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22)
원래 류성일은 처형된 시체를 시내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불복종의 대가’를 공포라는 형태로 주민들에게 심어줄 의도였다.
하지만 그건 ‘주견하의 방침’에 어긋난다.
괜히 ‘고려 놈들의 침략’이라는 인식을 확대하는 것보단, 부드러운 방식을 쓰는 게 낫겠지.
“몽골 사법부의 판단에 맡긴다.”
그러면 그들은 고려에 저항해서가 아니라 ‘몽골 법’을 어겼기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이 아니라 흉악한 범법자 집단에 불과하다는 뜻도 된다.
재판과 수감, 그리고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는 과정에서…… 저들에게 무기력증을 심어줄 수도 있다.
고려의 힘은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에, 딱히 무자비하게 처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뜻을 관철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셈이다.
그것만큼 저 ‘투사’들의 의지를 꺾는 일이 있으랴.
“카라코룸으로 압송하라.”
***
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는 조성되었다.
한족 관리 특구 문제를 회담에 올리고 나면, 나머지는 조율 과정이다.
외교적 수사가 늘 그러하듯, 독립 보장 선언이 무적의 방패가 되어주진 않는다.
이런 선언으로 강대국의 ‘병탄 의도’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약소국도 자기네 나라가 마냥 안전하리라 방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외교도 신용이다.
외교라는 전쟁터에서 권모술수가 ‘허용’된다는 것. 그것의 허용 범위를 ‘무제한’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자에겐 반드시 대가가 돌아온다.
외교가 일정 부분 도박성을 띠는 것은, 상대에 대해 일단 ‘신뢰해 보기로’ 하고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뢰를 이용해서 ‘편한 권모술수’를 부린다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힌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외교 창구가 막혀 버린다.
그간 휘둘러 온 권모술수도 상대의 신뢰에 기대는 저급한 사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을 짜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런 발상이 가능한 고급 인재들은 ‘제발 그런 외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다가 사라져갔기에 더더욱.
자신은 그런 머저리 같은 외교를 하는 자는 아니라고, 리안은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렇기에 눈앞의 인재들, 외무성에서 차출해 온 개봉회담 실무반 같은 엘리트들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일은 한족 관리 특구 안건을 올린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외무성 관료들. 그들은 이제부터 태사가 정한 방침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지, 어떤 부분을 다듬을 것인지 조언해야 한다.
그런 그들을 보며 리안은 싱긋 미소 지었다.
지금부터 듣게 될 재기 넘치는 조언과, 리안의 반론에 당황할 관료들의 얼굴에 대한 기대가 담긴 미소였다.
***
울제이는 고뇌한다.
고려 태사 미리안의 독립 보장 선언은 그만큼 미묘한 문제였다.
그 선언이 한족 관리 특구 건설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함임은 울제이도 안다. 그러나 그 선언의 원칙이 다이온 내부에도 적용된다고 할 때는, 고민할 게 많다.
당장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또 다른 조카, 바이다르가 미리안의 발언을 지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선언은 구성국 각각의 주권을 보장해 준다.
한편으로는 게레센제가 함부로 키타이를 병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에, 울제이의 지위나 영지를 지키는 데 유용한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을 보장받는 건 울제이뿐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울제이가 바이다르를 ‘보호’하고 낭키아스를 장악하는 것도, 게레센제를 물리치고 몽골의 카간이 되는 것도 가로막는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미리안은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합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그 부분은, 그녀가 일부러 만든 맹점일 것이다.
요컨대 ‘상대국 국민의 동의가 있다면’ 합병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
-루우 테무르가 칸발리크 시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듣기로 태사 미리안은 다이온이 하나의 통일된 체제가 되는 걸 반대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루우 테무르, 게레센제, 바이다르, 울제이 네 사람 중 하나가 다이온이라는 거대한 동군연합의 군주가 되어야 한다면, 미리안은 분명 루우 테무르를 고를 것이다.
-물론 나에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보르지긴의 혈통만을 근거로 카간 자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카간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면, 분명 기회는 있다.
게레센제가 실책을 연발해 그를 향한 몽골 국민의 지지가 무너질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울제이는 그들의 인기를 끌어모을 수도 있다.
몽골 내전 당시의 회수 대치나, 몽골의 남쪽 국경을 공격했던 건 ‘우국충정’으로 포장하면 그만이다. 그런 건 말을 갖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미리안의 독립 보장 선언에는 그 밖에도 다른 의도들이 있는 듯하지만, 일단 당장 울제이의 피부에 와 닿는 건 이런 것들이다.
그렇다면 몽골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루우 테무르의 사례를 뛰어넘는 ‘업적’이 필요하다.
한 번에 루우 테무르를 뛰어넘길 바랄 순 없고, 서서히 업적을 쌓아나가야겠지.
이를테면 눈앞에 놓인 한족 관리 특구 문제부터.
한족 반란과 그 후의 관리에서 활약한다면, 서서히 몽골 민중들 사이에 ‘나라의 미래는 역시 울제이에게 맡겨야 안정적……’이라는 생각을 퍼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울제이는 리안에게 찬성을 표하기로 한다.
그가 여기까지 사고하는 데에는 참모들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참모들의 조언에는 고려 외무성 관료들과의 실무 협의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역외사국의 대표단들은 지금 막 한족 관리 특구 설치를 제안하고 연단을 내려오는 미리안을 바라본다. 그 눈길이 혼란과 불안으로 흔들린다.
대충 다이온 연방군이 와서 한족 반란군을 쓸어 버리고, 나가주길 바랐던 것 같은데…… 그렇게 뻔뻔한 희망을 품어선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단지 국제무대에서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그렇게 뻔뻔하기는 쉽지 않은데.
어쨌든 미리안은 “이는 영구적인 영토 할양이 아닙니다. 설치 대상이 될 국가들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만 유지될 임시기구입니다.”라고 못 박았다.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역외사국 대표단의 뇌를 꽉 채운 듯하다.
신뢰한다 치더라도, 역외사국이 이후 그 영토들을 다시 직접 통치하려면 다이온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미리안은 이 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그들에게 ‘개혁’을 주문해 왔다.
즉 한족 다수 거주 지역을 식민지로 계속 거느리고 싶다면, 근대적으로 인구를 파악하고, 군대를 징집 및 조직하고, 교육과 의료 정책을 펼치는 등의 노력을 하라는 것이다.
키타이와 낭키아스에서도 한족의 해체 및 몽골화의 수단으로 실행하고 있는 정책들이다. 어려울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역외사국의 체제는…… 과연 개혁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다. 아니, 개혁의 의지나 발상 자체를 떠올리기 어려운 구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왕실이나 귀족이 당연한 듯이 국가의 부 대부분을 빨아들이는 나라는, 개혁을 시도할 여력 자체가 없다.
그렇기에 일단 개혁에 착수하려면, 왕과 귀족들이 주머니를 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왕국들은 자신들의 체제와 왕실, 귀족이 이미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밀착되어 있어, 개혁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격변이 이들을 몰락시킬 가능성이 있다.
역외사국의 대표들은 그런 문제를 걱정하는 듯하다.
지원을 받으려면 개혁 의지를 보여야 하고, 개혁 의지가 없다면 다음에는 다이온 측에서 굳은 얼굴로 무슨 말을 꺼낼지 모른다.
-그러니 개혁 과정에선 ‘부드러운 양보’가 필요한 법이지.
신분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하고, 의회 수준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주민들의 뜻을 모을 기구를 설치하거나 장려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행정 관료를 발탁한다.
-이마저도 못하겠다면, 그냥 합병당하는 편이 낫지.
그들의 한심함에 하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울제이는 간신히 참았다.
대신 심드렁한 어조로 역외사국 대표단을 향해 말했다.
“……바라트가 동쪽으로 혁명을 수출하기 시작한 문제도 여기서 논의할 것 아니었습니까? 혁명의 방어를 위해선 다이온과의 연대가 꼭 필요할 겁니다.”
그런 짧은 지적만으로도, 역외사국 대표단은 분주해진다.
마치 방금 먹이가 뿌려진, 연못 속의 붕어들처럼.
***
“역외사국이 서로 연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죠.”
볼로드와 미리안, 울제이와 바이다르, 이렇게 네 사람이 모인 작은 회담. 리안은 다른 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며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즉, 여기는 역외사국 대표단을 제외하고 다이온 구성국 대표들끼리 모인 자리다.
티베트에서 보우슈엥에 이르는 그 나라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다이온과는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한족 반란군을 처리하는 것.
“그걸 떠올릴 수 있고, 또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면 애초에 여기에 오질 않았겠지만요.”
“여기에 온 시점에서 이미 다이온의 우산 아래 들어올 각오는 했을 겁니다.”
리안의 말에 맞장구치듯, 볼로드가 덧붙였다.
“대예와 보우슈엥은 확실히 다이온 연방 가입을 원하는 눈치더군요. 바라트의 위협이 있으니까요. 티베트는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큼 바라트를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진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중립국 쪽을 더 희망하는 것 같고…….”
바라트와 마찰을 피하고 싶은 건 여기 모인 다이온 대표들도 마찬가지다. 티베트는 ‘다이온과 좀 더 가까운’ 중립국이 되어서, 바라트와 다이온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맡아줬으면 한다.
“탕구트의 입장은 어떤지 궁금하군요.”
울제이가 묻자 이번엔 리안이 답했다.
“반반인 것 같던데요. 다이온에 참여하고 싶기도 하지만, 카간의 제후가 되기엔 좀 그렇다. 그러니 티베트처럼 중립국으로 남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것 아닐지.”
“어쨌든 요점은 4국의 입장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 연대는 불가능하다.
한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각각이 다이온과 협의해야 하고, 결국 다이온에 주도권을 넘길 수밖에 없겠지.
“우리야 역외사국이 다이온의 영향권 바깥으로 아예 나가 버리지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입니다.”
이번 개봉회담의 최대 성과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외사국의 개혁을 ‘지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그거야 거듭된 2차, 3차 개봉회담을 통해 조율해 나가면 될 것이다.
리안은 겉으로는 서로의 고생을 격려하는 듯한 미소를 보였지만, 한 꺼풀 아래에는 그녀 자신의 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간다는 만족감이 숨겨져 있었다.
「대타협 계획」.
외부의 위협,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다이온 구성국들은 나름의 점진적 개혁을 거칠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한 개혁의 결과로 다이온이라는 큰 틀 안에서 ‘공존’의 기초가 만들어지겠지.
그런 리안의 생각을 다른 세 사람이 알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