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9)
리안은 그런 울제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몇 시간이고 이 침묵을 견딜 수 있다는 듯한 태도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미 군정을 펼치고 있는 부대들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여기 개봉에서 보고 들은 역외사국 지도층의 인식 실태를 종합해보면, 일단 한족 관리 특구는 필요하다.
그 영토의 주인들에게는 도저히 일을 맡겨둘 수 없으니까. 새로운 한족 반란의 불씨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따라서 리안은 앞으로 있을 회담 자리에서 한족 관리 특구를 발의해야 한다.
그런데 다이온의 주도 세력이자, 반란 진압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고려가 그런 의견까지 내놓으면 ‘독선적’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리안은 독선적일 필요가 있을 땐 서슴없이 독선적인 짓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최대한 주변국에 ‘우호적인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키타이가 ‘한족 관리 특구’ 방안을 지지해준다면, ‘독선적’이라는 인상은 조금이나마 희석되겠지.
이런 식으로 볼로드의 지지까지 끌어낼 수 있다면 더욱 좋고.
“특구의 행정장관은 키타이에서 파견해도 되겠소?”
“고려는 파견군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파견군 사령관인 장해진 대장과 잘 협력할 수 있는 인물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마치 한발 물러서는 듯한 리안의 말.
그 말이 관중 분지라는 매혹적인 미끼를 울제이의 눈앞에서 흔든다.
“……인선에 신중을 기하겠소.”
그것으로 영 우호적이지 못한 칸과 태사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리안이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울제이는 질문을 던진다.
“한족 관리 특구는 관중 분지에만 만들 생각은 아니지 않소?”
“피차 솔직해지기로 했으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관중 분지에 건설할 특구를 ‘화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남쪽으로 파촉 특구. 동쪽으로 형초 특구.
주견하가 고태용과 세운 계획에서 ‘총독부’만 ‘특구’로 바꾼 이름들이다.
그 배치, 그러한 계획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것, 키타이와 낭키아스에 고려의 파견군이 나와 있는 현 상황.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의도는 자연스레 읽힌다.
“……고려가 주도하는 평화. 태사께서 원하시는 건 바로 그게 아니오?”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 울제이는 농담이라도 던지듯 라틴어를 읊조린다.
고개를 갸웃하며 리안은 웃었다.
“글쎄요. 저는 오히려 키타이를 비롯한 다이온 회원국들이 ‘고려가 주도하는 다이온 체제’를 견제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만?”
***
그렇게 울제이와 협의를 끝내고 나온 리안은, 자신이 머무는 전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울제이와 만났던 장소와 자신의 숙소 중간쯤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황자 바이다르.
아니, 지금은 낭키아스의 어린 칸 바이다르라고 해야겠지.
개봉회담 참가자들의 다소 불편한 심기와 웬만해선 마주치지 않도록 조정된 동선을 생각하면, 바이다르와 여기서 마주친 건 우연이 아니다.
바이다르가 리안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쪽으로 온 것이다.
“호오.”
리안은 자신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어린 칸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까.
게레센제의 의도가 작용했을까?
낭키아스 관료들의 권유인가?
아니면 소년이 홀로 떠올린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일까.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소년 바이다르는 그 나이에 맞는 유치함을 보여줄 것인가.
혹은 그도 루우나 자신처럼, 나이를 뛰어넘는 총명함을 보여줄 것인가.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리안은 바이다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예를 표한다. 거의 동시에 바이다르도 예를 표했다.
“어쩐 일이신지요, 칸?”
뭔가를 말할 듯 말듯, 망설임으로 달싹이는 소년의 입술을 바라보며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
“그 어떤 나라라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통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려의 태사가 발언 순서가 되자마자 내뱉은 말에, 회담장의 모두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의아함을 드러냈다.
눈살을 찌푸리는 자도 있고, 목을 긁는 자도 있다. 펜을 손 위에서 계속 돌리거나 옷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자도 있고.
그 모든 감정 표현에는 하나의 의미만 담겼다.
대체 저 이야기를 왜 하는 건가.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는 괴짜 정치인이 장광설을 펼치듯, 리안은 자기 할 말만 이어나갔다.
“누구도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의해서든, 대의명분에 의해서든 상대국의 동의를 강요할 수도 없고 병탄할 수도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이온 구성국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볼로드는 눈살을 찌푸린 자들 중 하나였다.
고려 태사 미리안의 저 말은 두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몽골 중심’의 다이온 통합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몽골이 키타이를 병합하는 것도, 낭키아스를 병합하는 것도 두고 보진 않겠다는 말이다.
동시에 이는, 고려도 몽골이나 키타이, 낭키아스를 병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구성국의 주권을 유지하는 느슨한 연맹체.
그런 의도를, 리안은 처음으로 국제무대에서 드러낸 것이다.
볼로드는 슬쩍 키타이 칸의 눈치를 살핀다.
왜냐하면 저 선언은 키타이가 다이온 연방에 완전히 병합되는 걸 막아줄 테니까.
하지만 울제이는 찬성도 반대도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연설 중인 미리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긴, 그렇군…….”
볼로드는 냉소했다.
“저건 울제이 쪽에서 카간 자리를 넘보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이니…….”
볼로드는 다시 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얼마나 많은 나라의 호응을 얻는지 지켜나 보도록 할까.
또는 공허한 외침이 될지.
“이러한 원칙은 비단 다이온 내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다이온 외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온은 합쳐진 국토와 국민의 힘으로 주변국을 함부로 병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감탄이 나오긴 한다. 저 나이, 저 체구의 여자가 내놓을 수 있는 박력이 아니다.
“다이온의 문은 여기서 평화의 의지를 보여 준 모든 국가들에게 열려 있습니다만, 연방의 가입은 어디까지나 가입을 원하는 국가 국민의 총의로 결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고려 제국에서 만방에 밝히는 ‘독립 보장’입니다.”
평화를 위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저것만큼 좋은 말이 또 있을까. 볼로드는 제법이라 생각하며 끄덕였다.
다른 나라들이 속으로 저것을 위선이라 생각할지라도, 어쨌든 겉으로 ‘평화’를 말하는 국가를 대놓고 비난할 순 없다.
그리고 저 ‘국민의 총의’라는 메시지.
국민의 뜻을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라고 각국에 보내는 메시지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혁 촉구.
리안의 발언이 끝난 직후 약간의 틈이 생겼다.
누가 어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리안과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발언 기회를 얻었다.
낭키아스 칸, 바이다르였다.
“우리 낭키아스 역시 고려에서 제시한 원칙에 적극 동의를 보냅니다. 다이온의 모든 구성국, 다이온의 이웃들 모두의 주권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낭키아스도 독립 보장의 혜택을 받듯, 이웃들에게 독립 보장의 혜택을 베풀 것입니다.”
이것은…… 대체 무슨 일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마치 준비해 두었다는 듯 어린 소년이 말하고 있다. 그 지위 때문에 등 떠밀려 왔을 뿐, 영향력 있는 발언은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미리안, 무슨 수작을 부린 건가!
경악이 회담장을 휩쓴다. 특히 울제이의 얼굴이 아주 볼만했다. 하지만 볼로드는 그런 반응들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당장 리안의 말에 반발하진 못하더라도 다소 결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하지만 바이다르가 동의를 표한 이상 그러기가 어렵다.
명분은 미리안과 고려 쪽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의 제기는 ‘몽골은 주변국을 병탄할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겠다’는 식으로 비칠 것이다.
그리고 바이다르…… 미리안의 말에 넘어간 걸지도 모르지만, 혹은 미리안 뒤에 있는 고려 황제 루우 테무르의 입김이 작용한 걸지도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카간이 바이다르 칸에게 어떤 의사를 전달했다면?
고려의 이 독립 보장, 그에 동조하는 낭키아스. 이 상황이 게레센제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면?
그럴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게레센제에게 바이다르는 하나의 보험이고, 따라서 바이다르와 그를 옹위하는 관료 무리가 ‘낭키아스의 독립성’을 보장받으려 했다면?
무엇보다도 이 회담은 기자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이것이 볼로드의 행보를 봉쇄한다.
기자들은 리안의 말을 통역해서 듣자마자 종이가 찢어질 기세로 휘갈겨 적기 바쁘다.
새롭게 탄생한 연방, 내전을 이겨낸 정권, 대공황을 극복해가는 나라들…… 바로 거기서 나온 평화의 메시지.
누가 찬물을 끼얹을 수 있으랴.
볼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
안세규 앞에는 짤막한 보고서가 놓였다.
태사 미리안의 또 다른 측근, 배영훈 중령에 대한 보고서다.
주견하처럼 권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감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듯하다.
“이렇게 ‘충직함’만을 드러내고 사는 것도, 오래 살아남는 한 방법이지.”
타고난 건지 계산인지, 아니면 리안이 그렇게 인간을 길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배영훈 중령은 이런 시대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리안을 위한 새로운 일을 맡았다.
첩보는 그 이상 깊이 들어가진 못한다.
배영훈은 충직함과 동시에 민첩한 두뇌도 갖추고 있어서, 미행을 쉽게 눈치챘다고 한다.
미행을 따돌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유인 시도를 했다.
“……꼼짝없이 양면 전선이군.”
압박은 태사 쪽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감찰국장 주견하 쪽에서도 온다.
감찰국 직원들이 정면에서 내무성이나 고려국민당을 건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며 신경을 건든다.
아직까지 충돌은 전혀 없지만, 저쪽에서 ‘도발에 대응할 준비’를 해둔 듯한 인상은 받고 있다.
예를 들어 고려국민당 산하 학생운동 조직이, 감찰국 산하 학생운동 조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폭력을 행사…… 그러면 감찰국은 기다렸다는 듯 상대를 박살 내고 줄기를 타고 올라와 고려국민당 코앞까지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각 학생조직에 단단히 주의를 시키긴 했지만, 그 팽팽한 긴장을 대학생들이 과연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제국정보사령부 쪽에서 이쪽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