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21)
그날 밤…… 집요하게 미리안을 추격해 암살자를 보낸 사람은 바로 류성일이다.
이 늙은 음모꾼은 그걸 허동주에게 뒤집어씌운 뒤,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할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암살자들이 역으로 당하고, 미리안이 자신의 총장실에 나타나자 급하게 계획을 바꿨다.
미리안과 협력해 허동주를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의 요인이 되기로.
그렇게 한동안 법무장관으로 앉아있나 싶더니, 갑자기 태사는 류성일을 카라코룸으로 보냈다.
이런 상황 변화 속에서 류성일은, 이번엔 ‘어떤 계획 변경’을 감행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주견하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만났는데, 아무런 잡음이 없다는 것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 류성일은 주견하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고, 주견하는 류성일의 추잡한 측면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저 방문한 김에 서로 ‘안부’나 확인하는, 그런 형식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쪽은 진실을 알고 다른 쪽은 모른다.
이 상태가 유지되는 건, ‘아는 쪽’에서 상대방이 계속 모르게 하기 위한 ‘수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류성일이, 주견하를 통해서 뭔가 꾸민다?”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동명의 정계로 복귀하는 것이 류성일이 가장 바라는 바겠지.
그리고 요즘…… 주견하의 류성일 방문을 전후하여, 발밑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태사의 또 다른 측근, 배영훈 중령이 거슬리는 움직임이 그 위화감 중 하나다.
누군가 자신의 발밑에 땅굴을 뚫는 듯한 이 감각.
단적으로 말하자면, 함정이다.
세규를 확실히 고꾸라뜨릴 작정으로 설치되고 있는 함정.
“류성일은 동맹을 배신했든지, 아니면 배신할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겠지.”
나를 제물 삼아 정계로 복귀할 셈인가!
그저 가만히만 있는다면, 세규는 류성일에게 뭔가 보복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럴 순 없다.
적어도 경고를 보내야 한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으며, 당신이 나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 역시 당신을 끝장낼 모든 것을 터트리고 함께 죽겠다, 고.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행스럽게도 아직 류성일은 ‘배신’이라고 할만한 단계엔 이르지 않은 듯하다. 만약 그랬다면 태사가 사냥개를 풀진 않았겠지. 그건 ‘냄새’만 날 뿐 아직 확신을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냄새’를 류성일이 풀었을 가능성은 크다.
세규는, 류성일을 완전히 신뢰하진 않는다.
그가 세계대전 직후에 미리안의 백부, 미승휴에게 민국 정부를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민국 사람이 아니다.
그에겐 빠르게 정권을 안정시키며 허동주를 견제할 어떤 장치가 필요했을 뿐.
류성일이 제1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민국 정부 계열 학생들을 구했다는 것도 안다. 거기엔 교육자로서의 양심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규는 류성일의 그 행동이 미래에 자신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인재를 육성하는 과정이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의 경력은 의심의 눈을 거두기엔 충분치 않았다.
의심을 계속한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류성일, 주견하, 미리안…… 세 방향에서의 포위를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혹은 포위망 중 최소한 하나를 어떻게 무력화해야 하는가.
당연히 떠오르는 주안점도 세 가지다.
류성일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최대한 신속하게 파악해낸다. 만약 류성일의 배신이 확실해졌을 때를 위한 대응, 혹은 보복 방안을 준비한다.
아마 태사는 배영훈에게 내린 명령을 한동안 거둬들이지 않겠지. 배영훈은 아까 ‘그림자’에게 명령했던 대로 견제만 한다. 냄새를 완전히 감출 순 없겠지만, ‘들키지 말아야 할 것들’은 확실히 감출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연기하는 건 세규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주견하.
이 자의 움직임은 지금까지는 통제 불가라 판단해 왔다.
뭘 목표로 하는지는 알겠는데 수단을 어떻게 구사하는지 모르겠다.
얼핏 보면 강자들 사이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듯하다. 혼란기, 어린 통치자의 어지러운 정치 속에서 탄생하는 기생충들의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막상 대면해보면 절대로 만만치 않은 자다.
“‘만만치 않다’는 올바른 판단이 서면, 거기서 대책도 떠오르는 법이지.”
자세를 다소 낮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너무……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다 해도 안세규는 ‘황제가 카간까지 겸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던가.
이 시점에서는 한발 물러서는 게 좋다.
마침 태사는 개봉에 있고, 주견하와 자신은 여기 동명에 있다.
대화의 물꼬를 터 볼 수는 있겠지.
그러나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도 있다.
균형의 문제다.
류성일의 ‘배신 가능성’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류성일과 반목하다가 어리석은 공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류성일과 세규 모두 태사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자들이다.
그런 자들끼리 서로의 약점을 폭로하고 세력을 소모한다? 누군가는 아주 기쁜 얼굴로 그 둘 모두를 때려잡을 기회가 왔음을 환영할 것이다.
태사든, 황제든, 주견하든.
류성일과의 다툼이 그 세 사람의 권력만 어마어마하게 확대되는 결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말이다.
“동맹의 복구 가능성 또한 열어둬야 한다.”
지금으로선 다른 동맹을 구하기도 어렵고.
자, 하며 세규는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만나러 갈 사람을 고른다.
“최근에는 알현이 뜸했지.”
주견하가 아니라, 황제를 먼저 만나자.
정면에서 부딪치는 게 아니라 주변부터 파고 들어간다.
주견하와 대면하기 전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
류성일이 쓸 수 있는 병력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합지졸인 반란군 잔당에 비하면 충분한 정예였다.
장비, 휴식, 사기 면에서 적을 압도하고 있다.
류성일은 천천히, 확실하게 카라코룸 주변을 청소해 나갔다. 어쨌든 주견하와 협의가 이루어진 이상, 성실히 이행은 해야 했으니까.
류성일은 딱히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나 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진 않다.
그저 그런 방식을 도입하는 게 향후 고려 제국의 안정에 도움이 되리라 내다보았을 뿐이다. 신성 제국이나 브리튼, 로마의 체제가 그러한 것처럼…….
그러나 여기엔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있다.
바로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황실과, 황제다.
미승휴가 방계 황족을 은밀히 제거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을 때, 류성일의 마음은 미승휴를 완전히 떠났다.
완전히 떠난 정도가 아니라 점점 증오를 키워다.
류성일은 자신이 제2 제국의 충의지사라 믿었으니까.
진심이었든, 자기합리화였든.
증오는 마침내 ‘미승휴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허동주도 그 결론에 동의했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희망이 자신만의 망상이어서 문제지.
“순진한 인간.”
아마 세상에서 허동주를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류성일이 유일하지 않을까.
허동주는 이런 구상을 했다.
본질은 귀족 군사독재이긴 해도, 미승휴를 통령으로 삼아 껍데기나마 공화국인 체제를 만들면 된다고.
또는 미승휴 본인이 황제가 되어 새로운 황실을 창건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여 제3 제국 초기의 모호한 정체성도, 미승휴의 황족 제거도 모조리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새 황실 창건을 위한 구 황실 숙청이라는 식으로 보면 되니까.
하지만 류성일은 허동주가 미적거리는 걸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미승휴가 안 되면 미리안이라도…… 라는 아집을 참아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먼저 손을 썼다.
암살이 실패했음을 알았을 때, 류성일은 총장실 소파에 혼자 누워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미리안이 자신에게 의지하려고 찾아왔을 때, 류성일은 기적 같은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다시 한번 ‘허동주보다 먼저’ 움직였다.
“나는 그렇게 미승휴와 허동주를 치워 버리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류성일에게 있어 안세규란, 결국 미승휴나 허동주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안세규가 동맹으로 삼기에 아주 적절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을 뿐.
안세규와 고려민국 임시정부는 바로…… ‘황제’를 데리고 있었다.
류성일의 제국 구상에서 필요한 요소.
새로운 황실을 창건할 자.
“슬슬…… 그 필요도 다 하고 있지.”
황제는 이제 안세규나 고려국민당의 것이 아니다.
황제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고, 제국은 류성일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까지 뻗어 나간다.
“다른 실질적인 도움도 못 돼.”
자신이 카라코룸으로 쫓겨 오는 동안 안세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의견 충돌이 일어났을 때, ‘태사 암살 시도’를 걸고넘어지는 것도 류성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어차피 그쪽도 한 짓이 있으니 폭로는 못 하겠지만…… 동맹으로서의 쓸모는 다했다고 스스로 드러낸 꼴이지.”
그러니 다른 동맹을 찾아봐야지.
태사의 계획에 적극 협력해 살아남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류성일은 조금 다른 방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는 안세규나 태사를 통해 황제와 접촉하는 게 아니라, 직접 황제와 뜻을 나누리라.
황제 왕서라의 원대한 야망에 빌붙는 꼴이 되겠지만, 비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늘 구부리고, 피하고 기회를 엿보며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다소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제와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주견하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행정장관 각하, 생포한 비적들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어느새 교전이 끝난 모양이다.
오늘 토벌전은 고려군에겐 일종의 ‘연습’이었지만, 자유공화국의 잔당들에겐 악몽 같은 학살극이었을 테지.
포격까진 필요 없었다. 소총과 기관총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
눈앞의 장교가 ‘비적’이라 말하는 것도 딱히 무리가 아니다.
류성일도 가볍게 둘러보는 느낌으로 이 토벌전을 앉아서 지켜보았고.
장교들은 부하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얼굴 그대로, 군의 원로이자 카라코룸의 최고 권력자인 류성일의 치하를 기다린다.
손을 들어 가볍게 치하의 말을 던진 뒤, 류성일은 일어서서 장교의 어깨너머를 바라본다.
저 멀리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인간 무리가 무릎 꿇려져 있다.
“항복한 자들이 있나…….”
도저히 이쪽하고는 타협할 수 없는 사람들일 텐데, 차라리 자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그들도 류성일처럼 훗날의 기회를 엿보는 걸지도 모른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이라 되뇌면서.
물론 목숨이 아까워서 항복한 자들도 있겠지만, 저 중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살려두면 위험하다.
“즉시……”
처형하라고 말하려다 말고, 류성일은 멈추라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