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7)
“태사가 직접 불러서 한재연을 다그쳤다면 한재연으로선 저항할 방법이 없어.”
“……그렇겠지.”
루우의 말을 들으며 견하는 침착하게 끄덕였다. 지금 한재연에게 화를 내봤자 결국엔 리안에게 화를 내는 꼴이다.
그 점을 잘 아는 견하의 마음속에서 화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견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점점 더 생각을 날카롭게 벼린다.
“이제는 누나의 「대타협 계획」 자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걸 생각해야지.”
“일단 반대할 것인가 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벗어났어.”
“절충안 말이지. 좋은 아이디어 있어?”
“황제로서 이야기하자면, 짐은 신하의 질문부터 받는 이 상황이 적절치 않다고 보는데.”
장난스러운 말투에 견하는 웃었다. 방금 「대타협 계획」을 건네받고 팽팽해졌던 신경이 다소 느슨해진 것 같다.
어쨌든 루우의 말은, 견하의 의견부터 먼저 말해보라는 것이다.
아직 루우에겐 별다른 의견이 없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견하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총명한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
이 문서를 먼저 받아본 루우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을 테니까.
먹던 밥을 다 먹고, 식기를 반납한 뒤 식당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견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문제의 초점은 두 개. ‘숫자’와 ‘지리’야.”
“숫자는 한족의 인구수를 말하는 거겠지?”
“그래. 태평천국이 멸망할 당시에도 많았고, 그토록 억압 정책을 펼쳐온 지금도 많아. 「대타협 계획」이 전면적으로 수용되면 그 수는 한없이 불어날 거야.”
그렇게 숫자가 늘어난 한족이 다이온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위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꾸로 ‘다이온의 주도권을 요구’해 올 수도 있으니까.
“한족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문제는, 다시 말해 고려인과 몽골인의 수가 너무 적다는 뜻이겠지?”
“맞아. 그러니 기존에 진행하던 ‘알타이 민족 개념’에 관한 연구는 계속해야 해.”
고려 민족과 몽골 민족 위에 알타이 민족이라는 ‘가상의 민족 개념’을 창작, 두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계획.
이는 고려와 몽골을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효과에 주목해 볼 수 있다.
“두 민족을 합쳐서 만든 인위적 민족이니, 알타이 민족 구성원의 숫자는 지금보다는 사정이 낫겠지.”
“그래도 여전히 한족에 비하면 적지만, 민족 동화 정책을 계속한다면 차차 늘어나긴 할 거야. 「대타협 계획」이 적용된 이후에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지리’는 뭐야?”
두 사람은 제1대학교 부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공원으로 나왔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라 분수대도 멎고, 풀은 갈색으로 시들었다. 그 사이로 놓인 벽돌길을 황제와 감찰국장은 느긋하게 걸었다.
대학교 새내기인 두 사람 사이에서 다이온의 미래를 결정할 정책들이 오간다.
“그건 결국 민족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긴 한데…… ‘한족이 차지한 땅이 너무 넓고 좋다’는 거야.”
고대부터 지금까지, 다소 변동은 있었으나 한족이 차지한 땅은 계속 풍족한 대지였다.
황하와 장강, 두 대하가 적셔주는 축복으로 땅은 막대한 식량을 생산해냈고, 그건 그대로 한족의 폭발적 인구 증가를 뒷받침해 주었다.
식량뿐만 아니라 다른 자원도 넉넉했다.
그에 비하자면, 고려나 몽골이 차지한 땅은 춥고 척박하다. 고려야 그나마 근대로 들어오면서 흥안령 산맥 동쪽의 드넓은 평원을 제대로 농토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몽골의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필사적인 철도 부설과 공업화 정책, 칸발리크와 발해만을 통한 무역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국력은 절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정책은 몽골의 사회를 모순으로 병들게 했지만, 사회가 병들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몽골의 자연환경은 가혹했다.
“좋아. 문제가 뭔지는 이제 됐어. 지금 필요한 건 태사의 「대타협 계획」을 받아들이면서, 그걸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야.”
견하는 루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멋있으면서도, 섬뜩하다.
“아까 내가 ‘인위적으로 두 민족을 하나로 합치는 정책’에 대해 이야기했지.”
“하지만 알타이 민족을 만들어도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가……”
거기까지 말하고 루우는 걸음을 멈췄다.
창의적인 발상을 한다고 칭찬해줘야 할까, 아니면 도대체 그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거냐고 고함을 질러야 할까.
“「대타협 계획」이 적용되면 한족을 강압적으로 알타이 민족에 동화시키는 데에는 제한이 생겨. 마찬가지로 한족의 영토와 자원을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지.”
그러나, 하나의 민족을 둘로 나눈다면 어떨까?
하나의 민족이 살던 땅도 둘로 나누면?
토지와 자원, 인구가 모두 절반이 된다.
알타이 민족의 입장에서도 부담을 훨씬 덜 수 있다.
“인위적으로 합칠 수 있다면, 인위적으로 나눌 수 있지 않겠어?”
완전히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루우를 향해, 견하는 덧붙였다.
“한족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키타이 민족, 다른 하나는 낭키아스 민족, 이런 식으로 이름 붙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아, 둘이 영원히 다시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는 해둬야겠지.”
***
추위에,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두 팔을 쓸었다.
일국의 재상이라기엔 채신머리없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다행히 주변엔 리안의 수행원들뿐이다.
-따뜻한 곳으로…….
처음에는 개봉에서 그녀에게 제공한 방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것이 점차, 따스함에 대한 갈망으로 변해간다.
리안은 연쇄적으로 ‘따스한 것들’을 떠올려 가다가, 그녀가 아는 가장 따스한 것을 떠올렸다.
연인의 품.
견하의 두 팔 안.
그의 심장 고동을 들으며 잠드는 순간.
리안은 흠칫 놀라며 생각을 중단했다.
귀가 빨개진 게 추위 탓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무심코, 귀국하면 할 일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태사로서가 아니라, 주견하의 연인으로서.
물론 그녀는 고려의 강철 같은 태사다. 표정쯤이야 금방 품위로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렇게 허리를 곧게 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내 볼에 와닿는 따뜻한 공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당장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하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있다.
이곳은 개봉의 궁궐 안, 국빈을 맞이하는 건물이다. 그렇기에 화려했지만, 분위기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본격적인 회담은 내일 있을 예정인데, 그 전에 각국 대표단이 서로 접촉하며 연 ‘작은 예비회담’들이 문제였다.
거기서 나온 잡음에 비하면 볼로드와 리안은 아주 만족스러운 협상을 한 셈이었다.
“이따 열릴 만찬 자리는 얼마나 불편할지…….”
각국 대표단들은 지금 서로의 동선이 ‘전혀 겹치지 않도록’ 조정해서 이 건물에 들어오고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서라도 들어오기 마련인데.
아예 기자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그런 장면을 연출은 하겠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할지,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이온 4국과, 이번에 한족 반란에 휘말리게 된 다른 4국의 입장이 너무 달라.”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회담에 참석한 다이온의 외교관들은 이 4개국을 ‘역외사국(域外四國)’이라 부른다.
“근대 국가가 기본적으로 갖췄어야 할 의식이 전혀 없어.”
‘국민’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이번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여론을 살펴본다는 등의 의식이.
“애초에 ‘국민’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잡혀 있을지도 의문이야.”
“그쪽 사람들…… 마치 옛날이야기 속 귀족을 보는 것 같았어요.”
효윤의 감상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정확했다.
“‘왕의 백성’은 있지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은 없어.”
굳이 따지자면 왕과 귀족들을 그 나라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은 그저…… 그 땅에 살던 것들일 뿐.
물론 어떤 국가든 상층과 하층 사이에 거리감은 있다. 두 집단이 완전한 일체를 이루는 나라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같은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뭔가를 하는 것이 근대 국가다.
비록 실질적으로는 상층이 하층을 이용할 뿐이라고 해도, 언어나 문화, 공통의 역사를 기초로 자국의 이름 아래 ‘하나’임을 내세운다.
그 ‘하나’가 허상이라 할지라도, 그 허상은 국민의 수와 생각, 경제적 혹은 군사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게끔 해준다.
“……없어, 그런 게. 전혀.”
있다고 해도 고려나 다이온 구성국들에 비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민을 어떻게 공장이나 군대로 동원하고, 어떻게 숙련공이나 정예병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계획’ 자체가 없어. 아니 계획을 세운다는 개념도 없어. 그저 적당히 싸움 잘하는 청장년들을 데려다가 중앙군에 필요한 머릿수를 채운다는 식이야.”
절레절레, 리안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단순한 구조적 문제가 아니야. 이쪽 지배층은 게으르고 썩었어. ‘그래도 되는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지.”
태평천국으로부터의 독립.
강대국의 승인 아래 영토 확장.
새로운 영토와 세원을 얻었다고 기뻐했을 뿐, 그게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한족이라는 이질적인 집단, 이미 태평천국을 통해 근대로 각성한 자들이 이민족 왕조의 정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반항한다고 해도, 그저 옛 시대의 정복에서도 볼 수 있는 ‘새 주인에 대한 낯가림’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차라리 식민지 정책을 제대로 펼쳤다면 형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 그건 체계적이기라도 하니까.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의식 자체가 바뀐 고려나 몽골과는 다르다.
“키타이나 낭키아스는 자기네 앞가림하느라 바빴고, 바라트는 공산혁명의 극심한 혼란을 수습하느라 바빴지. 혼란이 수습되고 나서는 동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틈새에서, 이 ‘역외사국’의 오래된 체제는 20년을 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급하니까 군대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꼴이란. 그러면서도 개혁에는 속도를 낼 수가 없다니!”
“내정간섭을 염려하는 거니까요…….”
“내정간섭 당하고 싶지 않으면 더더욱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것 아니야?”
고려나 몽골 수준을 단숨에 따라잡으라 주문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학교를 짓고, 교원을 양성하고, 공무원을 뽑아 행정력을 확충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이 나라 저 나라, 각자의 사정은 있지. 그런데 세계는 그 사정 안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