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20)
제국정보사령부는 집요한 집단이다.
그 점이 세규가 그들을 무섭게 여기는 이유다.
고려민국 임시정부 때 질리도록 겪어보지 않았던가.
물론 고려민국 임시정부, 그 산하 대학생 조직들이 주로 싸운 대상은 야별초였다.
하지만 야별초의 최후가 증명하듯, 무력을 갖추고 정말 죽일 기세로 덤비면 물리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야별초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공작원의 죽음’ 중 상당수가 고려민국 임시정부와의 싸움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학생운동 조직에 잠입한 첩자를 색출해 본보기로 매달아 버린다든가, 학생 체포에 대한 보복으로 공작원 하나를 무작위로 추적, 처리해 버린다든가.
그렇기에 야별초와 고려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선 종종 의도치 않은 소강 국면이 이루어지곤 했다.
“때로는 그런 개싸움을 못 하게 된 게 아쉽기도 합니다.”
내무장관 안세규의 집무실 안, 그늘진 구석에 앉은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지금 앉은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그림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내다. 다들 그렇게 불렀다. 그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에서든 고려국민당에서든 어떠한 요직도 바라지 않았고, 두 정부가 합작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야심 없이 묵묵히 당과 민국의 이상을 위해 헌신하는 자처럼 비쳤지만, 세규는 그 남자에게 절대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남자는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즐기는 자다.
민국 정부의 적을 잡아 죽이는 데에서 진심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다.
“배영훈인지 뭔지 하는 군인을 죽이지도 않고, 협박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그저 미행만 하라니. 예전 같으면 그런 뜨뜻미지근한 명령은 생각도 못 했을 텐데 말이죠.”
“시대가 바뀌었네.”
자르듯 말했다. 반발을 사더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 한마디에 세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들어 있었다.
태사나 정부 요인의 암살을 사주하여, 정국의 격변을 꾀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안정을 우선해야 했다.
더 이상의 격변은 안 된다. 이 점은 태사 미리안도, 내무장관 안세규도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애초에 암살이나 테러는 민국 정부가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기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취한 방법들이었고.
새로운 정부라는 ‘하나의 배’를 탄 처지에서, 배를 뒤흔드는 행위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정권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넘겨받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제는 권모술수도 정도를 지켜가면서 해야 하는 시대야.”
다른 정파들이 ‘참아줄 수 있는 선’을 지켜야 한다.
‘다소 과격하다곤 해도 그것도 정치’라고 끄덕일 수 있는 선은 흐릿하지만, 넘어서면 너무나도 분명한 보복이 들어온다.
정파를 초월한 동맹들 속에서 두들겨 맞고 싶지 않다면 더더욱 지켜야겠지.
게다가 세규에겐 배영훈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다.
배영훈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태사는 그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다.
역시 안정성 문제 때문에 당장 이 연립정권을 깨 버리진 않는다고 해도, 리안은 단 한 번도 선전포고한 적을 용서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안세규를 향한 제거 공작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할 게 뻔하다.
태사는 황제를 제외하면 제국의 모든 명분과 합법성 최상층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림자는 ‘쯧’하고 혀를 한 번 찼다. 세규는 그런 그의 행동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야별초는 사라졌네. 그 교훈을 잊어선 안 되겠지.”
“하지만 제국정보사령부는 그대로지 않습니까.”
차분하게, 지적하듯 말하는 ‘그림자’.
그의 말대로였다.
제국정보사령부, 혹은 정보부라 불리는 자들은 이전 시대의 과격함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야별초와는 대조적으로, 정보부는 군대다.
그늘 속에서 일하는 야별초와 달리, 정보부는 수틀리면 무장한 병사들을 데려올 수도 있다.
숙군의 칼날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지금은 기세가 죽었을지 몰라도, 태도 자체를 바꾼 건 아니다.
세규도 그 점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때는, 예전처럼 대처하길 망설이지 말아야겠지.”
‘그림자’를 비롯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쓸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민국 정부의 요인들도 새로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당장 세규부터가 ‘내무장관’이지 않은가.
합법적 수단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경찰을 동원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태사’로부터 인정받은 내무장관, 제국의 주요 기관인 ‘내무성’이 ‘군인’인 제국정보사령부와 대립한다면, 상대방에게 ‘군사 반란’이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도 가능하다.
명분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미리안은 활짝 웃으며 기꺼이 제국정보사령부의 ‘2차 숙군’ 작업에 들어가겠지. 군을 철저히 태사에게 복종하는 집단으로 개조하는 건 그녀의 주요 정책 중 하나다.
“그 점들을 잘 알고 있는지, 정보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군요.”
그림자는 그렇게 말한다. 그의 말대로, 제국정보사령부가 막강한 아무리 정보력을 지녔어도 내무성과 전쟁을 벌이는 부담을 감수하진 않을 것이다.
“태사가 이런 일에 정보부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 탓도 있을까.”
“저는 그런 의도까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지금은 개봉회담의 진행, 황제의 카간 즉위 관련 공작들에만 매달리고 있죠.”
제국정보사령부가 주력하는 사업들.
‘그림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듣자마자, 세규는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찰국장 주견하.
태사의 측근이며, 동시에 황제의 친구…… 아니 이제는 그쪽에서도 확실히 ‘측근’이라 불릴 사람이다.
그는 루우의 두뇌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
한때는 루우의 곁에서 그녀의 폭주를 저지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의 나이, 총명함을 근거로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루우를 부추기는 듯하다. 아니, 한발 앞서 나가 일을 진행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이온’이라는 하나의 강대국, 하나의 황제와 하나의 태사를 중심으로 한 절대권력 체제를 만들려는 듯 보인다.
“고태용이가 혼자 움직였을 리 없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견하와 고태용이 접촉했다고.”
단순히 접촉한 정도가 아니다.
제국정보사령부가 상경시에서 아나키스트 조직원들을 체포하는 데 감찰국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정보부의 능력이라면 그런 허섭스레기들 잡는 데 감찰국 힘까지 빌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체포 작전은 어디까지나 정보부와 감찰국, 두 집단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의례였겠군.”
“손발 맞춰서 일해볼 만 한지도 시험해볼 겸.”
“그리고 고태용도 주견하도 꽤 만족했다…….”
“상경에서도, 동명으로 돌아와서도 술자리를 가졌죠.”
“단순한 술자리는 절대 아니었을 거야.”
무슨 말이 오갔는지까지는 캐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후 정보부가 보이는 행보를 통해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둘 사이에 거래가 있었군.”
“고태용이가 새파랗게 어린 주견하 말대로 움직여 줄 인간은 아니니까요.”
무슨 거래일까. 주견하가 부탁한 것은 아마도 지금 정보부가 추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 주견하는 무엇을 대가로 내놓았지?
“대원철도주식회사를 둘러싸고 정보부의 돈이 오가는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지분 요구인가.”
“배당금을 넉넉히 받을 사업이라는 계산이 아닐까요.”
그림자의 말대로, 권력 투쟁은 하나의 사업이다. 권력은 보통 무형의 영향력이지만, 영토나 자본 같은 부산물이 따라오기도 하니까.
혹은 그 부산물이 권력을 낳기도 한다. 참으로 생산성 좋은 산업이 아닐 수 없다.
“원철…… 그러면 철도성도 여기에 끼어 있나.”
“직접 철도성과 거래하기보다는 주견하를 징검다리 삼은 모양입니다.”
주견하의 영향력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괴물이라고 생각은 해 왔지만, 이렇게까지 쑥쑥 자랄 줄이야.”
“괴물이라는 그 판단이 주견하를 키워온 건 아닐지.”
비웃는 듯한 그림자의 말에 세규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킬킬댔다.
“태사가 제동을 걸긴 한 모양이더군.”
“시간이 났으니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사의 제동이 ‘우리가 주견하를 쳐도 묵인할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돼.”
세규는 나무라듯 말하고 침묵에 잠겼다.
평범했던 소년.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태사와 함께 시대의 격변 속에 쓸려갔을 무고한 생명 중 하나.
세규는 필요한 희생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이상이냐 이 위선자야! 라고 비난 받아도, 세규는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희생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칼을 꽂을 인간이 안세규였다.
그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동지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체를 밟으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에 사내애 하나쯤 더한들!
-이제는 ‘사내애 하나’가 아니게 되었지만.
죽었어야 했을 태사를 살려냈고, 류성일의 손아귀에서도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는 이런 식으로 발전하는 법인가.
주견하는 참으로 교묘한 위치에 숨었다. 사냥당하지 않으면서 사냥할 수 있는 그런 요지에.
태사, 철도성, 제국정보사령부…… 이뿐만이 아니다.
감찰국장의 배후에는 황제가 있다.
주견하를 뒤흔들려면 태사와 황제를 모두 뒤흔들든지…… 아니면…….
“답답하군.”
시간 낭비라는 듯 그림자는 일어섰다.
“시킬 일 없으면 가지요.”
“배영훈과 태사부의 동향만 이대로 계속 감시해 주게.”
“그런 미적지근한 명령은 아니 내리느니만 못한데…….”
불평하듯 말하고 그림자는 자리를 떠났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일은 확실히 처리해 줄 것이다. 자기 목숨이 위험하지만 않다면.
그림자의 갑작스러운 말 때문에 끊긴 생각을, 세규는 다시 이어나갔다.
‘아니면’, 무슨 생각을 떠올리려 했을까.
……주견하를 고립시키든지, 였던가.
그럼 도대체 어떻게 주견하를 고립시킬 것인가.
잠깐 고민하던 끝에, 세규의 생각은 얼마 전에 받았던 한 보고에 가 닿았다.
세규는 고려민국 임시정부 주석일 때부터 나름의 정보망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다.
정보망은 이제 ‘내무성’의 이름 아래 좀 더 대담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정보망은 주견하 쪽에 한 가닥 실을 뻗어 두었다. 또 어떤 가닥은 류성일에게도 뻗어 있다.
그 실에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왔었다.
주견하가 철도장관 임병욱과 함께, 카라코룸을 방문.
거기 행정장관으로 나가 있는 류성일과 접촉했다고.
“류성일…….”
이름을 되뇐다.
주견하와 임병욱, 류성일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까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 역시, 이후 드러나는 그자들의 언행을 통해 유추하는 수밖에.
그러나 그 전에 몇 가지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류성일은, 주견하의 부모님 살해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