큰 의미를 찾기 힘들겠지.
“혹시 이런 말을 할 생각인가. 베트남이나 에스파냐도 동맹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방문객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에스파냐는 너무 멀리 있네. 그들은 자기네와 국경을 접한 신성 제국 문제를 다루는 데 급급하지. 혹은 아프리카나 브라질 식민지 문제만으로도 급해서, 아시아 문제는 미처 신경도 쓰지 못할 걸세.”
“그래도 마카오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중요하고말고. 하지만 그 중요함이 한창 기세가 오른 다이온, 그 연방을 지휘하는 몽골이나 고려에 맞서 싸워가며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도시인가?”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약 다이온 연방이 보우슈엥마저 연방으로 끌어들이고 나서, 에스파냐에게 마카오를 내놓으라고 강력히 요구한다면…… 에스파냐는 그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베트남도 별반 다르지 않네. 몽골의 침공이 이번에도 실패할 거라는 보장은 있는가?”
혹은 베트남이 자기네 국토를 지키는 데 성공한다 해도, 다른 동맹의 위기를 도우러 올 여력은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라타나코신이나 베트남이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미 다이온과 바라트가 얼마만큼을 세력권으로 할지 정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먼.”
선생의 판단은 정확했다. 라타나코신과 베트남은 두 세력 중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중립국, 완충지대로 남겨둔다는 방침이다.
당연히 일본이 그들을 동맹에 끌어들이는 상황도 용인받긴 힘들 터.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선생님.”
“힘의 차이를 인정해야지. 우리는 약하네. 동맹의 선택 폭도 좁고. 어찌어찌 멀리 유럽에서 동맹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적극적인 의미’라고 보긴 어렵겠지. 우리가 침략을 당하면 상대국을 규탄 정도나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