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6)
“……원래는 나도 개봉으로 갈 생각이었어.”
몇 페이지 넘기다 손을 멈춘 견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루우는 그저 듣기만 했다.
“바이다르와 직접 접촉해서, 친밀감을 형성해 본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리안의 완고한 반대 앞에 가로막혔다.
국내에 남으라는 명령.
“다소 일정이 어긋나긴 했어도, 그건 그것대로 재조정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되고야 말리라는 예감이, 물리적 실체를 갖추어 견하의 손에 들려 있다.
「대타협 계획」이라는 이 문서에는 이름 그대로의 내용이 담겼다.
즉, 한족에 대한 ‘큰 양보’가 골자를 이룬다.
한족의 ‘독립’만큼은 끝끝내 인정할 수 없지만,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제공한다.
첫머리에 적힌 대로 그간 몽골에서 진행해왔고,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서 지향하는 한족 문화의 완전한 소멸과는 정반대되는 정책이다.
최종적으로 몽골, 고려, 한이 루우라는 하나의 군주를 모시는 동군연합이 된다.
“이게 누나의 생각이라면 내가 지금껏 추진해 온 계획은 휴지 조각이 돼.”
한재연이나 천손민족협회의 생각에 동조하는 건 아니지만, 향후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한족 정책은 지금 수준을 유지하든지 더 발전해야 한다.
“누나는 다이온의 ‘유일한 태사가 되진 않을’ 셈인 것 같아.”
「대타협 계획」은 다이온을 구성하는 세 축의 주권을 인정한다. 군사나 외교 같은 분야에서만 ‘중앙정부’가 책임을 지고, 나머지 분야는 각 구성국의 정부나 의회가 책임을 지는 구조가 된다.
즉, 최소한 세 명의 태사가 연방에 존재할 것이다.
“당장은 고려의 힘이 모두를 압도한다고 하지만, 이 계획대로라면 언제까지나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어.”
황제만 고려인, 혹은 몽골인인 한족은 마음껏 자기네 민족적 역량을 회복해나갈 것이다. 인구, 문화, 경제…… 이 모든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개를 치리라.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 외에는 아무런 굴레도 없는 민족이 된다.
“당장 한족 반란 토벌이 끝나고 나면 한족의 반항은 잦아들겠지. 민족 자주니 독립이니 하는 생각 자체를 거세당할 거야. 아마 오랫동안 온순한 민족으로 남겠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오래 갈까?
“세계대전이 누구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는지, 왜 한족은 독립된 조국을 가지면 안 되는지, 왜 한족은 문화와 역사를 소멸당해야 하는지, 그걸 끝없이 주입하는 게 지금의 민족 정책이야.”
“태사의 계획은 그걸 중단한다는 거지.”
“중단하면, 그래서 한족의 민족적 역량이 꾸준히 성장한다면,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가 나오겠지. ‘왜 우리가 고려-몽골인 황제를 섬겨야 하지? 우리는 우리 민족 안에서 대표를 추대하면 안 되나?’ 하는 생각 말이야.”
그들은 망각할 것이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를.
“‘조상이 한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면 차라리 웃기기라도 할 거야. ‘태평천국이 못다 이룬 동아시아 정복을 우리 손으로!’라고 외치기 시작하면 그런 자들은 죽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그러니까 민족의 소멸은 그쳐선 안 된다.
차근차근, 100년이고 200년이고 수고를 들여서라도, 한족을 과거의 기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이온 연방은 존속할 수 있어.”
견하의 말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만 같다. 그는 이제 루우의 얼굴이 아니라 정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루우는 그런 견하의 옆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관점이, 정말 많이 변했다.
그녀가 견하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그래도 ‘억울한 죽음, 무차별 살인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루우는 그 골목에서 천손민족협회에 맞서 싸우던 견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금 견하의 옆얼굴에 겹쳐본다.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르게 보인다.
소년이 청년이 되었다는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안에 든 생각이 달라졌다.
-천손민족협회의 영향일까.
견하는 천손민족협회를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고, 조련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어느 정도는 옳았다. 견하는 그들을 자기 계획대로 움직이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 영향은 과연 일방적이었을까.
견하가 천손민족협회 출신들에게 받은 영향은 전혀 없는 걸까.
아닐 것이다.
지금 견하가 떠올린 발상, 하는 말은 마치 한재연의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 발상의 근원은 한재연이나 허동주와는 다르겠지. 고려 민족에 대한 애정, 고려 민족이 제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에서 나온 건 아니다.
단일한 제국. 단일한 체제. 단일한 황제와 단일한 태사.
그렇다면 이미 그것은 다이온 ‘연방’이 아니다.
대원황국(大元皇國)이지.
시작은 미리안의 강고한 권력…… 을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오로지 그것만을 바랄까?
효윤도 지적했고, 리안은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자신은 뭔가…… 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너의 제국’을 갖고 싶은 거냐고.
그러나 루우가 말을 던지기도 전에, 견하의 질문이 먼저 쏟아졌다.
“루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
“몽골의 황위만 이을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거야? 다이온의 카간이 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견하와 루우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의견의 일치’는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리안이나 안세규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공통점이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 동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암묵적 동맹은, 새삼 둘의 세세한 목적이 다르다는 깨달음이 찾아올 때 결별의 위기를 맞는다.
견하에겐 권력을 향한 길목에 우연히 루우가 서 있었을 뿐이고, 루우에겐 동군연합을 향한 길목에 우연히 견하가 서 있었을 뿐이다.
이제 견하는 얼굴을 돌려 루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루우 역시 고개 돌리지 않고 똑바로, 견하의 눈을 들여다봤다.
아무리 똑똑하고 야심이 커 봤자 감찰국장.
태사가 세운 계획이 루우의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닌 이상, 루우가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리안의 계획은 아주 안정적이다. 어쩌면 세 민족 집단이 각자의 영역에서 수준 높은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게, 평화로운 동아시아 체제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견하의 방식처럼 ‘퇴위’와 ‘제거’라는 명확한 지점들이 있는가?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마냥 리안의 계획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수명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우 자신도 미처 느끼지 못한 조바심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놓고 싶지 않다.
그녀의 소년은 아니지만,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태사의 계획도 끌리는 건 맞지만, 주견하 네 ‘과격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큼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긴 어렵겠지.”
뒤에 떠오를 생각을 잘라내듯, 루우는 말을 뱉었다.
해선 안 되는 생각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루우는 열심히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굴려,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태사의 계획에는 ‘한재연의 아이디어’보다 나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나은 부분이라…….”
한숨을 내쉬는 듯한 견하의 말에, 루우는 자신의 말을 바싹 붙였다.
“한족 통치에 들어가는 비용은 확실히 절감돼.”
그것이 유형의 비용이든, 무형의 비용이든.
“타민족 황제는 간접적으로 군림할 뿐이고, 직접 통치하는 정부는 자기네 민족이지. 민족 단위의 반감을 억누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 대부분을 스스로 지불할 수 있게 돼.”
아니 애초에, 반감이 생길 여지가 많이 줄어든다.
민족들의 정치가 분리되면, 충돌도 그만큼 줄어드니까.
“충돌이 줄어들면 증오도 차츰 감소해. 증오와 함께 쌓이는 경멸도 그렇고.”
서로가 서로를 다른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줄어들면, 민족 간 우호 증진이 가능해진다.
“우호 증진은 긴장 완화로 이어져. 외적 긴장이 완화되면,”
“……내실을 다질 수 있게 되지.”
“그래.”
“내실, 누나가 바라는 내실이란 ‘국민이 집단 자살을 결의하지 않는 민주주의’일 거야.”
2년 전, 제국 정부와 민국 정부가 합작하기 전에,
미리안은 안세규에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고 한다.
‘만약 국민이 침략 전쟁을 민주적으로 결의한다면?’
‘만약 국민이 민주주의의 철폐를 민주적으로 결의한다면?’
민주정 체제뿐만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때도 민주적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가, 하고.
「대타협 계획」은 리안이 오랜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일 것이다.
“그 민주정은 대외 확장이 아니라 문화와 경제의 발전을 추구한다. 평화적 정책은 다시 이러한 민주정을 가능케 한다.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거겠지.”
“나도 여느 ‘자유세계’의 군주들처럼, 민주정이라는 토대 위에 희미한 영향력만을 끼치는 존재로 거듭날 거야.”
견하는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까지 말한 「대타협 계획」의 장점은 매력적이다.
안정을 추구한다면 이보다 더 안정적인 국가 전망을 짜긴 어렵다.
“이 계획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어려워. 태사의 영향력도 영향력이고, 휴지통에 던져버리기엔 쓸모가 많아.”
“그렇다면……”
우리의 동맹은 여기서 끝인가? 견하가 그렇게 묻기 전에, 루우가 먼저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견하 네가 지금껏 추진해 온 계획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순 없지.”
“지금 계획에 「대타협 계획」을 섞자는 거야?”
“절충안이지. 특히 민족 문제 부분에서의 ‘보완책’.”
민족 문제 보완책이라, 라고 견하는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의미 없이 서류를 구부린다.
타타타닥, 구부러지던 여러 장의 종이 끝이 견하의 엄지를 벗어나 빠르게 넘어간다.
“누나에게도 당연히 AN연구소에 간섭할 권한이 있지만, AN연구소에서 이런 연구까지 내놓을 줄은 몰랐어.”
견하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 누구보다도 고려 민족을 중심으로 사고하던 재연은 이런 발상도 가능했단 말인가.
재연에겐 전에 자신이 모르는 일을 진행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 점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 놀라움이 앞섰다.
루우는 견하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한재연을 탓할 일은 아니야.”
알타이 민족 문제 연구소, 약칭 AN연구소는 감찰국에서 아이디어를 내어 설립했다. 따라서 감찰국장의 직접 통제 아래에 있다.
하지만 감찰국장의 상관인 태사가 연구소의 자원을 활용하겠다 하면 제동을 걸 방법은 없다.
지금껏 한재연은 루우의 부탁을 받아 각종 계획을 바쳐왔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황제의 ‘자문’에 응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태사가 황권을 함부로 침범했다고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AN연구소는 제국입헌당의 정책 자문에도 응하고 있다. 그토록 광범위하게 발을 걸친 집단이 ‘견하 한 사람’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이는 건 불가능하다.
견하가 절대권력자가 되지 않는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