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5)
“공화정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다는 점에서, 우리 고려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만큼이나 진보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안세규는 최근 여러 대학교에서 열리는 강연이나 토론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모교인 제1대학교에서 열리는 토론회에 들렀다.
고려민국의 주석이었던 사람이자, 현 내무장관이 참석한 자리여서인지 후배들은 준비를 많이 해온 듯하다.
발제자들도 아주 총명한 친구들이고.
안세규는 그런 후배들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후배들은 얼마만큼 그 지성을 키워왔을까.
그들 중 쓸만한 사람은 없을까.
새로운 인재의 발굴은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안세규 장관님?”
학생 하나가 속삭이며 말을 걸어왔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선배님.”
안세규는 제1대학교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미승휴 정권 시절부터 신출귀몰하며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내전 시기에는 홀연히 나타나 태사 미리안과 협상, 민국 정부에 대한 오랜 탄압을 끝냈다.
그가 황실의 후예를 비밀리에 보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저도 후배들의 탁월한 식견을 직접 듣게 되니 영광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세규는 학생과 악수했다. 학생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아마 이 토론회가 끝나면 뒤풀이 자리에서 몇 번이고 자랑해대겠지.
고려국민당의 총수로서 이렇게 직접 얼굴을 내밀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당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다.
세규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발제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발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려의 현 체제가 얼마나 ‘공화’에 가까운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지금 여기 토론회에서 나오는 발언들은 복고주의자들에겐 불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고주의자들은 더 이상 이런 토론회를 탄압할 수 없다.
고려의 현 체제는 민국 정부 세력을 받아들여 성립되었으니까.
민국 정부 쪽 정당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미승휴 시대를 반복할 게 아니라면, 민국 정부 인사들이 과거부터 주장해왔고, 지금도 포기하지 않을 ‘자유’를 인정해줄 수밖에.
무엇보다도 황제 루우가 그런 논의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물론 루우가 리안에게 했던 말이 새어나간 건 아니다.
‘자신이 후계자 없이 죽을 경우, 리안이 고려민국의 통령이 돼라’고 했던 말은 두 사람만의 철저한 비밀이다.
그러나 루우의 언행은, 그녀가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직간접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퍼트렸다.
‘공화국’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해도 좋다는 분위기를.
“공화정을 군주정과 반드시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군주정의 양상에도 여러 가지가 있듯이, ‘공화’적 요소도 군주정 속에 얼마든지 녹여낼 수 있으니까요.”
“외국의 사례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있지만, 그 성격은 공화국의 집정관에서 연장된 것입니다.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공화국 체제를 포기한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도 있죠.”
“신성제국 역시 그러합니다. 보나파르트 황실이 ‘자유제국’을 표방하며 혁명과 프랑스 공화국의 여러 요소를 그대로 계승했죠.”
“황제 폐하가 계시지만 국민이 투표를 통해 제국최고회의 의원을 뽑고, 제국최고회의가 태사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우리 고려제국도, ‘공화’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곧바로 반대 의견이 쏟아진다.
“하지만 고려 제3 제국 체제는 분명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권력의 분립과 견제’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개념만큼이나 중요한 공화적 요소가 바로 권력의 분립이니까요.”
리안이 바로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고려의 대학생들도 같은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내전, 대공황, 뒤이은 몽골에서의 동란……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비상조치’를 요구했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비상사태는 없고, 이것이 끝나간다는 명백한 징후가 포착되었다면 비상조치는 해제되어야 합니다.”
“태사가 제국최고회의 의장을 겸하는 현 상황은, 물론 군사적 위기에 대응하거나 총선거 도입 등의 개혁 정책에서 추진력을 발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두 번째 총선거가 치러질 1933년 6월 이후로는 두 직책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두 직책의 겸임은 현 태사를 사실상의 전제군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의 존재, 태사 개인의 양심, 국민의 감시가 마지막 한 걸음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죠. 이건 아직 우리 고려의 ‘공화적’ 요소가 미완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화의 완성은 황실의 폐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이야기까지 나올까?
하지만 거기까지 논하기엔 아직은 어려움이 많은지, 대학생들의 토론은 태사 문제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러고 보면 최근엔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다.
류성일이 카라코룸으로 쫓겨난 이래, 태사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안세규가 황제와 접촉하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태사의 경계를 살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규는 최대한 신중한 행보를 보여 왔다.
류성일과 제대로 연락을 나누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배님!”
토론회가 끝나고, 강당 밖으로 나선 세규를 누군가 불렀다.
이 토론회를 주최한 학생이다. 세규는 미소 지으며 다가갔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가 당연히 와야 할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해야겠죠. 이렇게 활발하게 공화제와 민주주의를 토론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미래는 밝다. 그런 낙관이 들 정도였다.
“예……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몇 달 전에 비하면 아무래도 준비 상태나 규모가 크게 미치지 못해서…….”
“그런가요?”
“네. 노력은 하고 있는데…… 그래서 선배님처럼 정치권에서 크게 활약하시는 분이 와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세규는 후배의 말에 섞인,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최근에 감찰국장 주견하가 주도하는 학생조직의 세력이……?”
“네! 맞아요. 알고 계셨군요?”
역시나, 싶었다.
“토론회를 방해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폭력이라도 휘두른다면 내무장관인 제가……”
후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저쪽은 철저하게 우리와의 갈등은 피하려고 해요.”
“그렇다면?”
“이론 면에서든 물질적인 측면에서든, 준비가 더 철저하다…… 고 해야 할까요?”
한재연을 우두머리로 하는 AN연구소. 석학들의 머리에서 나온 이론들이 정치경찰실의 지원을 받아 훨씬 품질 좋은 책자로 나온다.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토론하는 그 모임들 쪽으로, 많은 학생들의 마음이 기운 모양이다.
이미 천손민족협회가 있을 당시부터 쌓인 경험과 지식이 있겠지. 게다가 한재연의 ‘수정주의’는 단순히 허동주의 이론에서 방향만 조금 비튼 게 아니다.
허동주 사상의 약점을 상당 부분 보완한 것이다.
“‘제1대학교는 주견하의 참모본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예요, 요즘엔.”
그 정도인가.
“알겠어요. 제가 고려국민당에서 예산 일부를 지원해줄 수는 없는지 알아볼게요.”
세규는 그 말에 얼굴이 환해지며 꾸벅 허리를 숙이는 후배를 만류했다.
후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그는 주견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
주견하라는 ‘거물’의 이름이 나오고 있던 그 시각.
제1대학교의 다른 곳에서는, 루우와 견하가 강의를 듣고 있다.
루우가 ‘비록 황제지만 겸손하고 성실한 학생’을 연기하려고 열심히 강의를 듣는 것과 달리, 견하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류성일 및 안세규 문제를 두고 루우와 리안 사이에 이야기가 오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류성일이 카라코룸으로 내쫓긴 건 황제 루우의 뜻이다.
황제는 세력균형을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정치에 간섭할 줄 알았는데.
자칫하면 정파 간 세력균형을 무너뜨릴지도 모를 행동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견하는 곁눈질로 옆자리의 루우를 살펴봤다.
아직 고등학생 같은 티가 남아있는, 평범한 여대생인 것처럼 보인다.
질문하려고 손을 든다.
루우는 교수에게 미리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해달라’고 말해뒀기 때문에, 교수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 간신히 “그래, 서라 양이…….” 하면서 입을 연다.
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루우는, 신환도역 전투에서 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안세규 휘하에 있었다.
그냥 평범한 부하가 아니다. 안세규가 그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측근으로 두었으니까.
따라서 안세규와 구 민국 정부의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류성일은…… 안세규에게 뭔가를 덮어씌우려 한다. 자신은 그저 그 일에 휘말렸을 뿐이라고, 억울하다고 호소해 왔다.
아쉽군.
카라코룸 문제. 류성일과 안세규 문제를 좀 더 물어볼 걸.
리안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끌어내지 못한 게 안타깝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이런 추측만 반복해야 하다니.
“뭘 그렇게 봐?”
톡톡, 이마를 두드리는 손가락 덕분에 견하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계속 루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느새 강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
볶음밥과 베이컨.
학생 식당에서 서양식을 흉내 내보겠다며 만든, 오늘의 저녁 식사였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태사부에서 먹는 밥에 비하면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다.
볶음밥의 고슬고슬한 느낌을 혀로 눌러대며 한창 즐기고 있는데, 루우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뭐야? 과제?”
“1학년이 무슨 과제를 그렇게 하겠어. 4학년도 그렇게는 안 해. ‘일’에 관련된 거야. 봐 봐.”
견하의 문서의 제목을 보기 전에, 누가 만들었는지부터 확인했다.
“알타이 민족 문제 연구소…… 너한테 온 거야? 그럼 「계획」에 뭔가 추가할 의견서인가?”
“나한테 온 게 아니야. 태사한테 온 거지.”
한 손으로 대충 서류를 넘기려던 손길이 멎는다.
베이컨을 집으려던 젓가락질이 멈춘다.
견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누나한테?”
“정확히 말하자면 태사의 의뢰로 작성된 계획이야. 자세히 읽어봐.”
그제야 견하의 눈에 문서의 제목이 들어왔다.
「대타협 계획」.
대충 넘기던 손길이 신중해진다. 다시금 첫 페이지로 돌아가, 글자 하나하나를 뇌에 확실히 입력하겠다는 듯 읽어나간다.
바쁘게 종이 위를 오가며 흔들리는 견하의 시선을 보며, 루우는 씁쓸함을 씻어내듯 물을 삼켰다.
문서는 이런 식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본 계획은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서 상정한 대(對) 한족 문화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전제하는 대안으로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