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회담(14)
“극북 지역을 통한 호데노쇼니 지원이라고요?”
리안은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이 제대로 들었냐는 식으로 볼로드에게 반문했다.
“유럽이 아즈텍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든다면, 우리라고 가만히 있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즈텍에서의 내전을 장기화할 만한 정책을 추진하는 건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정세뿐만 아니라 경제도 혼란으로 몰아넣겠죠.”
만약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다이온과 유럽 각국의 관계도 악화할 것이다.
“하지만 태사, 고려에서도 이미 분석을 마쳤겠지요. 이 내전이 종결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누가 승자가 될지 말입니다.”
그 답은 정해져 있다.
“……멕시카 자주국이겠죠.”
“태사, 우리도 신수덕이 산동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정도는 알아냈습니다. ‘철혈의 꽃’, 그 후신인 대륙해방군에서 일했더군요. 대륙해방군은 지금 멕시카 자주국이 되었고.”
신수덕이 전해준 파멸인이나 기갑사 관련 기술 덕분에 멕시카 자주국은 지금 내전에서 가장 우위에 서 있다.
“신수덕이 반란군과 거래했고, 그 반란군이 칸발리크에 저지른 짓이 있는 이상, 우리 몽골은 멕시카 자주국과 국교를 맺진 않을 겁니다.”
볼로드는 절대로, 라고 못 박았다.
오랜만에 리안의 말문이 막혔다.
멕시카 자주국이 결국 구 아즈텍 연방의 영토를 통일한다면, 과거사야 어찌 되었든 외교는 정상화해야 한다는 게 리안의 생각이었다.
섣불리 적대하지도, 개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이온 연방의 주요 구성국 사이에 외교 방침이 이렇게 달라서야…….
“칸발리크가 끔찍한 비극을 겪었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이해합니다.”
말하면서, 리안은 고민했다.
외교 방침을 바꿔야 하는가, 하고.
평화를 향한 길은 정말 험난하다.
누구나 평화를 바란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가 너무 깊다.
원한과 증오를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억지로 맺은 평화협정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정당하다는 것.
그 사실이 평화를 향한 걸음을 종종 멈추게 한다.
때론 역사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순간적으로 리안은 다이온 연방의 해체를 생각해봤지만, 루우가 있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리안의 얼굴에 나타난 난처한 심정을 읽었는지, 볼로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우리가 직접 아즈텍 내전에 개입하자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길을 빌려줄 뿐’이지요.”
그 말이 귀에 들어오고 나서 아주 잠깐 멈칫했던 리안의 눈이 커진다.
“바라트가 육로로 다이온을 통과해 호데노쇼니를 지원하게끔 한다?”
“일단은 철도를 통해 고려로 들어왔다가, 고려의 영해를 빙 돌아 호데노쇼니가 장악한 항구로 들어가는 거죠.”
이렇게 방법을 쓰면 어느 정도 비밀도 보장되지 않을까.
“당장은 겨울이라 남쪽에 있는 부동항을 활용해야겠습니다만, 날이 풀리면 극북 지역의 항구들을 이용해 좀 더 빠른 수송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태사.”
리안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다.
그녀로서도 신수덕이 지원한 세력이 그 거대한 대륙의 패자(霸者)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이를 방해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바라트에 이어서 거대한 공산국가가 또 하나 탄생하면, 우리 다이온은 좌우로 포위됩니다.”
물론 아즈텍 대륙을 통일할 정도로 거대한 공산국가가 바라트의 지령대로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큰 위협이긴 하다.
“예. 그러니 적절히 조절해야죠. 멕시카 자주국의 힘을 빼도록…… 우리의 이상적인 대아즈텍 정책 방향은,”
“신 연방인지 뭔지가 최종 승자가 되도록 하는 게 가장 좋은 형태겠죠.”
그 나라는 한동안 유럽의 영향권 아래 놓일 테지. 하지만 호데노쇼니가 승리했을 때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그 덩치 때문에 언젠간 유럽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좋습니다. 지금 이건, 개봉회담에서는 꺼내지 않을 생각이시죠?”
“예, 고려와 몽골만의 협정인 것으로.”
리안이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볼로드는 덧붙였다.
“원철의 사업을 키타이와 낭키아스로도 확장하신다던데, 바라트도 원철의 사업에 기대게끔 하면 어떻겠습니까?”
대원철도주식회사가 사들인 철도, 또는 신설한 철도를 이용해 운반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몽골의 타이시가 내뱉은 이 제안은 또 다른 의미도 담고 있다.
게레센제의 신원연구회가 아니라, 원철과 협력한다. 즉, 볼로드는 게레센제의 정책을 견제하는 중이다.
정확히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리안은 볼로드와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악수한다.
이 자를 제거하는 건 쉽지 않으리라 직감하며.
***
몽골의 제국입헌당.
표면적으로는 고려의 제국입헌당과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정당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두 정당은 몽골의 내전기부터 밀접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지금도 고려의 정책을 돕는 중이다.
고려 쪽에서도 몽골에서 이들이 탄압당하지 않게 지원해줄 뿐만 아니라, 몽골의 개혁 정책에 힘을 싣기 위한 외교적 압박도 해준다.
게다가 이들의 당적은 고려의 제국입헌당에서 관리한다. 그걸 아는 사람은, 누구도 두 정당이 별개의 당이라 말할 수 없다.
-제국입헌당이 들어선 덕분에 쿠릴타이가 보다 발전한 다당제 의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지요.
리안은 볼로드가 툭 던졌던 그 말을 떠올려본다.
마치 제국입헌당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 같은 말이지만, 그 실상은 비꼬는 말이다.
자신의 집권을 방해하기 위해 참 공들여서 수작을 부리시는군요, 하는.
개혁을 좋아하지 않는 볼로드 입장에서는, 몽골 제국입헌당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 당원들은 대부분 ‘이중당적’ 보유자로, 여러 사회주의 계열 정당에도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을 불법화시켜 두었는데, 제국입헌당의 이름을 빌려 쿠릴타이로 진출하다니.
볼로드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방금 볼로드와 나눈 대화도 겉으로만 협력 운운한 거지, 실상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그럼, 바라트의 지원이 다이온의 국토를 통과한다는 방안은……?”
약속을 뒤집을 거냐는 효윤의 물음에,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대로 진행할 거야. 우리한테도 필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볼로드의 제거 시점을 앞당겨야겠다.
몽골 제국입헌당을 더욱 강하게 밀어주자.
총선거를 압박하고 선거 운동에 필요한 자금도 지원한다.
볼로드와 그 추종자들을…… 쿠릴타이에서 몰아낸다.
“아무리 루우의 카간 즉위를 지지해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어.”
몽골의 좌익들이 굳이 ‘제국입헌당’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는 건, 고려 제국입헌당의 지원을 받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이름 자체가 드러내는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입헌.’”
헌법을 세운다는 뜻이다.
“몽골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지. 칭기스 이래 카간의 혈통도 끊긴 적이 없어. 즉 황실의 관습이 헌법을 대신하는 나라지.”
칭기스 카간이 세운 법령, ‘야삭’에서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사문화하고, 필요한 것들을 덧붙여가며 성립된 몽골의 법체계.
그 법체계를 몽골의 전통 그 자체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한 체계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권위와 권한이 어디까지인가 제대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낭키아스, 키타이의 총독인 칸이 군권과 정권 모두를 한 몸에 지닌 것과 마찬가지로, 카간도 몽골의 군권과 정권을 모두 쥐고 있다.
헌정 체제가 선 고려의 황제와는 사뭇 다르다.
“말만 입헌군주정일 뿐이지, 내일 당장 게레센제가 전제군주정을 실시해도 막을 명분은 없어. 행동에 옮기기엔 게레센제의 힘이 부족하니까 이런 체제가 유지되는 거지.”
“볼로드의 존재도 카간의 권력을 견제하고 있고요.”
“정상적인 상태라면 타이시와 카간이 서로 엇나가지 못하도록 잡아주는 체제지. 완전히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몽골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겪었다.
시레문의 갑작스러운 죽음.
게레센제인가 루우인가, 누가 카간으로 즉위할지 흔들리던 권력의 공백기.
칸발리크 테러 사태와 몽골의 내전은 누군가의 ‘지도력’을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볼로드는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었다.
“몽골의 범좌익은 이런 상황을 타파하자는 거야. 그러니 그 개혁의 출발점으로 일단 ‘헌법을 세우는 것’부터 잡는 거지.”
그렇기에 그들은 ‘제국입헌당’의 이름을 차용했다.
“나중에 가서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든 뭘 하든, 일단 헌법이라는 체계 자체부터 갖춰야 한다는 건 정파를 초월한 공통 의견이야. 헌법에 따라 체제를 꾸려나가는 경험은 중요해.”
몽골에 헌법이 세워진다면, 지금껏 관습으로 남아있던 모호한 모든 것이 명확히 규정될 것이다.
카간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국민과 국가, 군주의 관계는 무엇인가.
권력은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군주의 권위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국민은 어떤 권리를 보장받는가.
국가는 어떤 때에 그 권리를 정지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권력 집행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몽골의 좌익이 우리 고려를 모델로 삼아 개혁에 착수하기로 하면서 설정한 방향이지.”
고려도 불과 3년째에 접어들고 있을 뿐이지만,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치른 경험은 무척 소중했다.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가고 있었다.
“루우랑 입씨름이 좀 오가긴 했어도 황제의 권한에 제한을 둔 건 분명 큰 성과야.”
그렇기에 지금껏 고려의 폭주를 억눌러 올 수 있었다고, 리안은 믿는다.
“몽골도 마찬가지지. 다이온이 초강대국으로서 폭주하지 않게 하려면, 몽골의 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
“하지만 볼로드는……”
“그 ‘입헌’마저도 못마땅해하지. 그게 그가 실각해야 할 이유야.”
볼로드가 게레센제를 견제하는 건 카간의 길을 바로잡는다는 충정 따위가 아니다. 물론 그도 몽골을 어떻게 이끌어야 한다는 이상은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개혁 없이도 자신의 힘만으로 그렇게 이끌 수 있다고 믿는 게 문제지.”
입헌은 카간의 권력에 고려처럼 제한을 둔다.
동시에 ‘카간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명분으로 휘두르는 타이시의 권력에도, 제한이 생긴다.
“어떻게든 모호함 속에서 강대한 권력을 누리겠다는 속셈이야.”
마치, 백부 미승휴가 제3 제국 체제를 모호한 안개 속에 두었던 것처럼.
섬뜩한 뭔가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문득, 리안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녀 자신도 제국최고회의의 의장을 겸하면서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본래대로라면 태사와 의장은 분리되어, 각각 행정부와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서로를 견제해야 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겠지.”
되뇐다.
자신도 볼로드나 백부처럼, 권력을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려를 위한다는 것은 핑계고, 실상은 자신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망상에 빠진 게 아닐까.
권력의 딜레마.
욕망과 의무감의 뒤섞임.
그것을 새삼 실감하자마자, 한없는 우울감이 그녀를 덮쳤다.
리안은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