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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326화 (326/541)

개봉회담(18)

전통과 개혁의 대립, 그사이에서의 세심한 조율…… 시간만 충분하다면야 어떤 나라인들 근대화하지 못하랴.

그러나 세계는 변명을 들어주지도 않고, 유예도 해주지 않는다.

“당장 한족 반란만 좀 어떻게 해주고,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지금 파견군들 보급도 제대로 못 하는 것들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건가?”

이대로는 안 된다, 앞으로 똑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할 뭔가가 필요하다, 이런 생각은 못 떠올리는 걸까.

못하겠다면 다이온에서 도움을 좀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효윤이 말했던 대로 내정간섭을 걱정해서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외부 세력이 주도하는 개혁을 통해 자기네 이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서겠지.

한심함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수행원 중 하나가 효윤 곁으로 다가온다. 효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 말을, 다시 효윤이 리안의 옆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장해진, 우흥섭 두 장군의 준비가 끝났답니다.”

리안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두 장군이 대기하는 방으로 향했다.

리안이 방으로 들어서자 두 장군은 군기가 바짝 든 경례를 올린다.

-참 대조적인 모습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리안은 경례를 받아준 후, 장군들이 준비를 마친 탁자 위로 눈길을 돌렸다.

역외사국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족 반란 토벌전. 그 전황도였다.

***

고려군 장교 하나. 티베트 장교 하나. 양측 병사 몇 명. 통역을 맡은 마을 학교 선생까지 한 무리를 이루어 마을을 돈다.

이곳은 파촉, 또는 촉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땅.

지금은 티베트의 영토였다.

최근까지 한족 반란군의 점령 아래 있던 곳이라, 군인들이 이렇게 마을을 돌며 피해 상황을 조사 중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반란군의 강제 징발로 입은 피해들, 제대로 기록해 둬.”

“알겠습니다.”

반란군이 실상은 동포들의 해방자가 아니라 약탈꾼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반란군이 다른 한족 주민들로부터 받는 지원을 줄여나간다.

“교전 중에 입은 피해는 얼마나 되는지도 확실히.”

이는 다시 점령군이 된 고려-다이온 쪽에서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군수품, 그중에서도 생필품으로 쓸 수 있는 걸 좀 나눠준다든가, 아니면 복구 공사에 병사들이 나서준다든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저 새끼 왜 또 저래?”

티베트인 병사가 한족 노인 하나를 붙잡아 땅에 패대기친다. 티베트 쪽 장교는 모르는 척하고 있다.

고려군 장교가 그대로 달려나가 티베트 병사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먹였다. 상관은커녕 다른 군 소속인지라 병사는 계급이고 뭐고 없이 눈을 부라리지만, 고려군 장교는 권총을 꺼내 병사의 이마에 겨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이 미친 촌놈 새끼야, 군법 맛 좀 보고 싶냐?”

그제야 티베트 측 장교가 놀란 얼굴로 다가와 둘을 진정시킨다. 고려 측 장교는 선생에게 병사가 노인을 두들겨 팬 이유를 물어보라고 시켰다.

“저 노인의 자식이 반란군에 가담했답니다.”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였나?”

“반란군은 가족도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고……”

고려 측 장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티베트 장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도 군인이고 장교면 똑바로 들어! 앞으로 너네 애들 마을에 패악질 부리면 내가 총살시킬 거야! 알아들어? 총살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인마! 어? 빌어 처먹을 새끼들이 아주……”

처음 있는 일이었다면 고려군 장교는 당황한 나머지 벌어지는 일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결국 대뜸 욕지거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선생은 난감한 얼굴로 더듬더듬 티베트 장교에게 고려 장교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티베트 장교는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멀어져 갔다.

그건 그나마 옳은 판단이었다. 고려군 장교는 격분한 나머지 정말로 총을 쏘기 직전까지 갔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두 나라 군대 사이에 교전이라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고려군 장교도 씩씩거리며 임시 관사로 삼은 학교로 향했다.

골치 아픈 일은 또 남아 있었다.

“반란군 놈들…… 사회주의라도 하려던 거야?”

마을 유지 중에는 티베트인도 있었다. 티베트의 지배가 시작된 후 들어와 한몫 잡으려 한 장사치거나, 관리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반란군은 이런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재산을 빼앗아 마을 사람들에게 일부 나눠준 듯했다.

“아니지, 그냥 점령지 민심을 잡고 싶었던 거겠지.”

장교는 이마를 긁적인다. 티베트군은 티베트인의 편이다. 그래서 빼앗긴 재산을 다시 티베트인 유지들에게 돌려주려 한다.

하지만 고려군 입장은 다르다.

아무리 반란군의 약탈로 얻은 재산이라 해도, 현지 한족 주민들은 티베트인들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족 주민들의 반감을 사면 살수록, 군정은 어려워진다.

티베트인 유지의 탄원을 무시하고, 티베트 군인의 항의를 묵살하고, 고압적인 태도로 군정을 펼치는 수밖에.

“아니면 이것들 그냥 알아서들 살라고 철군하든지.”

전선보다는 나은 업무라곤 하지만, 그래도 뭔가 시원치 않은 느낌은 불쾌했다.

차라리 아주 확실한 권한이 주어져서, 일관된 태도로 군정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이 마을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점령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도 군인들은 이 장교와 비슷한 갈증을 느꼈다.

개봉에서 리안이 ‘역외사국’ 지도층의 안일함에 한숨짓는 것과 별개로, 군인이나 일반 국민들은 ‘민족의식’을 다시 한번 자각하고 있었다.

이미 세계대전을 통해 한 번 일어난 ‘우리는 한족과 다르다’는 발상.

그것이 이번에 한족 반란군과 싸우면서 더욱 확실한 윤곽을 띠어 갔다.

그 민족주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지도층의 목을 날릴 것이다.

지금 버마에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장교는 몹시 짜증 난다는 얼굴로 이상의 우려를 담아, 상관에게 올릴 보고서를 써 내려갔다.

***

태사 미리안과 울제이 칸은 불편함을 전혀 감추지 않은 얼굴로 마주 앉았다.

오늘의 회담은 개회사와 몇 가지 현황 보고만 하고 바로 끝났다.

당장 대책을 내놓자는 게 아니라, 각국이 현 상황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만 공유하자는 분위기였기에 대표들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안 그래도 예비회담에서 상당한 의견 불일치가 나왔기에, 본회담에서 격론이 오갈 것을 방지하자는 의도였다. 누가 직접 말로 꺼낸 건 아니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관중 분지, 이대로 탕구트 손에 남겨둘 수는 없지 않겠소.”

지난 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한 건가. 그렇다고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담소를 나눌 자리도 아니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리안은 그 무언의 제안에 응해주기로 한다.

“남겨두지 않는다면, 뭘 어쩌겠다는 말씀이신지.”

“반납하게 해야겠소. 전리품 말이오.”

“전리품이라…….”

그렇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탕구트가 동쪽으로 확장한 영토는 전리품이라 할 수 있다.

태평천국의 침략을 받은 주변국들이, 세계대전 이후 보상으로 받은 전리품.

태평천국의 영토를 갈기갈기 찢어 흡족할 만큼 집어삼킨 식민지.

“탕구트는 관중 분지를 관리할 능력도, 의지도 없소. 있다면 그저 넓은 영토에 대한 허영, 왕궁의 곳간을 채울 세입뿐이지.”

“그 말씀, 탕구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슬쩍 떠본다.

“굳이 탕구트의 예만 드신다는 건, 관중 분지를 빼앗아 ‘키타이가 관리하겠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닌지?”

왕궁의 곳간을 불리고 싶은 건 키타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라고 리안은 덧붙인다. 더할 나위 없는 비아냥이다.

울제이는 리안의 말에 대처하는 요령이 생긴 것인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리안의 말을 받아친다.

“여기 개봉에는, 다들 자국의 이권 하나 챙겨갈 욕심으로 온 것 아니겠소?”

“솔직해지셔서 좋군요.”

“피차 의뭉 떠는 짓거리는 질렸을 테니.”

“뭐, 저도 칸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탕구트는 전리품의 관리 소홀에 대해 벌을 받아야죠.”

따지고 보면 부담 경감이니 벌이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농담 같은 생각을 살짝 해본다.

“하지만 대놓고 키타이 영토로 편입시키자고 하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이미 우리 ‘다이온군’이 관중 분지로 들어가 군정을 펼치고 있지 않소.”

“힘의 문제가 아니에요. 다이온 연방이 탄생하자마자 주변국 영토부터 빼앗으면, 이후 외교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거라는 말이죠.”

나라의 힘이 약하고 강하고는 관계없는 문제다.

약육강식. 어떤 이는 그게 씁쓸한 진리인 듯 말하지만, 제정신인 나라라면 그 어떤 나라도 진심으로 그것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장은 승복한 듯 보여도, 그날의 강압은 결코 기억에서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그 ‘기억’들은 복수의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는 국가라 해도, 다른 나라의 압제에는 눈살을 찌푸리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그것이 위선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게 세상에서 선이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약자의 복수에 힘을 보태주거나, 압제자의 곤경을 외면해버림으로써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것이 ‘힘’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세계, 외교의 세계다.

가식의 가면을 천 겹 만 겹 뒤집어쓰는 한이 있어도 자국의 정책을 지지해줄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일본공화국이나 로마 제국 같은 나라들.

혹은 알티샤흐르나 카자흐처럼 역외사국 너머의 나라들을.

“실질적으로는 우리, 즉 다이온이 관리를 넘겨받더라도 명목상으로는 탕구트의 영토로 남겨두는 게 좋겠죠.”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고려 쪽에선 뭔가 ‘방안’을 들고 오신 듯한데.”

리안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칸쯤 되면 저 정도는 머리를 굴려야 한다.

멍청했다면 카간 자리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을 때, 진즉에 죽었을 테니.

“우리 쪽에선 ‘한족 관리 특구’라는 개념을 생각해봤어요.”

제국정보사령부에서 올린 방안. 외무성이나 철도성에서도 논의를 거쳤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견하의 감찰국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그걸 그대로 적용하는 건 꺼려졌지만, 울제이의 태도가 이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음 회의 때 슬쩍 말을 꺼내 볼까 하는데, 그때 키타이 측에서 힘을 좀, 실어주실 수 있으신지?”

울제이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한 얼굴이지만, 말로는 일단 고려의 의도를 떠본다.

“우리 키타이에만 점령지 통치를 맡길 생각은 아니라는 거군.”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다이온군’이 점령지 통치를 하게 되는 거죠.”

울제이는 입을 다문다. 생각에 잠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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